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_2 그대의 진면목을 발견하라
원문
위나라에 동문오(東問吳)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들이 죽어도
비통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부인이 그에게 말했다.
"세사에 당신만큼
아들을 사랑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막상 그가 죽고 나니
슬퍼하는 기색도 없군요."
그다 대답했다.
"나에겐 아들이 없었던 시기가 있었소.
아들이 없었을 때 나는 슬퍼하지 않았소.
이제 그가 죽었으니 아들이 없었던 때로
다시 돌아간 것뿐이오.
그러니 내가 왜 슬퍼해야 한단 말이오?"
원문 이해
20세기는 부대적인 것이 가장 횡행하는 시대이다.
인간은 '나의 것', '나의 소유물'에 너무 집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했다. 사람들은 '나(I)'를 잊었으며, '나의 것(my)'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나의 것'이 더 중요하게 될 때, 사람들은 부대적인 것에 더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나(I)'가 더 중요한 위치에 남아있을 때에 '나의 것(my)'은 충실한 하인일 뿐이다. 그때에는 그대가 주인이다. 그대는 노예가 아니다. 주인이 될 때, 그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된다.
이렇듯 순수한 '나'가 존재하는 본처(本處)를 선(禪)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부른다. 이 '나'는 에고와 아무 관계도 없다. 에고는 모든 비본질적인 소유물의 중심일 뿐이다. 에고는 '나의 것'이 축적된 것이다.
내 집, 내 차, 나의 신분, 나의 종교, 나의 경전, 나의 도덕성, 나의 성격, 나의 가족, 나의 유산, 나의 전통. 이 모든 '나의 것'들은 계속해서 축적되고 에고로써 굳어진다.
선(禪)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의 진면목을 발견하라.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 본래 얼굴을 발견하라. 네가 죽어서도 다시 가지게 될 그 얼굴을 발견하라.'
'내 것'이라는 이 게임은 가장 어리석은 게임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런 게임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지구는 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대가 죽은 뒤에도 지구는 이 자리에 남을 것이다.
그대가 갖고 있는 다이아몬드는 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리고 그대가 죽은 뒤에도 있을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그대를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그대에게 소유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이 '소유의 게임'은 가장 바보 같은 게임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이런 게임이 전부이다.
구제프는 이렇게 말했다.
'사물과 자신을 결부시키고 동일시하는 것을 포기하면, 멀지 않아 그대의 본질적인 존재와 마주칠 것이다."
소유의식은 내면의 환상, 내면의 꿈이며 잠이다. 그대가 어디에 있건 아무것도 단념할 필요가 없는 것, 이것이 진정한 포기의 의미이다. 그대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포기는 그대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대는 사물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소유할 수는 없다. 그대는 이 지구상에 영원히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소유할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
어떤 것을 이용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할 수는 있다. 자신을 이용하도록 허락해준 사물에 대해 그대는 감사해야 한다. 그 사물은 유용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포기이다. 진정한 포기는 소유한 물건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식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
이제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보자.
'아들이 죽었는데 비통해 하지 않는다.'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을 때 슬퍼하지 않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그대가 본질적인 어떤 것을 알았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그대가 불사(不死)의 어떤 것을 맛 보았을 때, 이 가변적이고 우연적인 세상을 초월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일반적인 경우, 이것이 우리의 논리이다.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에 잠겨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오류이다. 그 논리의 밑바닥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그대는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어떤 사람을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때에는 매우 슬퍼할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도록 하라.
그대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었다고 가정하자.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들을 전체적으로 사랑했다면 그대는 아무런 미련이나 슬픔없이 작별을 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경험은 완전한 것이었고 완전히 이루어졌다. 행해지지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경험이 완벽하게 이루어졌을 때, 그대는 쉽게 안녕을 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원했던 만큼 그들을 사랑하지 못했다면, 그대가 원했던 만큼 그들을 존경하지 못했다면 그대는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이제 아버지는 가고 없다. 이제는 그대의 사랑을 충족시킬 방도가 없다. 이젠 그대의 존경과 사랑을 나타낼 길이 없다.
그대는 이도저도 아닌 지점에 어중간하게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대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그대는 아무 미련 없이 작별을 고할 수 없다. 그대는 비통함에 잠겨 눈물을 흘리며 울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슬프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그대가 슬퍼하는 것은 이제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문이 닫혔고 그대는 기회를 놓쳤다.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은 아들은 더 비통하게 울 것이다.
"내 인생에도 아들이 없었던 때가 있었소, 아들이 없어도 나는 행복했소. 얼마 후 아들이 태어났고, 나는 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소. 그런데 이제 그는 죽었소. 나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과 똑같은 상황으로 돌아간 것이오. 아들이 없었을 때에도 나는 행복했소. 그러니 왜 내가 비통해야 한단 말이오? 한 때 나는 아버지가 아니었고 그 때에도 매우 행복했소. 그러다가 아들이 태어나면서 아버지가 되었소. 이제 나는 아버지가 되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간 것 뿐이오. 그러니 비통해 할 이유가 없소."
그대는 예전과 똑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대는 존재하지도 않았었고, 그때에 대해 불행했던 기억이 없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그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왜 걱정하는가? 그대는 똑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걱뿐이다.
선(禪)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의 진면목을 발견하라.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네가 죽은 다음에도 있을 그 진면목을 발견하라.'
영원한 것을 찾아라. 일시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 부대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그대는 세상을 초월한다. 아무데로도 갈 필요가 없다. 부대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도록 경계하라. 그대의 의식을 제외한 모든 것은 부대적인 것이다.
그대의 각성을 제외한 모든 것이 부대적이다. 고통과 기쁨, 성공과 실패, 명예와 불명예, 이 모든 것이 일시적인 것이다. 오직 그대의 주시하는 의식만이 영원하다. 그 의식을 잡아라! 그 의식 안에 더 깊이 뿌리를 내려라.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라.
나는 그것들을 버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그대의 집, 부인, 자식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모든 관계는 일시적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들이 함께 있는 것은 영원한 상태가 아니다. 시작이 있었듯이 끝이 있을 것이다.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도 그대가 행복했었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러면 그 일이 끝날 때에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시금석으로 삼아라. 그러면 그대는 언제나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비본질적인 것인지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존재하는 것이 진리이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비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