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 황금 시편1_영원한 순례자

slowmrlee 2019. 11. 11. 12:34

피타고라스의 황금 시편1

불멸의 신들에게 신성한 경배를 바쳐라.

그대의 신앙을 간직하라.

위대한 영웅들, 영혼들, 신인(神人)들을 추모하라.

 

좋은 아들, 공정한 형제, 다정한 배우자,

훌륭한 아버지가 되어라.

 

친구를 선택하되 덕이 있는 친구를 택하라.

그의 자상한 충고에 귀 기울이고,

그의 삶을 통해 배움을 얻어라.

사소한 불만으로 그를 버리지 말라.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라.

가장 엄격한 법칙이

힘과 필연을 한데 묶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는 '영원한 삶의 철학', 즉 필로소피아 페레니스(philosophia perennis)를 구하는 영원한 순례자를 대표한다. 그는 진리를 구하는 탁월한 구도자다. 그는 이 구도의 길에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여러 스승들과 신비학파, 비의적인 단체를 찾아 넓은 지역을 여행했다. 그는 당시에 알려진 거의 모든 지역이 포함될 정도로 광범위한 곳을 여행했다.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의 신비를 찾아 그리스에서 이집트까지 여행했다.

그 당시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도서관에는 과거의 모든 비밀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 도서관은 지금까지 지상에 존재했던 어떤 도서관보다도 거대한 규모였다. 나중에 이슬람교의 광신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도서관이 모두 전소되기까지 6개월 동안이나 불길이 치솟았다고 한다.

거대한 대륙 아틀란티스는 피타고라스가 세상에 태어나기 2천5백년 전에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지금의 '대서양(atlantic)' 이라는 이름은 아틀란티스 대륙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아틀란티스는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대륙이었으며,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문명도 극에 달하면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극에 달한 문명은 분열과 자멸의 위험을 맞이한다.

지금 인류는 이와 똑같은 위험에 직면해 있다. 인류는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을 때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할 지 모른다. 힘은 막강한데 이해가 그에 미치지 못하면 위험이 뒤따른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것은 자연 재앙 때문이 아니다. 바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과 똑같은 이유에 의한 것이었다. 자연을 정복하려고 한 인간의 힘이 자멸을 초래한 것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침몰은 원자 에너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였다. 인간 스스로 자멸한 것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가 살아있을 당시만 해도 아틀란티스 대륙의 모든 경전과 비밀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대홍수에 관한 전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이 대홍수의 이야기들은 아틀란티스 대륙의 침몰에서 유래했다.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등에서는 과거에 한때 대홍수가 닥쳐 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야기에서는 소수의 선각자들만이 살아 남았다. 노아(Noah)는 선각자이며 위대한 스승이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는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소수의 사람들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로 인해 당시의 문명이 이루어놓은 모든 비밀이 보존될 수 있었고, 이 비밀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몇 년간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다. 그는 이집트의 신비학파, 특히 헤르메스 신비주의에 입문하여 공부했다. 그 다음에 그는 유서 깊은 이 대륙, 인도로 와서 교양 높은 지식인들이 발견한 모든 것들, 인간의 내면에 관해 인도가 알고 있던 모든 내용을 탐구했다.

그는 수년 간 인도에 있다가 티베트로 넘어갔으며, 그 다음에는 중국까지 들어갔다. 그는 평생 동안 진실한 구도자이자 순례자로 살았다. 그는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을 추구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미에서의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이라는 단어의 어원적 의미에 어울리는 철학자였다.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사람이었다. 사랑이 넘치는 사람은 진리에 대해 단순히 머리로 생각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래서 그 역시 위험에 찬 모험을 감행했다.

진리는 가장 소중한 연인(The Beloved) 이다. 그러니 어떻게 연인에 대해 생각만 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가슴 전체로 연인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사랑의 탐구는 단순히 지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당연히 직관적인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아마 처음에는 지적인 탐구로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에만 그렇다. 처음에는 지적인 탐구로 시작하겠지만, 결국 자신의 내면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가야 한다.

그는 지극히 자유롭고 포옹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 편견도 없이 활짝 열린 가슴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전 세계로부터 존경받았다. 그리스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다. 그가 찾아간 모든 신비학파에서 그를 받아들였다. 그의 이름은 온 세상에 알려졌으며 가는 곳마다 큰 기쁨으로 그를 환대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새로운 단체들을 찾아다니는 일을 계속했다. 여전히 새로운 학파에 입문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위대한 통합을 시도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방편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면, 모든 차원에 걸쳐 진리를 알고자 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른 스승들 앞에 무릎을 꿇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일단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탐구가 중단된다. 구도 행각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결코 다른 스승을 찾아가지 않았다. 예수도 깨달은 후에는 다른 스승을 찾아가지 않았다. 노자도 그랬고, 차라투스트라와 모세도 그랬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는 매우 특이한 경우다. 이에 비교될 만한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경우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피타고라스는 진리의 일면을 밝혀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의 제자라도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탐구열은 어느 누구를 통해서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제자도를 갖춘 사람이었다. 존재계 전체를 통해 배울 준비다 되어 있었다. 항상 열려 있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배우는 자로 남았다.

그 당시에 그리스에서 중국까지 여행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위험하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오늘날에는 뉴욕에서 아침을 먹고 런던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인도의 푸나에서 소화불량으로 고생할 수도 있다. 그만큼 쉽고 간단하다. 그러나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데 몇 년씩이나 걸렸다.              

모국으로 돌아왔을 때 피타고라스는 매우 늙어 있었다. 그러나 구도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학파가 탄생했다. 항상 그렇듯이 사회는 그와 그의 학파, 제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 동안 영원한 철학을 추구했으며 마침내 구하던 바를 발견했다. 전 세계에서 수집한 단편들을 모아서 최고로 조화로운 통합을 이루었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들을 낱낱이 밝혀내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사회는 그가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평생 동안 수많은 구도의 길을 시도했으며, 그가 수집한 모든 것을 가르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가 모은 보물은 그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처럼 많은 보물을 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사회는 그를 탄압했다. 어리석은 인류는 항상 이런 식이다.

피타고라스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서양과 동양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이다. 그가 첫 번째 다리였다. 그는 서양적인 마음뿐만 아니라 동양적인 마음까지 깊이 꿰뚫었다.

그는 그리스인이었다. 그는 논리와 과학적인 접근방식이 지배하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그는 동양으로 들어가 직관의 길을 배웠다. 어떻게 신비주의자가 되는지를 배웠다. 그는 천부적인 수학자였다. 그런데 수학자가 신비주의자로 되는 것은 일대 혁명이다. 수학자와 신비주의자는 대립되는 양극과 같기 때문이다.

서양은 남성적인 마음과 공격적인 지성을 대표한다. 반면 동양은 여성적인 마음과 수용적인 직관을 대표한다. 서양과 동양이라는 구분은 단순히 임의적인 구분이 아니다. 이 구분은 아주 심오하고, 의미심장하다.

키플링의 말을 잊지 마라. 그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서양과 동양이 결코 만날 수 없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동양과 서양의 방식은 변증법적으로 정반대다. 그러므로 만남은 불가능해 보인다.

서양은 공격적이고 과학적이다. 자연을 정복할 태세가 되어 있다. 그러나 동양은 비공격적이고 수용적이다. 동양은 자연에 정복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서양은 앎을 얻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하지만 동양은 묵묵히 기다린다.

서양은 삶과 존재계의 신비를 파헤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들은 비빌의 문을 열려고 애쓴다. 그러나 동양은 깊은 신뢰속에서 묵묵히   

기다린다. '내가 준비되면 진리가 저절로 드러나리라' 라는 신뢰를 갖고 기다린다.

서양이 집중의 길을 걷는다면 동양은 명상의 길을 걷는다. 서양은 사념을 택했지만 동양은 무념이다. 서양이 마음이라면 동양은 무심(無心)이다. 그러므로 키플링의 말은 논리적으로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은 절대 불가능한 것 같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말은 지역적인 구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대의 마음과 두뇌를 상징한다. 그대의 두뇌 역시 지구처럼 둘로 나누어져 있다. 두뇌 안에는 동양과 서양이 들어있다. 왼쪽 뇌는 서양이다. 이 부분은 오른 손과 연결되어 있다. 오른쪽 뇌는 동양이다. 이 오른쪽 뇌는 왼손과 연결되어 있다.

서양은 우익이고, 동양은 좌익이다. 이 양자의 방식은 너무나 다르다. 마음의 우반구는 논리적으로 계산하고 사유한다. 모든 과학이 이로부터 나온다. 반면 마음의 좌반구는 시인이며 신비주의자다. 이 마음은 직관하고 느낀다. 이 마음은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불분명하고 막연하다.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다. 모든 것이 일종의 카오스 상태에 있다. 

그러나 이 카오스 상태는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 안에는 위대한 시와 노래가 깃들어 있다. 참으로 풍요롭다. 계산적인 마음은 황량한 사막과 같다. 그러나 계산적이지 않은 마음은 아름다운 정원이다. 거기엔 새들이 노래하고 꽃이 만발하다.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피타고란스는 불가능한 것을 시도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공했다! 그를 통해 동양과 서양이 하나가 되었다. 그의 안에서 음과 양이 하나가 되고, 남성과 여성이 하나가 되었다. 그는 정반대되는 양극의 완벽한 통합, 즉 아르드하나리쉬와르(Ardhanarishwar)였다.

시바와 샤크티가 합쳐지고, 최고의 지성과 가장 심오한 직관일 하나로 만났다. 피타고라스는 햇빛 찬란한 최고의 정상인 동시에 어둡고 깊은 계곡이다. 이것은 매우 드문 통합이다.

그러나 평생에 걸친 그의 노력은 어리석은 사람들, 천박한 대중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여기 몇 개의 시 구절만 남아있다. 이 시구는 우편엽서 한 장에 쓸 정도의 분량밖에 안 된다. 이 위대한 인간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한 것들 중에 겨우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 이 시구 또한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다. 그가 썼던 것은 완전히 없어진 것 같다.

피타고라스가 죽던 날, 수천 명에 달하는 그의 제자들 또한 잔인하게 살해되고 화형에 처해졌다. 단 한명의 제자만이 학원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라이시스(Lysis)였다. 그가 탈출한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보존하기 위해 탈출한 것이다. 이 <피타고라스의 황금 시편(The Golden Verses of Pythagoras)>은 우일한 생존자인 피타고라스의 제자 라이시스가 쓴 것이다.

학교 전체가 불타고 수천 명의 제자들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피타고라스가 오랜 여행을 통해 수집한 모든 것들, 중국, 인도, 티베트, 이집드 등지에서 가져온 소중한 경정과 가르침들이 모두 불에 타 버렸다.

피타고라스는 거대한 통합을 이루어낸 첫 번째 인물이다. 그 후로 2천5백 년이 지났지만 그런 통합을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이런 시도를 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동시에 신비적인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아주 희귀한 일이다.

 붓다, 노자, 차라투스트라 같은 신비주의자들이 있었다. 뉴턴, 에디슨,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아무 마찰 없이 동시에 받아들이는 사람, 이 양쪽 세계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찾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피타고라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와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시도했던 통합은 특히 그 당시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다시 똑같은 시대를 맞고 있다. 세상은 수레바퀴 안에서 움직인다. 산스크리트어에서는 세상을 '삼사(samsara)'라고 한다. 삼사라는 수레바퀴라는 뜻이다. 이 수레바퀴는 거대하기 그지없다. 한 바퀴를 도는데 2천5백 년이 걸린다. 피타고라스가 출현하기 2천5백 년 전에 아틀란티스 대륙은 자멸하고 말았다. 인간 스스로의 과학적 성장에 따른 결과였다 지혜가 없는 과학적 성장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손에 칼을 쥐어주는 것과 같다.

피타고라스 이후 2천5백 년이 흐르고 다시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수레바퀴가 다시 똑같은 지점으로 돌아왔다. 수레바바퀴는 항상 똑같은 지점으로 돌아온다. 이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2천5백 년이 걸린다. 2천5백 년마다 거대한 혼란 상태를 맞는다.

이제 인간은 뿌리 없이 떠다니는 느낌, 삶에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 공허감을 느끼고 있다. 삶이 덧없이 느껴진다. 거대한 암흑에 휩싸인 것처럼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 모든 일이 그저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다. 아무 목적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다. 삶이 그저 우연한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존재계는 그대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죽음 후에는 아무 삶도 없는 것 같다. 무슨 일을 하건 모든 것이 공허하고 형식적이며, 판에 박힌 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인다.

이런 혼란과 무질서의 시대는 아틀란티스 대륙의 경우처럼 무서운 저주가 될 수도 있고,.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어떻게 이용하느야에 달렸다. 거대한 별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전 카오스의 시대가 필요하다.

그 당시에 피타고라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스에는 피타고라스와 헤라클레이토스가 있었다. 인도에는 붓다와 마하비라 등의 많은 인물이 있었으며, 중국에는 노자, 장자, 공자, 맹자, 열자 등의 인물이 있었다. 이란에는 차라투스트라가 있었다. 인도의 전통에는 우파니샤드의 많은 구도자들이 있었고, 유대의 전통에는 모세 등의 인물이 있었다. 이 모든 사람들, 이 위대한 스승들 모두가 2천5백 년 전이라는 특정한 시기에 태어났다.  

이제 우리는 다시 거대한 카오스 시대를 맞고 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렸다. 우리는 아틀란티스 대륙의 문명이 붕괴되었듯이 스스로 멸망할 수 있다. 온 세상이 히로시마처럼 될 수도 있다. 지식의 함정에 빠져 익사하거나 과학의 힘에 의해 집단적인 자살을 초래할 수소 있다. 노아와 같은 선각자와 그를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를 도약의 발판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인류는 자멸할 수도 있도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두 개의 문이 다 열려 있다.

이 대혼란의 시대가 헤라클레이토스, 노자, 차라투스트라, 피타고라스, 붓다, 공자 같은 인물들을 낳을 수 있다면 모든 인류가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기회를 놓치고 있다.

일반 대중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그들은 깜깜한 무의식 속에 산다. 그들은 눈이 멀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명상을 위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면, 내면의 여행, 침묵, 사랑, 신을 위한 발판을 만들 수 있다면, 다가오는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내면에 신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면, 이렇게 된다면 인류는 새로운 탄생을 맞을 것이다. 부활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인간이 탄생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시기를 놓치면 앞으로 2천5백 년 동안 다시 똑같은 상태로 남아있어야 한다. 몇몇 사람은 깨달음을 얻겠지만 극소수에 국한될 것이다. 여기저기서 이따금씩 산발적으로 의식의 각성을 이루고 신성(神性)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출현하겠지만 대다수의 군중은 칠흑 같은 어둠과 불행에 빠져 뒤쳐질 것이다.

대부분의 인류는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과거의 뿌리를 잃어버리고 단절되는 이 순간들은 훌륭한 기회가 될수도 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배울 점이 많다.

피타고라스의 경우를 보라. 사람들은 피타고라스와 그의 이해를 활용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피타고라스가 이룬 위대한 통합을 활용하지 못했다. 피타고라스가 열어놓은 문도 그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단 한 명의 인물이 그토록 엄청난 일, 거의 불가능한 일을 이루어 놓았지만 그것은 전혀 활용되지 못했다.

이 경문들은 아주 적은 분량이다. 피타고라스의 이 경문들은 '예비(preparation), 정화(purification), 완성(perfection)'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흔히 이것을 피타고라스의 '3P' 라고 한다.

'예비(豫備)'는 준비를 갖추는 것, 수용적인 자세로 열려있는 것을 뜻한다. '예비'란 진리에 대한 열망과 갈증을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지적인 관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탐구의 길에 투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외부에 서서 구경하는 방관자가 아니라 직접 뛰어들어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예비'란 그대 안에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도입 단계다. 그대가 스승을 찾아갔을 때 스승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대 안에 불같은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스승은 그대 안에 거대한 열망을 심어준다. 그대 안에 주체할 수 없는 갈망의 씨앗을 뿌려놓는다. 사실, 스승은 그대를 커다란 불만에 시달리게 만든다.

그대는 어떤 만족이다 위안을 얻기 위해 스승을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승은 오히려 그대가 꿈도 꾸지 못했던 새로운 욕망, 전혀 자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욕망에 불을 지펴 활활 타오르게 만든다. 이 욕망은 그대 안의 어두운 구석에 잠복해 있었다. 아주 후미진 곳에 숨어 있었다.

스승은 그 욕망을 밝은 곳으로 끌어내어 불타오르게 만든다. 그는 그대에게 갈증과 불만을 심어주려고 온 힘을 기울인다. 그래야 그대가 탐구를 시작하고 모든 위험을 감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은 그대의 모든 욕망이 오직 하나의 흐름 속에 응집되도록, 낮이나 밤이나 진리, 신, 열반, 즉 니르바나에 대한 단 하나의 욕망이 불타오르도록 그대를 준비시킨다. 이 진리, 신, 열반은 똑같은 것을 일컫는 다른 이름일 뿐이다.

'예비'란 제자가 자신의 상황을 자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나는 어둠 속에 갇혀 있다. 그러므로 나는 빛을 밝혀야 한다. 지금까지 나는 삶을 쓸모없이 낭비해 왔다. 이것은 올바른 삶의 길이 아니다.'

이런 자각이 있어야 한다. 신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한 삶은 공허하고 무기력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제자가 돈, 정치권력, 특권 등의 꿈에서 벗어나도록 강한 충격이 가해져야 한다. 그에게 궁극적인 꿈, 지금까지의 모든 꿈을 태워버리는 궁극적인 꿈이 주어져야 한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것, 만물의 여여(如如)한 실상을 아는 것, 우리가 온 근원은 무엇이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아는 것. 이런 것들이 궁극적인 꿈이다.

두 번째 단계는 '정화(淨化)'다. 구도의 열망이 일어난 다음에는 정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무게, 그대가 항상 짊어지고 있는 짐들을 덜어내야 한다. 그대는 그 짐들을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고 계속 짊어지고 다닌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흡수한 모든 독소들을 정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많은 종류의 독을 마시며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힌두교라는 독을 마시고, 어떤 사람은 이슬람교도라는 독을 마신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독교라는 독을 마신다. 이 모두가 그대에게 편견을 심어주는 독극물이다. 이 독극물들이 그대를 사회에 얽어매고 세뇌시켰다.

정화는 모든 세뇌작용, 이데올로기, 편견, 모든 관념과 철학 등 남들에게서 배운 모든 것들을 버리는 것이다. 타불라 라라(tabula rasa),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칠판, 완벽한 백지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완벽한 백지상태가 되어야만 신이그 위에 무엇인가 쓸수 있다. 사회로부터 주어진 모든 말들이 사라지고 완벽하게 침묵해야만 한다. 그래야 신이 그대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 진리가 그대의 귀에 신비를 속삭일 수 있으려면 그대가 완전히 텅 비어야 한다. 이렇게 텅 비는 것이 정화다.

정화는 깨끗하게 정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사실,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대는 자신의 주변에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놓고 있다. 그대 자신을 여러 겹의 껍데기, 여러 개의 인성으로 포장하고 있다.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본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 그 모든 가면을 벗어던져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 진실한 그대 자신이어야 한다. 완전히 벌거벗어야 한다. 감추지 말라. 거짓을 말하지 말라. 가식을 버려라! 이것이 정화의 의미다.

세 번째는 '완성(完成)'이다. 가식을 버렸을 때,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독극물을 제거했을 때, 거울에 묻은 먼지를 깨끗이 닦아냈을 때 저절로 완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완성'은 '유니오 미스티카(uniomystica)', 즉 '통합'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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