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_13 거북이와 장자
원문
한번은 장자가 푸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때 초나라 사신 두 사람이 왕의 공식 문서를 받들고 찾아왔다. "왕께서 당신을 재상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든 채 여전히 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초나라에 한 신령한 거북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거북이는 죽은 지 3천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귀한 상자에 넣어 사원의 제단에 모시고 있다고 들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거북이는 죽어서 뼈만 남아 3천 년 동안 향 연기를 맡으며 왕의 제사를 받기를 원하겠는가. 아니면 진흙 바닥을 꼬리를 끌며 돌아다닐지라도 평범한 거북이로 살아 있기를 원하겠는가?"
두 사신이 말했다. "그야 물론 거북이로서는 살아서 진흙 바닥을 꼬리를 끌며 돌아다니는 편이 낫겠지요."
장자가 말했다. "어서 돌아가라. 나 또한 진흙 바닥을 기어다니고 싶으니."
원문 이해
먼저 몇 가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야 장자의 이 이야기가 더욱 분명해지고,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자신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마음 속에서 하나의 분열을 만드는 것이다. 그 마음의 분열이 그대의 불행, 그대의 지옥이 될 것이다. 자신을 비난한다는 것은 곧 본성, 또는 자연스러움을 비난하는 것이고, 자연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대양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부분이 전체와 싸울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의 종교는 그것과 싸우라고 가르친다. 자연을 비난하고 문명을 주장한다. 자연을 비난하면서 그들은 말한다. '그것은 동물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동물처럼 살지 말라!' 동물처럼 살지 말라고 부모들은 가르친다. 왜인가? 동물에게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 동물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속에서 동물은 비난받아 마땅한 그 무엇이다. 더없이 나쁘고, 악하고, 무가치한 것이다. 그대는 생각한다. 나는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나는 동물이 아니며, 천사로 태어났다고......... , 그리고 동물은 이용되고 착취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나무와 새들과 똑 같이 자연적이다. 나무와 새와 동물들에게는 정신 질환이 없다. 그들은 미치는 법이 없다.
문제는 아무도 그대에게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자신의 본성을 인정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그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하라! 존재계 전체에 감사하라. 그대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이든 의미가 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잘라내고 바꿀 수는 없다. 그렇게 하려고 시도한다면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지금 그대는 문제에 부딪쳐 있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 존재가 문제를 안고 있다.
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가? 왜 자연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에고는 비난을 통해 강해지기 때문이다. 에고를 강하게 만들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에고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투쟁해야만 한다. 무엇인가를 나쁘다고 비난하거나, 좋다고 칭찬해야만 한다. 에고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신과 악마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악마와는 싸우고, 신에게는 다가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에고에게는 갈등이 필요하다.
갈등 없이는 에고가 존재할 수 없다. 생각해 보라. 마음 속에 아무 갈등이 없다면, 자기 자신을 본질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있는 모습 그대로 행복하고 더없이 만족하고 전혀 불만이 없다면, 그때 에고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나는 누구다' 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더 많이 싸울수록 더 많은 '나' 가 만들어진다.
'나' 라는 것을 갖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것을 죽여야만 한다. 자연에는 에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들이 있지만 그들에겐 '나' 라는 것이 없다. 동물들이 있지만 그들은 에고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무의식 상태에서 살아간다. 투쟁도 갈등도 없이 살아간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고, 만족스러우면 잠을 잔다. 사랑을 하고, 먹고, 잠자면서 그냥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는 무엇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삶이라는 거대한 바다의 파도들이다. 그들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왔다가 간다. 그들에게는 역사도 없고, 자서전도 없다.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왔다가 갈 뿐이다.
장자와 노자를 이해하기 위해선, 도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들이 어떤 종류의 싸움도 찬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들은 말한다. 싸우지 말라.
살라! 삶에 자신을 맡겨라. 그래서 자연이 그대 속으로 흐르고, 그대가 자연 속으로 흐르게 하라. 그들은 말한다. 평범해져라. 특별하려고 하지 말라. 중요한 인물이 되려고 하지 말라.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라. 그러면 더 많은 삶을 즐기게 될 것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남기 때문이다. 그대는 에너지로 충만해질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도의 근본이다. 도는 어떤 '해야만 한다' 도 만들지 않는다. 장자는 말한다. '누구에게도 너는 이렇게 해야한 한다든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든가, 이렇게 되어선 안 된다고 말하지 말라.' 장자는 말한다. 그런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그대는 독을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유일하게 따라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대 안의 자연성이다. 그것이 어느 곳으로 그대를 인도하든지 신뢰하라.
그러나 우리는 자연을 따르기를 두려워한다. 자연이 나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인 교사들, 삶의 원천을 파괴하는 독을 전파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이 그대에게 너무 많은 것들, 너무 많은 '해야만 한다' 를 가르치기 때문에 그대는 있는 그대로 순수한 존재 상태를 볼 수 없다.
언제나 '해야만 한다' 의 관점에서 본다. 여기 장미 한 송이가 있다. 장미를 바라볼 때도 그대는 즉각적으로 이 장미를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한다. 더 붉게, 더 크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화학 약품을 주입하면 더 커질 것이고, 물감을 칠하면 더 붉은색이 될 것이다. 장미의 있는 그대로를, 장미의 순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크든 작든, 붉은 색이든 그렇지 않든 장미가 그곳에 있다. 왜 지금 이 순간 그것을 즐기지 못하는가? 먼저 그것을 더 붉게, 더 크게 만든 다음에야 그것을 즐길 수 있는가?
그대는 삶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뒤로 미루고 있다. 미래의 언젠가 삶을 살 것이라고. 이 뒤로 미룸 때문에 그대는 천국과 지옥을 만들었다. 천국은 모든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그대의 최종적인 '뒤로 미룸' 이다. 천국에는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그대는 말한다. 영원한 아름다움은 천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그대는 말한다. 천국에는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 사랑은 지금 여기에서만 순수하고 영원할 수 있다. 천국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사랑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순수하고 영원한 것이다. 사랑에게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시간의 연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원은 시간적이지 않은 것, 시간이 존재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단 한순간의 사랑이라도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그 순간은 무한히 깊기 때문에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정지한다. 그 순간 속에는 미래도 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순간 그대는 존재 전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계에 두루 연결된다. 존재계 전체가 그대와 연결되고, 그대의 전 존재가 존재계 전체와 연결된다. 그 순간은 그 자체로 영원하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영원이 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기도의 가능성이 있다.
진리가 집 앞에 와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대는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다. 단지 진실되라. 내가 진실되라고 말할 때 그것은 '자연스러워지라' 는 뜻이다.
자연스러움이 곧 진리다. 자연스러움 외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메시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