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달마 이야기1
달마대사에 대하여
보리달마는 14세기 전, 남부 인도의 한 왕국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그곳에는 아주 큰 왕국이, 팔라바스(Pallavas)라는 이름의 왕국이 있었다. 그는 그 나라 왕의 세 번째 아들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였던 달마는 모든 상황을 지켜본 뒤에 왕국을 포기했다.
그는 이 세상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세속적이고 하찮은 일들에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모든 관심사는 자신의 본성을 아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한, 결국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사실 진리를 구하는 구도자라면 누구나 죽음에 대항해 싸워 왔다. 러셀(Bertrand Rusell)은 죽음이 없다면 종교도 없을 것이란 말을 했다. 그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종교는 드넓은 대륙과 같은 것이니까. 종교는 죽음의 비밀뿐만 아니라 축복의 추구이고 진리의 추구이다. 또한 삶의 의미에 대한 추구이다. 그 밖에도 훨씬 많은 것들이 그것에는 담겨 있다.
하지만 러셀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다. 만일 세상에 죽음이 없다면 매우 적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종교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죽음은 큰 동기이다.
달마는 왕국을 포기하면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아버지께서 나를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없다면 그때는 나를 막지 마십시오. 죽음을 초월한 그 무엇을 찾아가도록 날 내버려 두십시오."
그 시대는 아름다운 시대였다. 특히 동양은 그러했다. 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막지 않으리라. 너의 죽음을 내가 막아 주진 못하니까. 너는 나의 축복 속에 너의 추구를 계속하라. 나로서는 슬픈 일이지만 그것은 나의 문제일 뿐이다. 그것은 나의 집착이다. 나는 네가 나의 후계자가 되어 위대한 팔라바스 왕국의 왕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너는 그것보다 더 고귀한 어떤 것을 선택했구나. 나는 너의 아버지이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널 막을 수 있겠느냐? 그리고 너는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졌다. 내가 너의 죽음을 막아 줄 수 없다면 널 막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그대는 뛰어난 지성을 지닌 달마의 수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점은 달마가 고타마 붓다의 추종자이면서도 어떤 경우에는 고타마 붓다보다 더 높이 비상한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고타마 붓다는 여성을 자신의 승단에 입문시키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달마는 한 깨달은 여성의 제자로 입문했다. 그녀의 이름은 프라기야타라(Pragyatara)였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달마 때문이다. 우리는 그녀에 대해서 다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달마에게 중국으로 가라고 지시한 것은 그녀였다. 달마가 중국으로 건너가기 6백여 년 전에 불교가 중국에 전해졌다. 그런데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그러한 일이 없었다. 고타마 붓다의 메시지는 순식간에 중국사람 전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상황은 이러했다. 중국은 오랫동안 공자 사상의 영향 아래 있어 왔고, 사람들은 그것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공자는 도덕주의자이고 청교도일 뿐 삶의 내면적 신비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내면적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부정한다.
모든 것이 외부적이다. 그것을 세련되게 하고, 빛을 내고, 교양 있게 하고, 최대한 아름답게 하라.
공자와 동시대 사람으로 노자나 장자, 또는 열자 같은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비가였을 뿐 스승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공자에 대응할 만한 어떤 운동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래서 거기에 공백이 자리잡았다. 누구라도 영혼이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대가 한 번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대의 삶은 모든 의미를 잃어버린다. 영혼은 전체와의 연결 그 자체다. 영혼이 없다면 그대는 존재계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마치 가지 하나가 나무에서 잘려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영양분을 공급하는 근원을 잃어 버리는 것이다. 그대 속에 영혼이 없고, 그대 속에 의식이 없다는 바로 그 생각이 그대를 존재계로부터 단절시킨다. 그 순간 그대는 위축되기 시작할 것이며, 숨이 막히기 시작할 것이다.
공자는 매우 뛰어난 합리주의자였다. 노자나 장자, 열자 같은 신비가들은 공자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스승이 아니었다. 그들은 극소수의 제자만을 데리고 그들의 사원 안에 머물러 있었다.
불교는 중국에 건너가자 즉시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그들은 몇 세기 동안 목이 말랐는데 불교가 하나의 비구름이 되어 나타난 것과 같았다. 그것이 그들의 목마름을 더없이 채워 주었기 때문에 일찍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닐어났다.
기독교는 수많은 사람을 개종시켰다. 그러나 그 개종은 종교적인 것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없다. 기독교는 어떤 영적인 충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음식과 옷을 주고 집과 학교를 제공함으로써 가난한 자, 배고픈 자, 걸인과 고아들을 개종시킨다. 이것들은 영적인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슬람교 역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칼에 의한 개종이었다. 이슬람교도가 될 것이냐 아니면 목숨을 바칠 것이냐, 선택은 너의 자유다.
중국에서 일어난 개종은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종교적인 개종이었다. 단순히 불교를 설명하자 사람들은 그 메시지에 담긴 아름다움을 이해했다. 그들은 그것을 목말라했었다. 그들은 그러한 것을 기다리고 있어 왔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전체가 불교로 개종했다. 6백 년 뒤에 달마가 그곳에 갔을 때,
중국에는 이미 3만 개의 절이 있었고 2백만 명의 불교 승려가 있었다. 2백만 명의 불교 승려란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중국 인구의 5퍼센트에 달하는 숫자였다.
달마의 스승 프라기야타라는 달마에게 중국으로 가라고 말했다. 그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깊은 충격을 던져 주었으나 그들 중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위대한 학자였고, 높은 인격과 수양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사랑과 평화와 자비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깨달음에 이른 자는 없었다. 이제 중국은 또다른 붓다를 요구하고 있었다. 씨를 뿌릴 밭이 준비된 것이다. 달마는 중국에 건너간 첫 번째 깨달은 사람이다. 여기서 내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고타마 붓다가 여성을 자신의 승단에 입문시키기를 두려워한 반면에 달마는 고타마 붓다의 길을 걸으면서도 여성을 스승으로 받아들일 만큼 용기있는 자였다는 사실이다. 다른 깨달은 자들이 주위에 있었지만 달마는 굳이 여성을 스승으로 선택했다. 거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이란 여성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것뿐 아니라 여자 스승의 문하에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그는 보여 주고자 했다. 그리하여 달마의 이름은 깨달음에 이른 모든 불교도들 사이에서 고타마 붓다 이후 두 번째로 우뚝 서게 되었다.
달마에 대해선 많은 전설이 전해진다. 그 전설들 모두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첫 번째 전설은 양무제(梁武帝)와의 만남에 대한 것이다.
달마는 3년이란느 세월을 여행한 끝에 마침내 중국에 도착했는데, 당시 중국의 황제였전 양무제가 그를 마중나왔다고 한다. 그의 명성이 그를 앞질러 이미 중국에 전해졌던 것이다. 양무제는 불교 전파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수천 명에 달하는 학자들이 팔리(Pali)어 불교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고 있었는데 그 대작업의 후원자가 바로 양무제였다.
또한 그는 수천 개의 절과 법당을 지었으며 수만 명의 승려들을 후원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는 데에 아낌없이 희사했다. 자연히 달마 이전에 중국으로 건너간 불교 승려들은 그가 많은 공덕을 쌓았으며 천국에서 신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칭송하곤 했다.
달마를 만났을 때 양무제의 첫 질문은 당연히 이러한 것이었다.
"나는 수많은 절을 지었고 수천 명의 학승들을 후원하고 있소. 나는 고타마 붓다의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큰 대학을 세웠소. 또한 나는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 앞에 내 왕국과 전재산을 내놓았소. 이 다음에 나는 어떤 보상을 받데 될 것 같소?"
그는 달마늘 보며 약간 당황했다. 달마란 자는 예상했던 모습과 전혀 딴판이었다. 사나운 인상에다 매우 큰 눈을 갖고 있었다. 달마는 사실 매우 부드러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가슴 안에는 한 송이의 연꽃이 피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사람들이 위협을 느낄 만큼 무시무시했다. 검은 선글라스만 썼다면 그는 완전히 마피아 단원 같았을 것이다.
두려움을 느끼면서 양무제는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달마는 간단히 대답했다.
"아무 것도 없다. 아무런 보상도 없다. 오히려 일곱 번째 지옥에 떨어질 준비나 하라."
황제가 말했다.
"하지만 난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소. 왜 내가 일곱 번째 지옥에 떨어져야 합니까? 나는 불교 승려들이 하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했소."
달마가 말했다.
"그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한 불교도든 불교도가 아니든 아무도 그대를 도와줄 수 없다. 아직까지 그대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만일 그 목소리를 들었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타마 붓다의 길에 보상이란 존해하지 않는다. 보상을 바라는 그 마음이 탐욕이다.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은 욕망을 버리는 것이니, 만일 그대가 수많은 절을 짓고 수천 명의 승려들들 먹여 살리는 것과 같은 공덕을 행하면서 마음 속에 욕망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곧 지옥으로 떨어질 준비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만일 이 모든 것을 즐거움으로 행하고 그 즐거움을 나라 전체와 함께 나누며 보상을 바라는 어떠한 마음도 갖지 않는다면 그 행위 자체가 이미 큰 보상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완전히 과녁에서 빗나간 것이다."
양무제가 말했다.
"내 마음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마음에 가득 찬 이 생각들과 소음들 때문에 당신이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나는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 새벽 네 시에 내가 묵을 산 속의 절로 오라. 단, 어떤 수행원도 데려오지 말고 그대 혼자서 오라. 그러면 내가 그대에게 영원한 마음의 평화를 주겠노라."
황제는 이 사람이 정말로 기이하고 무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승려들을 만났지만 그들 모두가 정중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가 대국의 황제라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날도 밝지 않은 새벽 네 시에 혼자서 이런 자를 찾아가다니..., 이자는 무척 위험한 인물로 보였다. 게다가 그는 큰 지팡이를 항상 들고 다니고 있었다.
황제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저자는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전혀 믿을 수가 없는 인물이다."
한편 마음 깊은 곳에서 황제는 그 사람의 진실성을 느꼈다. 그는 위선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황제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다. 한낱 걸인에 불과한 그가! 그는 마치 황제처럼 행동했으며, 그 앞에선 황제라도 걸인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방식을 보라. "내가 그대에게 영원한 마음의 평화를 주겠노라."
황제는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다. 지금까지 나는 인도에서 온 수많은 현자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수행 방법과 명상 기술들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것들을 열심히 실천했지만 아무런 결과도 없었다. 그런데 이 이상한 친구는 누구란 말인가? 아주 미쳐 버린 사람 같기도 하고 술 취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이하게 생긴 얼굴에다 부리부리한 눈은 무섭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에게선 진실함이 느껴진다. 그는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인간이다. 이것은 충분히 모험을 해 볼 만하다. 그가 날 어떻게야 하겠는가. 기껏해야 죽이기밖에 더하겠는가?'
마침내 황제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그 사람이 "그대에게 영원한 마음의 평화를 주겠노라."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양무제가 절에 도착한 것은 새벽 네 시였다. 어둡고 이른 새벽, 그는 홀로 달마를 찾아갔다. 달마는 큰 지팡이를 짚고 계단 위에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가 올 줄 알고 있었다. 그대는 밤새도록 올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황제라는 자가 가난한 승려를 겁내서야 되겠는가. 지팡이 하나밖에 가진 것 없는 가난한 걸인을. 하지만 나는 이 지팡이로 그대의 마음을 고효하게 만들 것이다."
황제는 생각했다.
'맙소사! 지팡이로 마음늘 고요하게 해준다는 말을 언제 들어 봤던가! 물론 지팡이로 머리를 후려치면 조용해지겠지. 하지만 그것은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깨져 죽게 되니까 조용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때 달마가 말했다.
"이 사원 마당에 와서 앉으라."
사원 마당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
"눈을 감으라. 난 지팡이를 들고 그대 앞에 앉을 것이다. 그대가 할일은 마음을 잡아내는 일이다.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가 그것을 찾으라. 마음을 잡아내는 순간 나에게 '여기 있다.'라고 말하라. 그 다음은 내 지팡이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것은 진리나 마음의 평화, 혹은 침물을 찾는 구도자들이 지금까지 겪은 경험 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제 다른 길은 없었다. 양무제는 하는 수 없이 눈을 감고 앉았다. 달마가 충분히 자신의 말대로 행동할 그런 인물임을 양무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음을 찾아서 모든 곳을 다 둘러보았다. 하지만 마음은 어디서도 없었다. 그 지팡이가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는 생애 최초로 그러한 상황에 놓였다. 만일 마음을 발견하면 이 사람이 지팡이로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도 없는 이 외진 산속에서 카리스마적인 성격을 가진 달마와 단 둘이 마주앉아 있는 것이다.
세상에 깨달은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달마는 그들 중에서도 에베레스트 산처럼 홀로 우뚝 솟아 있다. 그의 모든 행동은 자신 속에서 나온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의 모든 몸짓은 자신의 서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들은 누구를 흉내낸 것이 아니었다.
황제를 마음을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생애 처음으로 그는 마음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나의 작은 전략이 거기에 있었다. 마음이란 그대가 찾지 않을 때만 존재한다. 그대가 깨어서 찾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존재한다. 그대가 그것을 찾으려는 순간, 그대는 깨어 있게 되고 그 깨어 있음이 마음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린다.
몇 시간이 흘러갔다. 고요한 산중에 태양이 떠오르고 시원한 아침바람이 불어왔다. 달마는 양무제의 얼굴에 나타난 평화와 침묵과 정적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마치 하나의 불상과도 같았다.
달마는 황제를 흔들어 깨워서 물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래 마음을 찾았는가?"
양무제는 말했다.
"당신은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고도 내 마음을 완전히 평화롭게 했습니다. 내 마음 속으로부터 사념들은 사라졌으며, 당신이 말한 내면의 목소리를 나는 듣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한 말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서 나를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나는 모든 행위가 그 자체로 하나의 보상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가 나에게 보상을 해주겠습니까? 보상을 받겠다는 것은 유치한 생각입니다. 또 누가 나에게 벌을 내리겠습니까? 나의 행위가 그 자체로 벌이고 보상인 것입니다. 내가 나의 운명의 주인입니다."
달마가 말했다.
"그대는 매우 드문 제자이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며 존경한다. 그대가 한 나라의 황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 한번의 앉음으로 그토록 깊은 자각, 그토록 많은 빛에 도달하여 마음의 모든 어둠을 사라지게 하는 그 용기 때문이다."
양무제는 달마를 자신의 궁전으로 간곡히 초대했다. 그러자 달마는 말했다.
"그곳은 내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다. 그대도 보다시피 난 야생의 인간이며, 나 자신도 다음 순간에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순간에서 순간으로 살며,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다. 나는 그대와 그대의 궁전에 사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어려움을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 궁전은 나에게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다. 그러니 나를 자연 그대로 살게 내버려 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