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왜 그런가? 수부티여, 이 보디사트바들에게는 '자아'라는 인식이 없으며 '존재'라는 인식도 없으며 '영혼'이라는 인식도 없으며 '개아'라는 인식도 없기 때문이다. 이 보디사트바들은 '법'이라는 인식이 없으며 '법 아닌 것"이라는 인식도 없다. 그들에게는 인식도 없고 인식 아닌 것도 없다. 왜 그런가? 수부티여, 만일 보디사트바들이 법이라는 인식, 또는 법 아닌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면 그로 말미암아 다시 자아, 존재, 영혼, 개아에 대한 집착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보디사트바는 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그 숨은 의미를 이렇게 말씀 하셨다.
'뗏목에 비유되는 법의 가름침을 아는 자는 법마져 버려야 한다. 하물며 법이 아닌 것에 있어서랴.'"
원문 이해
이 여덟 가지가 진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알려져 있다. 그것들을 이해해야 한다. 먼저 '자아'는 에고를 의미한다.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와는 별도로 '나의', '나의 것', '나'가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인간은 다만 이 다섯 가지 요소의 결합일 뿐이다. 이 다섯 가지 요소를 해체시키면 인간은 사라진다. 붓다는 거기에 이 다섯 가지 요소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첫째, '자아'는 "나는 구성 요소들과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붓다는 거기에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직 구성 요소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대는 철저한 공(空)이다.
두번째, '존재'이다. 존재는 개체성을 의미한다. 즉 상이한 시간대에도 자신을 동일한 인물로 여기는 생각이다. 그대는 이렇게 말한다. "한때 나는 어린아이였으며 지금은 젊은이다. 그리고 곧 노인이 될 것이다." 그대는 마치 자신이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한때 그대는 어린아이였으며 지금은 청년이다. 하지만 그대는 동일 인물이다. 곧 그대는 노인이 될 것이지만 그때에도 그대는 여전히 똑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대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붓다는 그대가 매순간 변화한다고 말한다. 어린아이였 때 그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으며 지금은 또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늙었을 때에는 다시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실제로 그대는 매일마다 다르다. 매순간 그대는 다른 사람이다.
세번째, '영혼'이다. 육체 안에 거주하는 초월적인 힘에 대한 관념, 즉 다른 것들과 분리되어 있으면서 그것들을 합치고 생기를 주는 어떤 힘이 있다는 생각이다. 붓다는 이 또한 부정한다. 그는 거기에 아무 초월적인 힘도 없다고 말한다. 그대 안에는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다. 그대는 집이고 그 안에 거주하는 주인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그대 안에 거주하는 것은 순수한 무(無)가 전부이다.
네번째, '개아'라는 관념이다. 환생에서 환생으로 영원히 옮겨 다니며 지속되는 영구적인 실체가 있다는 믿음이다. 그대는 죽을 것이지만 그대의 개아는 즉시 다른 자궁으로 들어가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이것이다. 그러나 연속성은 있지만 개아는 없다. 거기 자아도 없다. 거기 연속성은 있지만 개체성이라는 것도 영혼이라는 것도 없다.
어떤 사람이 내면으로 들어갈 때, 그대의 의식이 내면으로 향하여 그대 존재를 들여다 볼 때, 거기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 네 가지가 즉각 녹아 없어진다.
'법'은 삶의 긍정적인 요소를 의미하며 '비법'은 삶에 있어서 부정적인 요소를 의미한다. 그러나 붓다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도 진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마저 사라진다고 말한다. 내면으로 들어갈 때 그대는 긍정적인 실체와 만나지 않으며, 부정적인 실체와도 만나지 않는다. 다만 그대는 절대적인 무(無)와 직면한다.
이것을 명심하라. 만일 그대가 내면에서 무엇인가 본다면 그대는 여전히 외부에 있는 것이다. 가령 크리슈나가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이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흘리는 모습, 또는 붓다가 보리수 나무 밑에 고요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본다면, 하여튼 내면에서 어떤 것과 마주친다면 그대는 아직 외부에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렇게 말했다.
"길 위에서 나를 만나면 나를 죽이고 가라."
아무 것도 볼 것이 없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을 때에는 '보는 자' 또한 사라진다. 이것이 기억해야 할 핵심이다.
붓다는 모든 것을 버리라고 말한다. 진리인 것, 진리가 아닌 것, 모든 경험들, 대단하고 정신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경험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경험하는 자까지 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때, 그리고 이젠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조차 사라졌을 때......... 만일 이런 생각만이라도 남아있다면 그때엔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 것과 다름없다. "이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핵심을 놓친 것이다. 거기에 아무 것도 없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 거기서 그렇게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렇게 관찰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곳에는 완벽한 침묵이 있을 뿐이다. 절대적인 침묵만이 존재한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임의적인 수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뗏목의 비유는 그것을 보여준다. 비어 있음의 훌륭함을 강조하거나, 진리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경우에도 이와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이런 결론은 다른 곳에서 만병통치약의 예를 들어 설명한 바 있다. 약이 효과를 거둔 뒤에는 질병과 아울러 약도 버려야 한다. 그 뒤에도 계속 약을 사용한다면 또 다른 병을 초래할 뿐이다."
붓다는 말한다.
"이 '비어 있음'이라고 불리는 약이 '내가 존재한다는 믿음'이라는 병을 치료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존재에 대한 집착이 하나의 질병이듯이, 비어 있음에 대한 집착도 질병이다. 건강을 회복한 다음에도 이 비어 있음의 약을 계속 복용하는 자는 다시 병에 걸릴 것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먼저 모든 것을 버려야할 뿐 아니라, 그 다음에는 비어 있음마저 버려야 한다. 그 비어 있음은 다만 하나의 약이다.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 세상과 신, 물질과 마음, 몸과 영혼, 너와 나,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마침내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생각마저 사라졌을 때, 그대는 집에 도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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