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어는 날, 백장이 제자들과 함께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한 중이 호미를 들어올리는 찰나, 저녁을 알리는 북소리를 듣고 큰 소리로 웃더니 호미를 놓고 절로 돌아갔다.
백장이 이를 보고 말했다.
"장하도다! 이것이 관음 보살이 진리로 들어가신 문이다."
절에 당도했을 때 백장이 물었다.
"아까 북소리를 들었을 때 어떤 진리를 깨쳤느냐?"
중이 말했다.
"저는 무척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북소리를 듣고 돌아가 밥을 먹었습니다."
이 소리에 백장이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원문 이해
고요하고 정직하다면 다른 응답이 나올 수 없다. 두 사람 다 우연히 웃었다. 그들은 둘 다 일에 열중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잊었다. 그리고 그대 자신을 잊었을 때 어떻게 배고픔을 기억해낼 수 있겠는가? 그들이 북 또는 목탁 소리를 들었을 때, 갑자기 이 소리가 머리를 치면서 기억이 떠올랐다. "배가 고프다. 밥을 먹으러 갈 시간이다."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백장은 두 사람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졌다. 비슷한 상황 속에 있는 두 사람, 정직하고 단순하며 명상적인 두 사람에게서 유사한 응답이 나오는 것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모든 붓다는 특정한 상황 속에서 유사하게 감응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순간 속에 살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은 마음을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이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감응한다. 가슴이 텅 빈 사람의 감응은 거울과 같다. 앞에 무엇이 있건 있는 그대로 비춘다.
두 사람 다 배고픔을 느끼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얼마나 일에 열중했던지 배고픔의 징조조차 없었다. 마치 목탁 소리 때문에 배가 고파진 것 같다."
거기 배고픔이 있었지만 잠잠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의식이 다른 일에 완전히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목탁 소리가 의식을 '기다리고 있는 배고픔' 으로 향하게 했다. 백장은 단순하고 가슴이 텅 빈 사람들의 유사성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일은 명상이 되어야 한다. 그대가 앉아서 명상을 하듯이 붓다는 보행(步行)도 명상으로 도입했다. 그렇다면 일과 명상이 연관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 이유도 없다. 사실, 일 뿐만 아니라 육체의 모든 움직임이 명상적인 침묵에서 나와야만 진정으로 붓다가 될 수 있다. 붓사는 좌선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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