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삶을 논하는 세 명의 벗이 있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더불어 살면서도 그것을 모를 수 있을까. 더불어 일하면서도 아무 열매도 맺지 않을 수가 있을까. 존재하는 것을 잊고 공간을, 세상을 끝없이 날아다닐 수 있을까.'

세 벗은 서로를 바라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전보다 더 좋은 벗이 되었다.

그러다 벗 하나가 죽었다. 공자는 다른 두 벗이 그의 장례를 치르는 데 곡하는 것을 돕기 위해 제자를 보냈다.

그 제자는 벗 하나가 현악기를 켜는 동안 다른 벗 하나는 노래를 짓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은 노래했다.

"벗이여, 그대는 어디로 갔는가? 아아, 벗이여, 그대는 어디로 갔는가? 그대가 진정으로 있던 곳으로 그대는 갔고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남았다. 아아, 빌어먹을. 우린 여기에 있다."

              

그때 공자의 제자가 그들 가운데 끼어들며 말했다. "장례의 예법 어느 곳에 이런 것이 적혀 있는가. 고인이 있는 자리에서 어찌 이런 불경스런 노래를 부르는가?"

그 두 벗은 서로를 바라보고는 웃었다. "가엾은 친구, 이 자는 새로운 예법을 모르는군."

 

원문 이해

 

삶에 대해 이해해야 할 첫 번째의 것은, 그것은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삶은 절대적인 빛 속에 있다. 그러나 그곳에 설명은 없다. 삶은 하나의 신비로서 존재한다. 설명을 시도하면, 그때는 삶을 놓쳐 버린다. 삶은 설명될 수가 없다. 설명을 통해 그대는 장님이 될 뿐이다. 철학은 삶의 적이다. 인간에게 가장 해로운 일은 설명에 사로잡히고 고정되는 일이다. 설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삶은 떠나고 그대는 이미 죽어 있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처럼 들릴 것이다. 죽음은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삶은 설명될 수 없다.                    

죽음은 끝이 난, 완성된 무엇이고, 삶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삶은 언제나 그 여행길에 있다. 그러나 죽음은 이미 도달해 있다. 어떤 것이 도달해서 마무리되면 그대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고, 그것을 한정시킬 수 있다. 어떤 것이 아직 진행 중일 때는 여행해야 할 미지의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의미다.

과거는 알 수 있지만 미래는 알 수 없다. 과거는 이론으로 정리해 놓을 수 있다. 그러나 미래를 어떻게 이론화할 수 있는가? 미래는 언제나 하나의 열려 있음이며, 무한한 열림이다. 그러므로 설명을 시도할 때, 그 설명은 언제나 죽어있는 것을 가리킨다.

설명이란, 그대가 설명하려고 하는 그 대상을 초월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그것이 존재하기 전에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도 그곳에 있어야 한다. 그것을 정의 내릴 수 있기 위해 그것의 주위를 돌아다녀야 한다. 그것의 심장부에 도달하기 위해 그것을 해부해야만 한다. 외과 의사는 생명이 아니라 죽은 육체에 대한 설명만을 찾을 수 있다. 생명에 대한 모든 의학적인 규정은 어리석다. 외과 의사는 그것을 해부하기 때문이다. 그가 결론을 내릴 때 생명은 이미 그곳에 없다. 그것은 단지 죽은 시체일 뿐이다.   

모든 설명은 사후 약방문이다. 설명하는 순간 삶은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다. 이제는 과학자들까지도 그 현상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사람의 피를 검사할 때, 그 피는 그것이 살아 있는 인간의 혈관에서 움직이고 있을 때의 그것과는 같은 것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혈관 속의 피는 살아 있었고,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시험관 속에 담겨져 있을 때, 그것은 죽어 있는 피다. 그것은 똑같은 피가 아니다. 그것의 본질인 생명이 그곳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설명이 그것과 같다.

나무에 피어 있는 꽃은 다르다. 왜냐하면 생명은, 생명의 형태는, 그 안에 흐름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무로부터 꽃을 따와 실험실 안에서 검사할 때 그것은 이미 완전히 다른 꽃이다. 그 겉모습에 속지 말라. 이제 생명은 더 이상 그 안에서 흐르고 있지 않다. 꽃의 화학 성분을 알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설명이 아니다.

'더불어 살면서도 그것을 모를 수 있을까.'

우리는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있음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대는 함께 있음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누군가와 여러 해 동안 함께 살 수 있다. 세상을 보라.                  

사람들은 함께 살고 있고 아무도 홀로 살지 않는다. 아이들은 부모들과, 부모들은 친구들과, 남편은 아내와, 아내는 남편과......, 모든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 삶은 함께 있음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대는 함께 있음이 무엇인지 아는가?

40년 동안을 아내와 살면서도 단 한 순간도 그녀와 함께 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동안에도 그대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 그대는 그곳에 없었고, 사랑의 행위는 단지 기계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다 벗 하나가 죽었다. 공자는 다른 두 벗이 그의 장럐를 치르는 데 곡하는 것을 돕기 위해 제자를 보냈다.'

공자의 어리석음이 무엇인가? 그는 체계와 형식에 따라 살았다. 그는 완전히 문명화된 사람, 세상에 알려진 가장 완벽한 신사였다. 그는 행동하되, 예절에 따라 행동한다. 그는 바라보되, 예절에 따라 바라본다. 그는 웃되, 예절에 따라 웃는다. 그는 그 경계를 넘은 적이 없다. 언제나 그 자신이 만든 끊임없는 굴레 속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는 노자와 장자의 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삶도, 죽음도 공자에게는 신비가 아니었다. 그것은 체계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무엇이며, 반드시 어떤 형식이 뒤따라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자를 보내 그 죽은 자가 규칙을 따라 잘 놓여져 있으며,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곡이 행해지고 있는가를 보게 했다. 책에 쓰인 대로. 죽은 이는 예법에 따라 존경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차이다. 예의를 생각하는 사람은 늘 사랑이 아니라 존경을 생각한다. 사랑에 비해 존경은 무엇인가? 사랑은 살아 있는 무엇이지만, 존경은 완전히 죽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노래했다.

벗이여, 그대는 어디로 갔는가?"'

이 신비를 보라!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대는 천국으로 갈 것이다.' 그들은 알지 못했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그대는 말한다. '그는 천국으로 갔다.' 그럼 누가 지옥으로 갈 것인가? 아무도 지옥으로 갈 것 같지가 않다.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거짓을 말해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벗이 지옥으로 갔는지, 천국으로 갔는지 누가 아는가? 지옥과 천국이 존재하는지 누가 아는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신비다. 누구도 신비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                     

그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거짓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

'아아, 벗이여 그대는 어디로 갔는가? 그대가 진정으로 있던 곳으로 그대는 갔고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남았다. 아아, 빌어먹을, 우린 여기에 있다.'

그들은 말한다. 그대는 그대가 온 곳으로 갔다. 이것이 하나의 비밀 법칙이다. 궁극의 것은 시작으로 돌아간다. 원이 한 바퀴 돌고, 그럼으로써 완성과 완전에 이른다. 그것은 시작했던 곳과 똑같은 곳에 이른다. 마지막은 시작 이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다. 마지막은 곧 그것의 근원이며 출발점이다. 사람은 무에서 태어나 무를 향해 움직여 가고 죽는다. 그대가 태어날 때 배는 비어 있었고, 그대가 죽을 때 다시 그배는 텅 빈다. 단지 찰나와도 같은 순간, 잠시 몇 순간 동안만 그대는 육체로 있고 그리고는 사라진다. 그대가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대가 삶을 이해한다면, 죽음은 끝이 아니다. 그때 죽음은 완성이며, 그것은 끝이 아니다. 완성이고, 절정이며, 파도가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클라이맥스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자신들의 파도가 중간에 머물러 있음을 슬퍼했다. 그들은 그 완성에, 그 절정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친구는 그가 전에 있던 곳에 이르렀다. 그는 집에 이르렀다.

삶을 이해하는 사람, 오직 그들만이 죽음을 이해한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하나의 절정이며, 궁극이고, 마지막 꽃피어남이고, 삶의 향기다. 기억하라. 삶을 향하는 그대의 태도가 무엇이든, 죽음을 향한 태도도 그것과 같은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곧 삶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삶을 사랑한다면, 그때 그대는 죽음까지도 사랑할 것이다. 죽음은 가장 높은 절정, 완성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노래는 그 끝에 이르고, 강은 바다와 하나가 된다. 강은 처음에 바다로부터 왔고, 이제 그 원이 완성되어 강물은 전체에 이른다.

삶이 책에 따를 수는 없다. 삶은 언제나 책을 초월하고, 언제나 책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간다. 삶은 언제나 책을 밀쳐 내고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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