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어느 날 마조가 강서(江西)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승이 계신 곳을 들렀다. 마조가 향을 사르고 엎드려 절하자, 회야은 이런 게송을 읊었다.
"나는 그대가 집에 가지 않기를 충고한다.
그대가 간다해도 도(道)는 움직이지 않는다.
옆집에 사는 늙은 여인은 그대의 어린 시절 이름을 부르리라."
마조는 스승의 충고를 받아들여 다시 태어난다 해도 집에는 가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후 오직 강서에만 머물렀는데, 사방에서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어느 날 대매(大梅)라는 승려가 처음으로 마조를 친견하고 나서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현재의 이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是佛)."
이 말을 듣고 대매는 문득 깨달았다. 이후 그는 대매산으로 돌아가 몇 년이 지나도록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어느 날 마조는 한 승려를 보내 그를 시험해 보도록 했다.
승려가 대매에게 물었다.
"도대체 마조 스님께 무슨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대매가 말했다.
"현재의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을 들었지."
"그런데 요즘 들어 마조 스님의 말씀이 좀 달라지셨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단 말인가?"
"이제 마조 스님은 이 마음 자체는 마음도 부처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非心非佛)"
대매가 말했다.
"그 늙은이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짓을 언제까지 그만둘까? 그가 아무리 '비심비불(非心非佛)'을 말한다 해도 나는 오로지 '즉심즉불(卽心卽佛)'일 뿐이다."
승려가 돌아와 마조에게 사실을 이야기하자 마조가 말했다.
"매실이 다 익었구나!
원문 이해
회양은 마조에게 집에 가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이제 마조에게 집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 그대는 집이 없다. 육체조차 그대의 집이 아니다. 이젠 온 우주가 그대의 집이다. 그러니 가끔씩 집에 들르는 낡은 습관을 버려라. 그대에게는 더 이상 집이 없다. 그대는 아무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자유롭게 떠다니는 구름처럼 집이 없다.
회양은 말한다.
"그대가 내 충고를 듣지 않고 여전히 집에 가기를 고집한다면 이것을 명심하라. 그대의 도(道), 그대 내면의 붓다는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다. 그대의 죽은 몸, 시체가 가고 있을 뿐이다. 그대의 진정한 존재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아무 곳으로도 가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지금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어린 시절 이름을 부르리라."
그의 옆집에 사는 노파는 그를 마조로 부르지 않을 것이다.
고향 사람들은 위대한 스승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마씨네 집 아이일 뿐이다. 그들은 그가 태어나 자라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들은 그가 붓다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붓다에 대한 중대한 모욕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 말은 들은 마조는 말한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집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집 없는 본성, 홀로 있는 본성을 이해했다.
"현재의 이 마음이 곧 부처다."
마음은 결코 현재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마음은 항상 과거나 미래에 존재한다. 현재에는 빈 마음이 있을 뿐이다. 만일 긍정적인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현재의 마음, 곧 '즉심(卽心)'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부정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싶다면 '무심(無心)'이라는 말을 써도 무방하다. 진리는 긍정과 부정 어느 쪽으로도 표현될 수 없다. 즉심은 곧 무심을 의미한다. 현재를 이해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마음이 사라진다. 마음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을 수 있지만 현재에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은 곧 마음의 사슬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이 마음 자체는 마음도 부처도 아니다."
"현재의 이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말과 똑 같은 말이다. 대매는 마조가 표현 방식을 긍정에서 부정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대는 대매가 스승인 마조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는 마조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대매는 전적으로 스승의 말에 동의한다. 대매는 이 말이나 저 말이나 똑같은 뜻이라는 것을 안다. 마조는 다만 긍정에서 부정으로 표현 방식을 바꾸었을 뿐이다. 오직 표현 방식이 바뀌었을 뿐, 표현된 내용은 변함이 없다.
마조는 대매가 깨달았다는 것을 알았다. 깨닫지 못했다면 대매는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깨닫지 못한 마음은 긍정과 부정이 똑같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긍정과 부정이 모순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
'마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화_24 소를 돌보고 있습니다 (0) | 2019.06.15 |
---|---|
선화_23 부처는 펼친 손과 같고, 도는 주먹과 같다 (0) | 2019.06.14 |
선화_22 어제 너는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었는가? (0) | 2019.06.14 |
선화_20 불성(佛性)의 씨앗 (0) | 2019.06.13 |
선화_19 기왓장이 거울이 될 수 없다면 좌선으로 부처가 되겠는가? (0) | 2019.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