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스승께서 물으셨다. "수부티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나는 진리를 가르쳤다.'고 하는 생각이 일어나겠느냐?"

수부티여, '여래는 진리를 가르쳤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있지도 않는 것에 집착하여 나를 잘못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거기에는 티끌만한 법(法)도 없으며 인식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장 높고 옳으며 완벽한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한 수부티여, 그 법은 실로 평등하여 아무 차별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높고 옳으며 완벽한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가장 높고 옳으며 완벽한 깨달음>은 자아, 존재, 영혼, 개아가 없다는 것으로 인하여 평등한 것이며, 일체의 이로운 법(法)에 의해 깨우쳐지는 것이다.

수부티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나는 존재하는 것들을 구원했다.'는 생각이 일어나겠느냐? 수부티여, 실로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 여래에 의해 구원된 존재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스승께서는 그것을 계기로 다음과 같은 게(偈)를 읊으셨다.

"모양으로써 나를 보고 소리로써 나를 따르는 자들은 잘못된 노력에 빠져 있으니 그들은 나를 보지 못하리라."

"깨달은 사람들을 보려면 법으로부터 보아야 하느니, 세간(世間)을 인도하는 그들은 법을 몸으로 한다.

  

그러나 법의 본질은 알아낼 수가 없으니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여래가 가고, 오고, 서고, 앉고, 혹은 눕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내 가르침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런가? 여래라고 불리는 사람은 어느 곳으로도 가지 않으며 어디로부터 오지도 않기 때문이다ㅣ 그래서 그를 <여래, 아라한,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문 이해

 

여래에게는 '나는 진리를 가르쳤다.'라는 생각이 일어날 수 없다. 그의 내면에는 더 이상 '개인(person)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체성(personality)은 마음이라는 구름이 나타내는 형상일 뿐이다. '나'라는 관념은 구름속에 나타나는 형상이다. 그런데 여래에게는 구름이 사라졌다. 다만 순수한 하늘이, 정의내릴 수 없고 무한한 하늘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나'라는 관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래는 '나는 진리를 가르쳤다.'고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는 그가 사라졌다. 그래서 이제 그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도 없고 '너'도 없다.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이다.' 라고 설명할 것도 없다. 가르칠 것도 없으며 배울 것도 없다.

모든 형상이 사라졌다.

그것이 하늘이 평등하게 유지되는 이유이다. 이제 어떠한 형상도 떠오르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런 변화도 없고 움직임도 없다. 모든 꿈들이 사라졌다. 아침이 되어 해가 떠올랐다. 그는 깨어났다. 거기 깨어있음이 있다 그러나 '나는 깨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가르침은 있지만 '나는 가르치는 자이다.'라고 말할 사람이 없다. 거기 길이 있지만 거의 길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방법들이 있지만 방법이라고 할 수도 없다. 스승과 제자가 있지만 제자 쪽에서 볼때에만 그러할 뿐이다. 스승 쪽에서 보면 모든 게 사라지고 없다.

어떻게 여래에게 '나는 여러 존재를 구원했다.'는 생각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아무도 부자유하지 않다. 만일 그대가 붓다에게 '당신은 구세주입니까?'하고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다. 나는 구세주가 아니다. 아무도 구원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자유는 모든 사람의 본성이다. 자유는 이미 거기에 있다. 새삼 자유를 가져와야 할 필요가 없다. 자유가 이미 거기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붓다를 형상으로 본다면, 그를 육체로 본다면 그때에 그대는 빗나간 것이다. 만일 붓다의 말만 듣고 그의 침묵을 듣지 못한다면 그대는 빗나간 것이다. 붓다의 얼굴만 보고 그의 내면의 하늘을 보지 못한다면 그대는 붓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붓다가 말하는 것은 오직 침묵을 전하기 위해서다. 붓다가 형상을 갖고 있는 것은 오직 형상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이 시를 가슴 깊이 새겨라.      

붓다를 보려면 구름의 입장이 아니라 하늘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이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아바치야(avachya), 즉 말로 하기가 불가능한 것을 말한다. 붓다는 세간을 인도(引導)하는 붓다의 가름침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붓다 자신이 아니라 저 영원의 세계로부터, 무한한 하늘로부터 온다. 붓다는 다만 하나의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 영원이 그를 통해 흐르고 있다.

그가 사용하는 말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 그의 침묵을 들어라. 그가 살고 있는 육체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 그가 거주하는 집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지 말라. 그의 내면에 있는 현존을 들여다 보라. 그의 존재를 보라. 깊이 들여다보라.

분명히 여래는 오고간다. 이 금강경도 그런 식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아름다움을 보라. 금강경은 이렇게 시작했다. 붓다가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고, 밥그릇을 내려 놓고, 발을 씻은 다음, 자리에 앉아 앞을 바라본다. 그 다음에 수부티가 질문을 던진다. 이 금강경은 형상에서 시작하여 형상 없는 것으로 끝난다.

형상이 시작이다. 먼저 그대는 외부인으로 온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먼저 그대는 집을 보고, 그 다음에야 집 안에 사는 사람을 볼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거기엔 아무 것도 잘못된 게 없다. 그러나 집에 집착하지 말라. 집으로부터 집 안에 사는 사람에게로 옮겨가라. 이것이 이 경전의 아름다움이다. 이 금강경은 붓다의 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앉으며,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한느지에 대한 설명으로 이 경전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제는 이 이상한 말로 끝맺음을 한다.

'여래는 가고, 오고, 서고, 앉고, 혹은 눕는다.'고...........그래서 그를 <여래, 아라한,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고 불리는가? 결코 움직임지 않는 하늘을 알게 된 자,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알게 된 자, 진리를 알게 된 자, 그런 사람이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고 불린다.

진리는 언제나 똑같다. 꿈이 변할 뿐 진리는 항상 그대로이다. 붓다의 말에 귀 기울여라.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는 말라. 그것은 다만 이정표일 뿐이다. 거기로부터 나아가라.

말은 진리를 가르킬 뿐, 진리 자체는 아니다. '신'이라는 단어는 말에 불과하다. 그것은 신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말일 뿐 사랑이 아니다. 말을 이용하라. 그리고 그 다음에는 멀리 내던져라. 말은 그릇일 뿐 내용물이 아니다.

붓다는 말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고 말한다. 말을 디딤돌로, 징검다리로 이용하라. 붓다의 몸이 움직이는 모습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세상에는 흉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붓다처럼 걷고, 붓다처럼 말할 것이다. 그들은 붓다와 똑같은 단어를 사용할 것이고 똑 같은 몸짓을 흉내낼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그런 것들은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실한 것은 항상 너머에 있다. 그것은 모방할 수 없다. 그대는 모든 구름을 넘어서야 한다.

LIST

원문

 

마침내 수부티가 이 가르침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그가 눈물을 닦고 나서 스승께 말씀드렸다. "훌륭한 일입니다. 스승이시여. 참으로 경탄할 일입니다. 선서이시여. 여래께서 이 법문을 설하신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이 법문을 듣고 제게 지혜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로 인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깨달은 분들은 모든 인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수부티여, 이 법문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움에 떨지 않는 사람들은 더할 나위없이 훌륭한 살람들인 것이다. 또한 수부티여, 여래에게 있어서 인내의 완성은 실은 완성이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수부티여 일찍이 가리왕(歌利王)이 나의 두 팔과 두 다리의 살을 도려낼 때에도 나에게는 자아라는 생각, 존재라는 생각, 영혼이라는 생각, 개아라는 생각이 없었다. 만일 그때 나에게 자아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적개심이 일어났을 것이다.

또한 수부티여, 보디사트바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보시를 행해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수부티여, 이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인식은 다만<인식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래가 <살아 있는 존재들>이라고 설한 모든 것들은 실로 살아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왜 그런가? 여래는 진실대로 말하며 진리를 말하며 있는 그대로 말할 뿐, 다른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래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원문 이해

 

수부티는 말한다.

"당신의 현존, 당신의 자비로운 가르침, 당신의 사랑, 당신의 우아함이 제 안에 지혜의 싹을 틔웠습니다. 이 법문이 제가 진리를 볼 수 있는 눈과 통찰력을 주었습니다.

수부티는 계속 말한다.

"그러나 스승님께 상기시켜 드리건데, 이것은 실로 인식이 아닙니다. 인식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순수한 지혜입니다."

앎이 일어났지만 아는 자가 없다. 알려진 것도 없다. 다만 앎이 일어났을 뿐이다. 그것은 순수한 앎이다. 거기에는 아는 자와 알려진 것, 그리고 앎이라는 구분이 없다. 그것은 그저 앎이다.

"이제 저는 '깨달음을 얻은 자는 모든 인식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뜻을 알겠습니다. 인식이란,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관찰이란, 관찰자와 관찰의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은 분들에게는 이 모든 이원성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오직 하나가 있을 따름입니다."

"내 안에 지혜가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파악하고 이해할 내가 거기에 없습니다. 나는 다만 텅 비어 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일어났습니다. 나는 보았습니다. 그러나 거기 보는 자가 없습니다."

   

붓다는 수부티에게 오래된 전생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가리왕이 그의 팔다리에서 살을 도려내던 일에 대해 이야기 한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 내 팔다리의 살점이 베어지고 혀와 눈알이 뽑혀 나갈 때에도 나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내 안에 그 어떤 '나'도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거기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자가 없었다. 그에 의해 다칠 자가 없었다. 만일 그때에 '나'라는 생각이 일어났다면 원한이 뒤따라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파괴하고 있는 왕에 대해 분노가 일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노하지 않았다. 거기 분노가 없었다."

에고는 분노를 가져온다. 분노는 에고의 그림자이다. 에고는 공격성과 폭력을 불러온다. 에고가 사라지면 모든 폭력이 사라진다. 에고가 완전히 사라져야만 인간은 사랑이 될 수 있다.

붓다는 말한다.

"나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것을, 야타 부탐(yatha bhutam)을 말했을 뿐이다. 나는 그 밖의 다른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말이 그렇게 역설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이다. 진리는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리를 버려야 한다."

LIST

원문

 

스승께서 물으셨다.

"수부티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디팡카라(Dipankara)에게서

배운 어떤 법이 있는가?"

수부티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스승이시여.

아무 것도 배운 게 없습니다."

 

 

 

 

 

 

 

 

 

 

 

 

원문 이해

 

디팡카라(Dipankara)는 고대의 붓다이다. 고타마 붓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던 전생에 디팡카라를 찾아갔다. 고타마는 자기를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고 청했지만 디팡카라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진리는 배울 수 없다. 그렇다. 무엇인가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있다. 그러나 배워야 할 것은 없다. 진리는 지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그대 안에 있다. 그 덮개를 벗겨버려야 한다. 그러나 새로 배워야 할 것은 없다. 진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대의 존재 자체가 진리이다. 그대는 깨어나야 한다.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해 된다는 말이 아니다. 더 많은 지식에 사로잡힐수록 진리를 깨달을 확률은 줄어든다. 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 많은 무지로 덮여버릴 것이다. 지식이 곧 무지이다.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은 기억과 정보, 경전, 철학의 어두운 구름에 포위되어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디팡카라는 붓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배운다는 생각을 버려라. 진리는 이미 그대 안에 있다. 진리는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붓다는 왜 수부티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그것은 붓다로부터 아무 것도 배울 게 없다는 것을 이해시켜 주려는 것이다. 붓다 자신이 디팡카라에게서 배운 것이 없다. 그래서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수부티여, 내게서 배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나와 함께 있으라. 배운다는 생각을 버려라.              

무엇인가 배우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대는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훌륭한 구도자가 이렇게 썼다.

"나는 답을 구하러 현자(賢者)를 찾아 나섰다. 많은 현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저마다 다른 대답을 갖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나는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한두 명 만났다. 그들은 고요하게 앉아서 나의 질문에 미소로 응하곤 했다. 그리고 대답을 달라고 계속 고집하는 나에게 너그럽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지곤 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진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바보처럼 아무 근심없이, 어린아이들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미소를 지은 적도 있었다. 나는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내가 현자를 찾아간 것 자체가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설령 지혜로운 그것이 말로 표현될 수 있었다고 한들, 설령 말해졌다고 치더라도 내가 무엇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너무나 진실하여 아무런 지혜의 대답도 주지 않았다."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의 존재, 그 자신을 그대에게 준다. 진실로 지혜로운 자는 다만 그 자신을 그대가 이용할 수 있게 만든다.

배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배울 진리도 없고, 교리도 없고, 철학도 없다.

 

LIST

원문

 

스승께서 이렇게 물으셨다. "수부티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흐름을 이긴 자>에게 '나는 흐름을 이겼다.'는 생각이 일어나겠느냐?"

수부티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스승님이시여. 실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 법(法)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를 <흐름을 이긴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얻은 것도 아니며, 소리도, 향기도, 맛도, 감촉도, 마음의 대상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흐름을 이긴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만약 <흐름을 이긴 자>에게 '나는 흐름을 이겼다.' 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의 안에는 자아에 대한 집착, 존재에 대한 집착, 영혼에 대한 집착, 개아에 대한 집착이 일어날 것입니다."

 

스승께서 물으셨다. "수부티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라한(阿羅漢)에게 '나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했다.' 는 생각이 일어나겠는가?"

수부티가 대답했다.

"스승이시여, 실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이라고 불리는 어떠한 법(法)도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를 아라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여래께서는 저를 두고 <평화 속에 거주하는 자 가운데 으뜸가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승이시여, 저는 욕망을 떠난 아라한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나는 아라한이며 욕망을 떠난 자이다.'라는 생각이 일지 않습니다. 

스승이시여, 만일 제가 '나는 아라한과를 성취했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있다면 여래께서는 저를 두고 '훌륭한 집안의 자손인 수부티는 평화 속에 거주하는 자들 가운데 으뜸이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그를 <평화 속에 거주하는 자>라고 부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원문 이해

 

붓다는 구도자의 네 단계에 대해 말한다. 첫 번째 단계를 그는 <흐름을 이긴 자>라고 부른다. <흐름을 이긴 자>는 깨달음의 마당에 들어선 사람을 뜻한다.

왜 그를 <흐름을 이긴 자>라고 부르는가? 그는 더 이상 기슭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정체되어 있지 않다. 그는 삶의 흐름과 더불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강물과 싸우지 않는다. 강물과 싸우는 데 사용되던 에고, 흐름을 거스르는 데 사용되던 에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터무니없는 말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흐름이 그를 이긴 것이다. 그런데 왜 그를 <흐름을 이긴 자>라고 부르는가? 그는 모든 투쟁을 포기했다. 그는 완전히 내맡기고 굴복했다. 그래서 그는 승리자가 되었다. 이것이 그를 <흐름을 이긴 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참으로 이상한 말이다.

 

 

먼저, 그는 흐름을 이기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세상 사람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이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욕망과 계획에 부합되는 삶을 원한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꿈과 욕망을 삶에 덮어씌운다. 그리고 자기들의 의지대로 삶을 이끌려고 한다. 모든 인간이 흐름을 거슬러 가려고 한다. 세상 사람 모두가 삶과 자연, 신에 대항하여 싸우려 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란 곧 투쟁의 삶이다.

그러나 그대는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그대는 그대 자신의 근원과 싸우는 것이다. 그대는 누구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가? 그대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 싸움은 결국 그대를 더 깊은 절망으로 몰고 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싸움을 통해서는 이길 수 없다. 그것은 이기는 방법이 아니다. 그대는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그대는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존재계는 광막하고 끝이 없다. 그 존재계에 대항해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존재계와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만 이길 수 있다.

대항해서는 이길 수 없다. 오직 동참함으로써 이길 수 있다. 만일 존재계가 그대를 지원한다면 그대는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존재계가 그대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계속 이길 수 있다고 믿을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패배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곧 그대는 지치고 절망할 것이다.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싸움을 포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감으로 인한 포기이다. 그 패배감 안에는 아무 기쁨도 없다. 어떻게 패배가 즐거울 수 있겠는가?

삶을 이해하는 사람은 안다. 패배가 닥치기 전에 완전히 내 맡기고 항복하면 기쁨이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이 삶이란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러니 붓다가 역설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달리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삶 자체가 역설적인 것을. 모든 것을 내던지고 완전히 항복한 사람들은 자신이 승리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싸우는 사람들은 어느 날엔가 싸움에 모든 에너지를 소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승리의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존재계에 완전히 내맡기고 항복하는 것을 붓다는 <흐름을 이긴 자의 열매>라고 부른다.   

두 번째 단계는 <한 번 더 돌아오는 자>이며, 세 번째 단계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아르하트(Arhat)>이다.

 

<흐름을 이긴 자>는 세 가지 족쇄를 벗어 버린다.

첫 번째 족쇄는 에고이다. 자기가 남들과 나누어진 개체라는 관념, 분리된 자아로서의 관념이 첫 번째 족쇄이다. 당연히 이것이 모든 싸움의 근본 원인이다.

두 번째는 단순히 교리와 의식(儀式)에 따라 사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인이 있지만 그들은 오로지 교리와 의식에 따라 살아간다. 그들은 종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의식(儀式)이 종교는 아니다. 교리가 종교는 아니다. 종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말한다. 깨어 있는 삶,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삶이 곧 종교이다. 그러나 세상을 보라. 교회, 사원, 모스크, 구르드와라에 나가서 기도하고 이런 저런 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儀式)일 뿐이다. 거기엔 종교가 없다.

세 번째는 의심과 혼란이다. 의심하는 마음은 편히 쉴 수 없다. 의심하는 마음은 모든 것을 내맡기고 복종하지 못한다.

 

의심하는 마음은 결코 전체적일 수가 없다. 어떤 부분은 계속해서 싸우고 어떤 부분은 계속해서 '아니오'라고 말한다. 의심하는 마음은 완벽하게 '예, 그렇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이 <흐름을 이긴 자>가 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다. 삶에 대해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무조건 긍정하는 것, 온 가슴을 다해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흐름을 이긴 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도이다.

만일 그대가 "나는 완전히 내맡겼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아직 내맡긴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대'가 내맡길 수 있겠는가? '그대'를 내맡겨야 한다. 그 '나'를 내맡겨야 한다. 그대는 "나는 완전히 내맡기고 항복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만일 그대가 행위의 주체로 남아있다면 그것은 내맡긴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귀의한 사람은 "나는 귀의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다만 귀의가 저절로 일어났습니다."는 말뿐이다.       

 

'나'가 사라졌을 때, 더 이상 거주자가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평화가 얻어진다. "수부티여, 이제 그대는 평화 속에 거주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수부티여, 이제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무(無)가 붓다의 가름침이 전해주는 맛이다. 더 이상 그대가 존재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오직 텅빈 공간으로 충만한 경지, 그것을 선언하고 자랑할 자가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붓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아(無我)의 경지를 조금이라도 엿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앉아 보라. 그대를 자극하는 만트라도 외우지 말라. 신의 이름도 중얼거리지 말라. 특별한 요가 자세를 취하지도 말라. 생각을 집중하지도 말고 명상하지도 말라. 그냥 방 안에, 또는 나무 곁이나 강가에 고요히 앉아 있으라. 풀밭에 누워 밤 하늘의 별을 쳐다보라. 아니면 눈을 감은 채 그냥 누워 있으라.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하라. 에너지를 다른 데로 보내지 말라. 고요한 연못이 되라. 그러면 순간적으로 어떤 경험이 그대를 향해 밀려오기 시작할 것이다.        

잠깐 동안 그대는 거기에 있으면서도 없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대는 거기 존재한다. 그대는 존재하지 않음과 동시에 난생 처음으로 존재한다. 그때에 그대는 붓다가 왜 그토록 역설적으로 말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오직 존재하지 않을 때에만 존재한다. 모든 것이 부재(不在)할 때 거기에 커다란 현존이 있다. 에고가 완벽하게 사라졌을 때 그대는 우주 전체가 된다. 그대는 존재계 전체이다. 이슬방울로서의 그대가 사라진다. 그대는 바다가 된다. 한편으로 그대는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난생 처음으로 나타났다.

깨달음은 죽음인 동시에 부활이다. 죽음과 부활은 동시에 일어난다. 여기 이 자리에서 죽음이 일어나는 즉시 부활이 뒤따른다. 그러나 그대는 직접 그런 경험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론이나 철학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경험이다.

LIST

원문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수부티여, 여래는

<깨달은 사람들의 특별한 진리는

깨달은 사람들의 특별한 진리가 아니다.>

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원문 이해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말이다. 깨달은 이들에게 있는 진리는 무엇인가? 붓다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의 특징은 아무 특징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평범하다. 그러므로 만일 우연히 마주친다 해도 그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붓다의 특징이다.

그는 연기자가 아니다. 그는 정치인이 아니며 배우도 아니다. 그는 남에게 드러내보일 에고가 없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중요성을 확인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완전히 부재(不在)한다. 그것이 그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렇게 터무니없는 말이 생기는 것이다.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산다. 이것이 그의 특징이다. 그는 걷지만 그의 안에는 아무도 걷지 않는다. 그는 말하지만 그의 안에는 말하는 자가 없다..... 거기에는 철저한 침묵이 있을 뿐이다. 절대로 깨지지 않는 침묵이 있다.

 

붓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 태도도 갖고 있지 않으며 정의가 불가능하다. 그대가 그를 어떻게 정의를 내리든 간에 그것은 타당한 정의가 아닐 것이다. 붓다는 아무 틀에도 갇히지 않는데 그대의 정의 자체가 그를 틀 안에 가둬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붓다의 기본적인 특성이며 독특한 면이다. 이것이 붓다가 깨달은 진리의 성격이다. 그는 완전히 텅 비어 있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 그것이 붓다의 주된 특성이다. 그러나 없는 것처럼 있는 것을 붓다의 주된 특성으로 말한다면, 사실 그는 아무 특성도 갖고 있지 않은 셈이다.

붓다의 비범함은 그의 철저한 평범함에 있다. 그의 평범함이 곧 비범함이다. 평범해진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범한 일이다.

그는 반드시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즉흥적으로 반응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그냥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붓다의 특성이다. 그는 순간에 충실한 삶을 산다. 이것이 붓다의 진실함이다.

LIST

원문

 

스승께서 물으셨다.

"수부티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가장 옳고 완벽한 깨달음으로 온전히 알고 있는, 그 어떤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또는 여래가 설한 법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부티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스스의 말씀을 제가 이해한 바로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깨우치시고 가르치셨다고 하는 법은 붙잡을 수도 없고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법도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세계가 성스러운 분들을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원문 이해

 

자칫하면 붓다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지기가 쉬웠다. 이것은 까다로운 질문이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습니다."하고 말하기 쉽게 만드는 그런 질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스승님은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붓다이신 스승님이 아니라면 세상의 어느 누가 깨달음을 얻었겠습니까?"

그러나 얻는다는 생각 자체가 영적이지 않다. 붓다는 얻을 것도 없으며 얻는 자도 없다고 말한다.

수부티는 이렇게 말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스승님, 당신은 아무도 가르치지 않은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당신은 아무도 설한 적이 없는 진리를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설할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얻을 것도 없고, 얻는 자도 없다면 누가 그것을 설할 것인가? 그리고 설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수부티는 붓다의 질문에 속지 않았다. 그러므로 먼저 수부티는 이렇게 말한다.

"아닙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얻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을 옳게 이해했다면, 거기에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저러한 것' 이라든가 '아무 것도 아닌 것' 이라는 두 경계를 초월한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할 방법도 말할 방법도 없습니다."

언어는 오직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이해한다. 긍정과 부정을 넘어선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나서 수부티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절대적인 세계는 저 너머의 세계, 초월의 세계를 의미한다. 사랑과 미움, 삶과 죽음,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천당과 지옥, 이 모든 이원성(二元性)을 넘어선 세계가 절대적인 세계다. 그리고 절대적인 세계는 성스러운 사람들을 찬양한다. 절대적인 것, 초월적인 것이 그들을 찬양한다.

붓다는 텅빈 거울이다. 그는 다만 존재를 있는 그대로 비춘다. 거울은 말할 게 아무 것도 없다. 거울은 앞에 비치고 있는 물건에 대해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비출 뿐이다. 붓다 안에 존재계가 비친다. 절대의 세계가 그를 찬양한다. 그 세계가 붓다 안에 반영된다. 그리고 붓다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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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왜 그런가? 수부티여, 이 보디사트바들에게는 '자아'라는 인식이 없으며 '존재'라는 인식도 없으며 '영혼'이라는 인식도 없으며 '개아'라는 인식도 없기 때문이다. 이 보디사트바들은 '법'이라는 인식이 없으며 '법 아닌 것"이라는 인식도 없다. 그들에게는 인식도 없고 인식 아닌 것도 없다. 왜 그런가? 수부티여, 만일 보디사트바들이 법이라는 인식, 또는 법 아닌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면 그로 말미암아 다시 자아, 존재, 영혼, 개아에 대한 집착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보디사트바는 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그 숨은 의미를 이렇게 말씀 하셨다.

'뗏목에 비유되는 법의 가름침을 아는 자는 법마져 버려야 한다. 하물며 법이 아닌 것에 있어서랴.'"

 

 

원문 이해

 

이 여덟 가지가 진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알려져 있다. 그것들을 이해해야 한다. 먼저 '자아'는 에고를 의미한다.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와는 별도로 '나의', '나의 것', '나'가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인간은 다만 이 다섯 가지 요소의 결합일 뿐이다. 이 다섯 가지 요소를 해체시키면 인간은 사라진다. 붓다는 거기에 이 다섯 가지 요소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첫째, '자아'는 "나는 구성 요소들과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붓다는 거기에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직 구성 요소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대는 철저한 공(空)이다.

두번째, '존재'이다. 존재는 개체성을 의미한다. 즉 상이한 시간대에도 자신을 동일한 인물로 여기는 생각이다. 그대는 이렇게 말한다. "한때 나는 어린아이였으며 지금은 젊은이다. 그리고 곧 노인이 될 것이다." 그대는 마치 자신이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한때 그대는 어린아이였으며 지금은 청년이다. 하지만 그대는 동일 인물이다. 곧 그대는 노인이 될 것이지만 그때에도 그대는 여전히 똑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대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붓다는 그대가 매순간 변화한다고 말한다. 어린아이였 때 그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으며 지금은 또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늙었을 때에는 다시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실제로 그대는 매일마다 다르다. 매순간 그대는 다른 사람이다.

세번째, '영혼'이다. 육체 안에 거주하는 초월적인 힘에 대한 관념, 즉 다른 것들과 분리되어 있으면서 그것들을 합치고 생기를 주는 어떤 힘이 있다는 생각이다. 붓다는 이 또한 부정한다. 그는 거기에 아무 초월적인 힘도 없다고 말한다. 그대 안에는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다. 그대는 집이고 그 안에 거주하는 주인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그대 안에 거주하는 것은 순수한 무(無)가 전부이다.

네번째, '개아'라는 관념이다. 환생에서 환생으로 영원히 옮겨 다니며 지속되는 영구적인 실체가 있다는 믿음이다. 그대는 죽을 것이지만 그대의 개아는 즉시 다른 자궁으로 들어가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이것이다. 그러나 연속성은 있지만 개아는 없다. 거기 자아도 없다. 거기 연속성은 있지만 개체성이라는 것도 영혼이라는 것도 없다.

 

어떤 사람이 내면으로 들어갈 때, 그대의 의식이 내면으로 향하여 그대 존재를 들여다 볼 때, 거기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 네 가지가 즉각 녹아 없어진다.

'법'은 삶의 긍정적인 요소를 의미하며 '비법'은 삶에 있어서 부정적인 요소를 의미한다. 그러나 붓다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도 진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마저 사라진다고 말한다. 내면으로 들어갈 때 그대는 긍정적인 실체와 만나지 않으며, 부정적인 실체와도 만나지 않는다. 다만 그대는 절대적인 무(無)와 직면한다.

이것을 명심하라. 만일 그대가 내면에서 무엇인가 본다면 그대는 여전히 외부에 있는 것이다. 가령 크리슈나가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이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흘리는 모습, 또는 붓다가 보리수 나무 밑에 고요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본다면, 하여튼 내면에서 어떤 것과 마주친다면 그대는 아직 외부에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렇게 말했다.

"길 위에서 나를 만나면 나를 죽이고 가라."

아무 것도 볼 것이 없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을 때에는 '보는 자' 또한 사라진다. 이것이 기억해야 할 핵심이다.

붓다는 모든 것을 버리라고 말한다. 진리인 것, 진리가 아닌 것, 모든 경험들, 대단하고 정신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경험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경험하는 자까지 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때, 그리고 이젠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조차 사라졌을 때......... 만일 이런 생각만이라도 남아있다면 그때엔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 것과 다름없다. "이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핵심을 놓친 것이다. 거기에 아무 것도 없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 거기서 그렇게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렇게 관찰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곳에는 완벽한 침묵이 있을 뿐이다. 절대적인 침묵만이 존재한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임의적인 수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뗏목의 비유는 그것을 보여준다. 비어 있음의 훌륭함을 강조하거나, 진리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경우에도 이와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이런 결론은 다른 곳에서 만병통치약의 예를 들어 설명한 바 있다. 약이 효과를 거둔 뒤에는 질병과 아울러 약도 버려야 한다. 그 뒤에도 계속 약을 사용한다면 또 다른 병을 초래할 뿐이다."

 

붓다는 말한다.

"이 '비어 있음'이라고 불리는 약이 '내가 존재한다는 믿음'이라는 병을 치료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존재에 대한 집착이 하나의 질병이듯이, 비어 있음에 대한 집착도 질병이다. 건강을 회복한 다음에도 이 비어 있음의 약을 계속 복용하는 자는 다시 병에 걸릴 것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먼저 모든 것을 버려야할 뿐 아니라, 그 다음에는 비어 있음마저 버려야 한다. 그 비어 있음은 다만 하나의 약이다.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 세상과 신, 물질과 마음, 몸과 영혼, 너와 나,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마침내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생각마저 사라졌을 때, 그대는 집에 도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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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수부티가 물었다. "미래 시대에도, 그 마지막 시대에도, 올바른 가르침이 무너지는 마지막 5백 년대에도 이들 경전의 말씀이 설해졌을 때 그 진리를 이해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스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부티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그렇다. 그 때에 이 말들이 설해졌을 때 그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수부티여, 그 시대에도 보디사트바들이 있을 것이다. 수부티여, 또 이 보디사트바들은 오직 한 분의 붓다를 섬기는 것이 아닐 것이며, 오직 한 분의 붓다 아래에서만 그들의 선근(善根)을 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수부티여, 여기 이 말들이 설해졌을 때 한오라기 고요한 신뢰만이라도 얻은 보디사트바들은 무수히 많은 붓다를 섬기는 것이며 무수히 많은 붓다 아래에서 선근을 심은 것과 같을 것이다. 수부티여, 여래는 붓다의 지혜로 그들을 알고 있다. 수부티여, 여래는 붓다의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다. 수부티여, 여래는 그들을 빠짐없이 알고 있다. 수부티여, 그들은 모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쌓고 얻으리라.

 

원문 이해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지금이 바로 수부티가 말하는 그 시대이다. 그대들이 바로 수부티가 말하는 그 사람들이다. 2천 5백 년이 지나갔다. 그런데 수부티는 그대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종교가 태어난 후, 한 명의 붓다가 나타나 진리의 수레바퀴를 돌린 후에는 당연히 그 바퀴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한다." 한명의 붓다가 나타나 바퀴를 돌리면 그 바퀴가 완전히 멈추기까지는 2천 5백 년이 걸린다. 그리고 5백 년마다 바퀴는 힘을 잃어간다. 그러므로 담마의 수레바퀴는 다섯 세대로 이루어진다. 담마의 수레바퀴는 5백 년마다 힘을 잃을 것이다. 그렇게 점점 느려지다가 2천 5백 년 후에는 다시 바퀴가 멈추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다음 2천 5백 년을 위해 바퀴를 돌리려면 다른 붓다가 필요할 것이다. 붓나는 지금의 시대까지 볼 수 있다.

붓다는 "수부티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고 말한다. 수부티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직 우리들만이 행운을 누린다. 우리는 붓다의 말을 듣고, 붓다와 함께 살고, 붓다와 함께 걷는다. 우리는 행운아이며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2천 5백 년 후 담마의 수레바퀴가 멈추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수부티는 지금의 그대들을 불행한 사람들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수부티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오직 그대들만이 행운을 누린다고 생각하지 말라." 하고 수부티의 말문을 막아 버린다. 수부티의 미묘한 에고를 깨우쳐주기 위함이다.

붓다는 말한다.

"수부티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2천 5백 년 후에도 이 말들이 설해졌을 때 그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여래는 붓다의 지혜로 그들을 알고 있다. 여래는 붓다의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다. 여래는 그들을 빠짐없이 알고 있다. 수부티여, 그들은 모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쌓고 얻으리라."

이 말씀을 경청하는 그대들이 바로 붓다가 말하는 그 사람들이다.

LIST

 

원문

 

스승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수부티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어떤 특징을 지닌 이로 볼 수 있겠느냐?"

수부티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실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래께서 '특징을 지닌다.'고 가르치신 것은 곧 아무 표시도 지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무릇 어떤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며, 아무 표시도 없다면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 특징도 없는 것을 여래의 특징으로 보아야 한다."

 

 

 

원문 이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오직 외부적인 특징만을 볼 수 있다. 어떤 표시나 특징에 의해 살아간다. 그러나 수부티처럼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 붓다의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특징이 아무 의미도 없다. 게다가 무엇인가 소유한다는 것은 붓다의 특성이 아니다. 붓다는 전적으로 평범할 수밖에 없다. 그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붓다의 진짜 특징이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 그것이 붓다의 진정한 표식이다. 깨달음조차 소유하지 않는 것, 그것이 깨달은 자의 진정한 표식이다. 이런 까닭에 이 경전의 말들이 모순되는 것이다.

붓다가 수부티에게 갑자기 "여래를 어떤 특징을 지닌 이로 볼 수 있겠느냐?" 라고 묻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부티에게 어떤 욕망이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는 붓다가 되려는 문턱에 서 있다. 그래서 하나의 욕망이 일어났을 것이다.

"곧 나도 서른두 가지 특징을 지닐 것이다. 곧 나도 붓다가 될 것이며, 붓다로 인정받을 것이다. 나 또한 붓다의 서른두 가지 특징을 지니게 될 것이다."

※ 붓다의 서른두 가지 특징(32상, 三十二相)

붓다가 갖추고 있는 보통 사람과 다른 신체적 특징을 말한다.

LIST

원문

 

그러므로, 수부티여! 주의 깊게 잘 들어라.

보시(布施)하는 보디사트바는

응당 법(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 데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한다.

위대한 존재인 보디사트바는 흔적을 남긴다는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

왜 그런가?

보디사트바가 집착없이 보시한다면

그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원문 이해

 

"그러므로, 수부티여! 주의 깊게 잘 들어라."

= 붓다가 "그러므로, 수부티여! 주의 깊게 잘 들어라." 하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수부티는 깊은 곳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내가 얻은 바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나는 큰 공덕을 얻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수부티의 가슴속에, 그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 알아채기 힘든 미묘한 욕망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 욕망은 작은 파문에 불과했을 것이다. 수부티조차 그것을 읽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욕망은 섬광처럼 아주 잠깐 동안, 찰나지간에 지나가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적인 욕망이 붓다의 거울에 비추어졌다. 그래서 붓다는 이 욕망을 깨우쳐주기 위해 '주의 깊게 잘 들어라.' 하고 말한 것이다.

보시(布施)하는 보디사트바는

응당 법(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 데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한다.

위대한 존재인 보디사트바는 흔적을 남긴다는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

= 집착은 동기(motive)를 의미한다. 집착한다는 것은 '나는 그로부터 무엇인가 얻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대는 모든 핵심을 놓친 것이다. 그것은 거래이지 선물이 아니다. 그리고 니르바나는 선물이 될 수 있을 뿐, 거래는 될 수 없다. 그것은 장사가 아니다. 그대는 다만 순수한 기쁨으로 나누어 주어야한다. 그로부터 무엇을 얻겠다는 동기가 있었서는 안된다. 만일 그런 동기를 갖고 있다면 그대는 아무도 도울 수 없다. 주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다. 선물도 없다. 그 모두가 하나이다. 그대가 돕고 있는 자 또한 그대이다. 그대가 주고 있는 자는 다른 형태의 그대이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왼손으로 오른손에 건네주는 것과 같다. 그것을 대단한 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선물을 주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다. 선물도 없다. 공덕을 바라면 공덕을 잃을 것이요, 공덕을 원치 않으면 한없는 공덕이 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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