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_19 여기에도 신은 있다
원문
몇 명의 방문객이 뜻하지 않게 헤라클레이토스를 찾아갔을 때 그는 불가에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여기에도 신은 있다."
나는 나 자신을 탐구했다.
시간은 장기를 두는 아이와 같으니, 왕권이 그의 것이다.
광신은 신격화된 질병이다.
원문 이해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지식을 빌려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대 자신을 탐구하는 것이다. 물론 빌려 오는 것은 쉽다. 그러나 빌려 온 것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이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진리는 그대의 것이 되어야 한다.
내가 진리를 안다 해도 그것을 그대에게 전해줄 수는 없다. 전해 주는 가운데 그것은 거짓이 된다. 이것이 진리의 본성이다. 아무도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진리는 빌려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훔칠 수도 없고 돈으로 살 수도 없다. 그대 스스로 알아야 한다. 그대 스스로 알지 못하는 한 그대의 지식은 앎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무지를 가리는 위장책에 불과하다. 그대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며, 완전히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이다.
진리는 살아 있는 현상이다. 이것을 첫 번째로 기억해야 한다. 누가 그대를 대신해 살아 주겠는가? 그대 스스로 살아야 한다. 아무도 그대를 대신해 살아 줄 수 없다. 다른 사람이 그대를 대신해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대 스스로 사랑해야 한다.
진리는 그대 스스로 살면서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진리는 밖에 있지 않다. 진리는 그대의 내면에서 성장한다. 진리는 물건이나 대상이 아니다. 진리는 그대의 추체성이다.
진리는 그대를 해방시키지만 거짓은 감옥이 된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광신은 신격화된 질병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결코 광신자가 되지 않는다. 그는 이론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는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진리가 다차원적인 얼굴을 갖고 있으며, 그 얼굴을 바라보는 방식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안다. 어떤 사람이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때 그가 보는 것은 모두 개인적인 것이다. 이 개인적인 시각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와 똑같은 사람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개인적인 시각은 독창적이다. 모든 시각, 진리와의 만남 모두가 독특하다.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진리로 가는 길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는 진리의 얼굴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편협한 광신도가 될 수 있겠는가? 그가 "나의 진리만이 진짜다. 나의 신만이 진짜 신이다. 당신의 신은 가짜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말은 진리를 빌려 온 사람들의 말이다. 세상에는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탐구한 적이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진리를 놓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다차원적인 경험, 진리의 다양성을 놓치겠는가? 어떻게 "오로지 나의 진리는 진짜다!" 하고 외칠 수 있겠는가? 진리를 아는 사람은 '나' 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어떻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수 있겠는가? 어떻게 광신자가 되겠는가?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한다.
"여기에도 신은 있다."
그는 사원에 가지 않았다. 보는 눈을 갖고 있다면, 듣고 느낄 수 있다면 굳이 사원에 갈 필요가 있는가? 이 자리에도 신은 있다.
신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다.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존재계 자체가 신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여기에도 신은 있다" 고 말한다. 이것을 느낄 수 있다면 매순간이 신성하고, 모든 것이 성스럽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성하다. 이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교회에 가고 절에 가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변화가 필요한 것은 그대이지 상황이 아니다. 상황은 똑같다. 절 밖에도 절 안에도 신은 있다. 신은 어디에나 있다. 그런데 그대는 이것을 보지 못하고 장소를 바꾼다. 그대는 집을 떠나 사원에 가서 신을 찾는다.
내적인 변형이 필요하다. 상황을 바꾸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심리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사물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그러면 돌연 세상 전체가 사원이 된다. 사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왕권은 아이의 것이며, 시간은 장기를 두는 어린아이와 같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짤막한 문장 속에 '릴라(leela)' 즉 유희라는 개념을 압축시켜 놓고 있다. 삶은 게임과 같다. 삶을 비즈니스로 만들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삶을 놓칠 것이다. 그대가 삶을 놓치는 것은 이 삶을 비즈니스로 만들기 때문이다. 삶은 놀이다. 놀이를 즐겨라. 무엇인가 달성하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어린아이처럼 되어라. 그는 놀이를 통해 무엇을 성취할 것인지 걱정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은 게임에서 져도 팔짝팔짝 뛰면서 즐거워한다. 놀이에서는 실패해도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삶이 놀이라면 져도 지는 것이 아니다. 반면, 삶이 비즈니스라면 승리해도 지는 것이다. 나폴레옹과 알렉산더를 보아라. 승리마저 패배다. 그들이 결국 무엇을 발견했는가? 아무리 이겨도 아무것도 성취되지 않는다. 간절하게 바라던 목적을 이룬 후에 느끼는 것은 좌절감뿐이다. 삶 전체를 잃은 것이다.
명심하라. 어떤 목적을 추구하면 삶 전체를 잃을 것이다. 삶에는 아무 목적도 없다. 삶은 목적 없는 놀이다. 삶은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다. 그저 삶 자체를 즐길 뿐이다.
이것은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의 마음은 수학적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삶의 목적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삶에는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다. 마음은 즉각 "삶에 아무 의미도 없다면 왜 사는가? 왜 자살하지 않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러나 보라. 의미가 있으면 모든 것이 추해진다. 삶이 사업처럼 된다. 목적이 있으면 삶 전체가 시(詩)를 잃어버린다.
삶에 시가 존재하는 것은 이 삶에 아무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장미꽃은 왜 피어나는가? 장미꽃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도 모른다. 하지만 피어나는 것 자체가 아름답지 않은가? 왜 이유를 알아야 하는가? 피어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다."
새들에게 왜 노래하는지 물어 보라. 새들은 이렇게 터무니없는 질문을 하는 그대를 보고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노래하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다.
이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왜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가? 마음은 목적을 추구한다. 항상 무엇인가 성취하려고 한다. 마음은 단순하게 즐기지 못한다. 장래에 성취해야 할 무엇인가 있어야 한다. 도달할 목적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마음이 편안함을 느낀다. 아무것도 성취할 것이 없을 때 마음은 제풀에 지쳐 쓰러진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기울여야 하는 모든 노력이다. 마음이 쓰러지게 하라.
삶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다. 도달할 목적지가 없다. 지금 이 순간 존재계 전체가 즐거움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그대를 제외한 우주 만물이 축제를 벌이고 있다. 왜 여기에 동참하지 않는가? 왜 목적 없이 피어나는 꽃이 되지 않는가? 왜 의미 없이 흐르는 강처럼 되지 못하는가? 왜 포효하는 바다, 즐거움에 넘실대는 바다처럼 되지 못하는가?
시간에 대해서도 헤라클레이토스는 수학적 이론을 전개하지 않는다. 그는 시간이 장기를 두는 아이와 같다고 말한다. 낮과 밤이 움직인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시간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간다고 믿지 않는다. 시간은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수레바퀴와 같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시간이 직선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면의 세계를 아는 사람들은 시간이 수레바퀴와 같다고 말한다. 시간은 직선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원을 그리며 돈다. 과학자들이 시간을 직선적인 것으로 보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 그들은 전체를 보지 못한다. 부분을 볼 뿐이다. 과학적인 마음은 모든 것을 분류하고 세분화시킨다. 그래서 과학자는 부분만을 본다.
그리고 이 부분마저 더 작은 부분으로 나눈다. 그는 계속해서 나눈다. 그는 전체를 볼 수 없다. 과학의 원리 자체가 그로 하여금 한 부분을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든다. 그는 점점 더 분명히 보게 되는 반면 점점 더 부분에 국한된다. 그의 시각은 명확하고 치밀해지지만 대상물은 점점 더 작아진다. 그리하여 그는 가장 작은 부분인 원자에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시간에서는 가장 작은 부분인 '찰나' 에 도달한다.
원의 극히 일부만 놓고 보면 직선처럼 보인다. 그러나 원은 광대하다. 이 지구와 같다. 땅 위에서 선을 긋고 그 선을 직선으로 생각한다면 그대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둥근 지구 위에서 어떻게 직선을 그을 수 있겠는가? 그 선을 계속 연장하면 곡선이 될 것이다. 지구 전체를 돌아 하나의 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직선은 이 거대한 원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은 전체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시간이 직선적인 것으로 보인다. 종교는 전체를 본다. 과학은 숲을 못 보고 나무를 보지만, 종교는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본다. 전체를 보면 모든 것이 원형(圓形)이다. 시간 또한 원을 그리며 움직인다. 시간은 게임이다. 아무 데로도 가지 않고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게임이다. 이것을 알면 마음의 긴장이 떨어져 나간다. 미래의 어딘가에 도달한다는 것이 무의미해진다. 이때 그대는 순간을 즐기기 시작한다.
삶은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달성하려는 노력이 아니다. 삶은 즐거운 축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