아카시아꽃이 핀다. 연녹색 이파리 속에 하얗게 핀 모습이 꼭 티밥 같다. 산들바람 타고 다가오는 향기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다. 꽃 향기 맡고 온갖 새들의 합창을 들으며 걷는 이 길은 분명 신선의 길일 것이다. 오늘 아침 소나무 맨 꼭대기 가지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를 따라하다가 내 스스로 놀란다. 새소리가 내소리인지 내소리가 새소리인지 순간 햇갈린다. 지금까지 따라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단 한 번도 비슷한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신기하게도 거의 똑 같은 소리를 내고 있으니 말이다. 옆에 있던 각시 마저 동그란 눈으로 쳐다 본다. 분명 오늘 아침은 신선이 나를 이용하여 새 소리를 낸 것이 틀림 없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깨끗하고 신선한 날을 허락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오늘은 구름 한 점 없고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청명한 날이다. 

 

요즘은 한 번씩 놀랄 때가 많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숨, 즉 들숨날숨, 호흡이다. 과연 내가 숨 쉬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내가 의식하고 있을 때나 아닐 때나 숨은 쉬어지고 있다. 특히 무의식 중에 쉬어지는 숨은 누가 쉬는 것인가? 분명 누군가 숨 쉬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 나는 그 누군가를 자연계(존재계, 우주계)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나를 온통 감싸고 있는 것은 자연계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숨 쉬는 게 아니라 자연계가 나를 숨 쉬고 있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그 뿐만이 아니다. 혈액을 순환 시키고, 소화를 시키는 일도 마찬가지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분명 누군가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음에 틀림 없다. 자연계의 신비스러움과 위대한 힘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간단한 진리 하나를 알 수 있다. 삶을 힘들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너무 애쓰지 말라는 것이다. 쓸데없는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저 자연계가 하도록 내 맡기면 된다. 내 맡기기만 하면 편안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내 맡기지 못하고 오히려 자연계가 하는 일에 반기를 들고 있다. 인간의 고통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고 정복하려는 마음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인간이 자연계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자연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부분이 큰 전체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진리다. 

 

꽃, 새, 나무, 강, 바다 등은 자연계의 법칙에 맡긴다. 자연계의 흐름에 따른다. 역행 하거나 정복 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그렇지 못하다. 꽃처럼 되어야 하고, 새처럼 되어야 하고, 나무처럼 되어야 하고, 강과 바다 처럼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마음이 내면에 침투했기 때문에 자연계의 흐름에 내 맡기는 것이 어렵다. 생각,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온 인류 역사를 통해 쌓아올린 욕망의 덩어리다. 오랜 역사를 통해 인간의 내면 깊이 심어졌다. 생각과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자연계를 이해할 수 없다. 생각과 마음은 과거 또는 미래에만 존재할 수 있다. 절대로 현재, 즉 지금 여기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은 현재, 즉 지금 여기다. 현재는 실재로 존재하는 실체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실체가 없는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 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체하는 현재에 삶의 가치가 있는 것은 당연한 진리다.

 

현재, 지금 여기 밖에 없다. 현재만이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삶은 지금 여기, 현재가 유일하다. 지금 여기, 현재는 다시 오지 않는다. 순간 순간 지나간다. 이 순간 순간을 헛되일 보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순간은 과거가 되고 또 다시 미래로 달려가게 된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다.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한다. 모든 것은 지금 여기, 현재 뿐이다. 지금 여기에 온 삶을 투자해야 한다. 

 

미래는 없다. 가도 가도 잡히지 않는 지평선과 같다. 결국 지쳐 쓰러져 죽고 만다. 발걸음을 멈추고 길가의 나무그늘 아래 앉아 쉬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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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감질나게 내려 애가 탄다. 좀 시원하게 내렸으면 하고 바래 보지만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알고 보면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자연계(존재계, 우주계)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돌아간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힘이다. 이런 걸 보면 인간은 참 보잘 것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은 이 거대한 힘을 바꿔 보려고 온갖 애를 쓰고 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될텐데 아까운 에너지를 낭비하다가 결국은 쓰러져 죽고 만다. 이것이 바로 고통이고 불행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 자연 그대로다. 자연을 꼭 빼 닮은 존재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알몸인 것도, 우는 것도, 웃는 것도, 모두가 자연처럼 순수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부모로부터 여러 가지를 따라하게 되면서 자연스러움은 점점 사라진다. 부모와 사회와 종교의 세뇌화가 시작되면서 완전히 자연성을 잃고 만다. 가정의 규율과 사회의 법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으로 전락하고 만다. 부모와 사회와 종교는 자연적인 것은 모두 나쁜 것이라고 가르킨다. 

 

부모와 사회와 종교는 어떤 이상과 이념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이뤄야 한다고 가르킨다. 이상과 이념을 가질 때 하나의 이미지가 마음속에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이미지와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한다. 그 비교는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게 한다. 이 부족함, 모자람 때문에 자신을 비난하게 된다. 태어날 때 선물받은 자연스런 자신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 순간 내면의 혼란, 혼돈, 불행이 찾아온다. 

 

이상은 언제나 미래에만 존재한다. 이상은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 이상, 미래, 꿈과 같은 단어는 실체가 없다. 실재하지 않는다. 실체가 없는 것은 그 어떤 충족감을 주지 못한다. 설령 충족되었더라도 곧바로 마음은 더 나은 이상을 세운다. 이런 식으로 불행이 계속된다. 

 

이상, 미래, 꿈, 국가, 충성, 애국, 자유, 평화, 민주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랑, 미움, 분노, 욕망 등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든 이런 단어는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나무와 새, 산, 강, 바다, 사람, 꽃과 같은 것은 실재한다. 지금 여기는 실재한다. 그러나 과거나 미래는 실재하지 않는다. 

 

실재하지 않는 것들 때문에 '지금 여기' 에서 삶을 살지 못한다. 오직 '지금 여기' 에서 사는 삶만이 충족감을 가져온다. 현재를 사는 삶만이 즐거움과 기쁨을 가져온다. 

 

실체가 없는 말(단어)에 세뇌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정치가들이 하는 말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역사상 실체가 없는 화려한 말들을 지어낸 사람들이 바로 정치가들이다. 그럴싸한 말로 수많은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다. 히틀러가 그랬고, 뭇솔리니가 그랬고, 일본 천황이 그랬다. 지금도 똑 같은 히틀러, 뭇솔리니, 일본 천황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이 지구를 불구덩이 속으로 내몰고 있다.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이 어리석은 정치가들의 탐욕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다. 전세계 평범한 사람들이 깨어나는 것이다. 먼저 실재하지 않는 말들을 세뇌된 의식에서 지워버리는 일이다. 태어날 당시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다. 자연스러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자연스러워지면 정치가는 자연히 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자연성으로 충만한 존재는 정치가의 그 어떤 미사어구에도 걸려들지 않기 때문이다. 

 

말의 장난에 놀아나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부모, 사호, 종교로부터 세뇌된 마음(생각)을 제거해야 한다. 그 모든 말과 마음(생각)은 과거 또는 미래에만 존재가 가능하다. 절대로 현재, '지금 여기' 에 존재할 수 없다. 현재만이 유일한 삶이다. '지금 여기' 만이 살아야 할 삶이다. 그 외의 삶은 실체가 없는 꿈에 불과하다. 실체가 없는 꿈은 좌절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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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모란꽃 한 송이가 새벽을 연다. 이년 전 이른 봄에 한 뿌리를 구해 심었다. 때 이른 봄 날씨에 적응을 하지 못했는지 그해와 작년까지는 겨우 한 가지만 살아 남았다. 그 가지가 올 해는 일찍부터 키 자랑을 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오늘 하얀 꽃을 피웠다. 반드시 꽃을 피우고 말겠다는 모란의 열망에 고개가 숙여진다.

 

매년 봄이 되면 떠 오르는 의문이 있다. 꽃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또 지는 꽃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어느 순간 꽃이 피었고 어느 순간 사라지고 나니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갑자기 아름다운 꽃이 나타나니 얼마나 신비하고 좋았는지, 그러다가 그 아름다운 꽃이 사라지니 또 얼마나 아쉽고 슬펐는지 모른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 공(空)에서 왔다가 무(無), 공(空)으로 간다.' 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 신비하게 왔다가 신비하게 사라진다. 이 세상 모든 것 중 어느 하나라도 왔다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의 몸도 그렇고, 나무도 그렇고, 새들도 그렇다. 모두 다 신비스럽게 왔다가 신비스럽게 사라진다. 그 신비는 도저히 풀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무(無) 또는 공(空)이라 표현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신비스러움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어떤 능력으로도 풀 수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 그 느낌을 느끼는 자가 있음이 분명하다. 붓다는 그 느끼는 자를 의식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이 의식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몸과 마음은 죽어도 의식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의식은 구름 한점 없는 하늘, 먼지 하나 없는 거울과 같다. 하늘과 거울 처럼 주위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본연의 그 맑고 푸르고 깨끗함은 더럽혀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동요되지 않고 그 상황을 그저 지켜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마음이라는 구름에 가려 본래 의식을 찾지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에 놓여있다. 마음이라는 구름을 걷어 내고 영원히 맑고 푸르름을 잃지 않는 하늘, 즉 본래 의식을 찾아야 한다. 이 본래 의식을 찾지 못하는 한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류가 살아온 모든 역사를 통해 모든 인간이 쌓아올린 욕망의 덩어리다. 본래 의식을 완전히 뒤덮은 것이 마음이다. 마음은 부모, 사회, 종교, 교육의 집합체이다. 부모와 사회, 종교, 교육은 본래 의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그러므로 본래 의식을 되찾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야 한다. 

 

부모와 사회와 종교와 교육이 아니었다면 살고 있을 내 삶을 찾아야 한다. 전통과 관습 때문에, 사회의 법과 제도 때문에, 종교의 계율 때문에, 지식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교육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지 못한 삶을 찾아와야 한다. 

 

거울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야 한다. 모든 욕망의 덩어리인 마음을 덜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본래 의식을 되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고통과 불행 속에서 살아온 것은 이 욕망의 덩어리인 마음 때문이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반드시 변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변하지 않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 때문에 고통이 오고 불행이 뒤 따르는 것이다. 영원한 부자도, 영원한 권력도, 영원한 젊음도, 영원한 건강도 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변한다. 그런데 인간들은 영원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 착각 때문에  수많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해도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본래 의식이다. 이 세상 모든 변화를 그저 지켜볼 뿐 조금의 흔들림도 없기 때문이다. 이 본래 의식은 죽음까지 지켜본다. 본래 의식은 육신(몸)이 아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죽어갈 때 그 광경까지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붓다는 이를 두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 라는 표현을 썼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면 편하다. 그런데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순간 편하지 못하다. 꽃이 피면 반드시 진다는 것을 알면 집착할 필요가 없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 삶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태어나고, 젊은이가 되고, 사랑을 하고,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힘이 빠지고, 병이 들고 죽는다는 것을 알면 그 과정을 편하게 받아 들일 수 있다. 다만 그 때 그 때의 삶에 온 집중을 다하는 것 뿐이다. 후회하거나 아쉬워하지 않는 순간 순간을 사는 것이다. 

 

순간 순간을 후회없이 미련없이 사는 삶, 매 순간을 놓치지 않는 삶, 과거나 미래에 끌려다니지 않는 삶, 한 순간만이라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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