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스승께서 물으셨다. "수부티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나는 진리를 가르쳤다.'고 하는 생각이 일어나겠느냐?"
수부티여, '여래는 진리를 가르쳤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있지도 않는 것에 집착하여 나를 잘못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거기에는 티끌만한 법(法)도 없으며 인식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장 높고 옳으며 완벽한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한 수부티여, 그 법은 실로 평등하여 아무 차별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높고 옳으며 완벽한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가장 높고 옳으며 완벽한 깨달음>은 자아, 존재, 영혼, 개아가 없다는 것으로 인하여 평등한 것이며, 일체의 이로운 법(法)에 의해 깨우쳐지는 것이다.
수부티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나는 존재하는 것들을 구원했다.'는 생각이 일어나겠느냐? 수부티여, 실로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 여래에 의해 구원된 존재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스승께서는 그것을 계기로 다음과 같은 게(偈)를 읊으셨다.
"모양으로써 나를 보고 소리로써 나를 따르는 자들은 잘못된 노력에 빠져 있으니 그들은 나를 보지 못하리라."
"깨달은 사람들을 보려면 법으로부터 보아야 하느니, 세간(世間)을 인도하는 그들은 법을 몸으로 한다.
그러나 법의 본질은 알아낼 수가 없으니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여래가 가고, 오고, 서고, 앉고, 혹은 눕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내 가르침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런가? 여래라고 불리는 사람은 어느 곳으로도 가지 않으며 어디로부터 오지도 않기 때문이다ㅣ 그래서 그를 <여래, 아라한,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문 이해
여래에게는 '나는 진리를 가르쳤다.'라는 생각이 일어날 수 없다. 그의 내면에는 더 이상 '개인(person)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체성(personality)은 마음이라는 구름이 나타내는 형상일 뿐이다. '나'라는 관념은 구름속에 나타나는 형상이다. 그런데 여래에게는 구름이 사라졌다. 다만 순수한 하늘이, 정의내릴 수 없고 무한한 하늘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나'라는 관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래는 '나는 진리를 가르쳤다.'고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는 그가 사라졌다. 그래서 이제 그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도 없고 '너'도 없다.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이다.' 라고 설명할 것도 없다. 가르칠 것도 없으며 배울 것도 없다.
모든 형상이 사라졌다.
그것이 하늘이 평등하게 유지되는 이유이다. 이제 어떠한 형상도 떠오르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런 변화도 없고 움직임도 없다. 모든 꿈들이 사라졌다. 아침이 되어 해가 떠올랐다. 그는 깨어났다. 거기 깨어있음이 있다 그러나 '나는 깨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가르침은 있지만 '나는 가르치는 자이다.'라고 말할 사람이 없다. 거기 길이 있지만 거의 길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방법들이 있지만 방법이라고 할 수도 없다. 스승과 제자가 있지만 제자 쪽에서 볼때에만 그러할 뿐이다. 스승 쪽에서 보면 모든 게 사라지고 없다.
어떻게 여래에게 '나는 여러 존재를 구원했다.'는 생각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아무도 부자유하지 않다. 만일 그대가 붓다에게 '당신은 구세주입니까?'하고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다. 나는 구세주가 아니다. 아무도 구원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자유는 모든 사람의 본성이다. 자유는 이미 거기에 있다. 새삼 자유를 가져와야 할 필요가 없다. 자유가 이미 거기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붓다를 형상으로 본다면, 그를 육체로 본다면 그때에 그대는 빗나간 것이다. 만일 붓다의 말만 듣고 그의 침묵을 듣지 못한다면 그대는 빗나간 것이다. 붓다의 얼굴만 보고 그의 내면의 하늘을 보지 못한다면 그대는 붓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붓다가 말하는 것은 오직 침묵을 전하기 위해서다. 붓다가 형상을 갖고 있는 것은 오직 형상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이 시를 가슴 깊이 새겨라.
붓다를 보려면 구름의 입장이 아니라 하늘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이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아바치야(avachya), 즉 말로 하기가 불가능한 것을 말한다. 붓다는 세간을 인도(引導)하는 붓다의 가름침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붓다 자신이 아니라 저 영원의 세계로부터, 무한한 하늘로부터 온다. 붓다는 다만 하나의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 영원이 그를 통해 흐르고 있다.
그가 사용하는 말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 그의 침묵을 들어라. 그가 살고 있는 육체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 그가 거주하는 집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지 말라. 그의 내면에 있는 현존을 들여다 보라. 그의 존재를 보라. 깊이 들여다보라.
분명히 여래는 오고간다. 이 금강경도 그런 식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아름다움을 보라. 금강경은 이렇게 시작했다. 붓다가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고, 밥그릇을 내려 놓고, 발을 씻은 다음, 자리에 앉아 앞을 바라본다. 그 다음에 수부티가 질문을 던진다. 이 금강경은 형상에서 시작하여 형상 없는 것으로 끝난다.
형상이 시작이다. 먼저 그대는 외부인으로 온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먼저 그대는 집을 보고, 그 다음에야 집 안에 사는 사람을 볼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거기엔 아무 것도 잘못된 게 없다. 그러나 집에 집착하지 말라. 집으로부터 집 안에 사는 사람에게로 옮겨가라. 이것이 이 경전의 아름다움이다. 이 금강경은 붓다의 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앉으며,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한느지에 대한 설명으로 이 경전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제는 이 이상한 말로 끝맺음을 한다.
'여래는 가고, 오고, 서고, 앉고, 혹은 눕는다.'고...........그래서 그를 <여래, 아라한,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고 불리는가? 결코 움직임지 않는 하늘을 알게 된 자,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알게 된 자, 진리를 알게 된 자, 그런 사람이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고 불린다.
진리는 언제나 똑같다. 꿈이 변할 뿐 진리는 항상 그대로이다. 붓다의 말에 귀 기울여라.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는 말라. 그것은 다만 이정표일 뿐이다. 거기로부터 나아가라.
말은 진리를 가르킬 뿐, 진리 자체는 아니다. '신'이라는 단어는 말에 불과하다. 그것은 신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말일 뿐 사랑이 아니다. 말을 이용하라. 그리고 그 다음에는 멀리 내던져라. 말은 그릇일 뿐 내용물이 아니다.
붓다는 말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고 말한다. 말을 디딤돌로, 징검다리로 이용하라. 붓다의 몸이 움직이는 모습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세상에는 흉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붓다처럼 걷고, 붓다처럼 말할 것이다. 그들은 붓다와 똑같은 단어를 사용할 것이고 똑 같은 몸짓을 흉내낼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그런 것들은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실한 것은 항상 너머에 있다. 그것은 모방할 수 없다. 그대는 모든 구름을 넘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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