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당나라 때, 중국인 또는 웃는 부처라고 불리는 건장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포대(布袋)였다. 그는 자신을 선사(禪師)라고 여기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선사라고 부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연히 그는 주위에 제자를 거느리는 것도 싫어했다.
대신에 그는 사탕과 과일, 과자가 든 자루를 등에 메고 거리를 돌아 다녔다. 그리곤 주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곤 했다.
선의 수행자들을 만날 때마다 그는 손을 내밀고 '한 푼 줍쇼."라고 말하곤 했다. 누가 그의 사찰에 와서 설법을 부탁해도 그는 '한 푼 줍쇼.'라고 말했다.
어느 날, 그가 자루를 메고 여느 때처럼 거리를 순례하는데 어떤 선사가 우연히 그를 발견하곤 물었다.
"선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오?"
그러자 포대는 즉시 무언의 대답으로 메고 있던 자루를 땅에 내려 놓았다.
선사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선이 이루는 바가 무엇이오?"
말이 끝나자마자, 즉시 포대는 다시 자루를 어깨에 메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원문 이해
웃음은 종교의 본질이다. 심각함은 결코 종교적인 것이 아니며, 종교적인 것이 될 수도 없다. 심각함은 에고이며 일종의 병이다. 그러나 웃음에는 에고가 없다.
그대의 웃음과 종교적인 사람의 웃음에는 차이가 있다. 그대는 항상 다른 사람을 보고 웃는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그 자신, 또는 모든 인간의 우스꽝스러움을 보고 웃는다.
종교는 삶의 축제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심각한 사람은 불구자가 된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장애물을 만든다. 그는 춤추고 노래하지 못하며 삶을 축하하지도 못한다. 그의 삶에서 축복의 차원은 사라진다. 그는 사막처럼 황폐해진다.
그대는 사막처럼 황폐하면서도 자신을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대는 특정 종교단체에 속해있을지는 모르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대는 기독교인, 힌두교인, 불교인, 자이나교인, 이슬람 교인이 될 수는 있지만 종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대는 어떤 것을 믿고 있을 뿐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대는 교리를 믿는다. 그리고 이론의 무게에 억눌린 사람은 심각해진다. 짐을 벗은 사람, 이론을 짊어지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웃음을 터뜨린다.
웃음만이 존재계에 대한 유일한 응답이다. 오로지 웃음만이 진정한 기도이며 감사이다.
웃음은 꽃이다. 붓다가 씨앗이라면 포대는 그 나무에 만개한 꽃이다. 붓다가 뿌리라면 포대는 그 나무의 꽃이다. 붓다를 이해하고 싶다면 포대를 이해하도록 하라. 사람들이 포대를 '웃는 붓다'라고 부른 것은 옳다. 붓다는 포대에 이르러 꽃이 되었다. 붓다는 포대 안에서 웃는다. 포대 안에서 깨달음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포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축제의 차원에 존재해야 한다. 이론과 학설, 개념, 교리, 철학에 얽매여 있다면 그대는 이 포대라는 인물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포대는 그대를 보고 웃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그토록 어리석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포대는 그대를 보고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이론과 학설, 교리와 철학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은 마치 음식을 요리할 생각은 않고 요리책을 먹으려는 것과 같다. 그대는 요리책을 공부하며 내내 굶주림에 시달린다. 그대는 인간이 책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사람들은 성경과 코란, 법구경, 바가바드 기타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그들은 종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다.
종교는 음식처럼 그대 안에서 소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는 그대의 피 속을 순환하여 그대의 뼈가 되고 살이 되어야 한다. 그것에 대해 생각만 해서는 안된다.
생각은 그대의 가장 표피적인 부분이다. 그대는 종교를 안으로 빨아들이고 흡수해야 한다!
진리가 태어나면 즉시 학자들이 모여든다. 교수와 철학자, 신학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진리를 부숴버린다. 그들은 죽은 경전과 사상의 틀 안에 진리를 집어넣고 마음대로 주므른다. 싱싱하게 살아있던 꽃이 조화가 되어버린다. 진짜 장미꽃은 사라진다.
자, 포대의 이야기를 보자.
웃음은 그대 내면의 근원에서부터 어떤 에너지를 표면으로 날라다준다.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하고 마치 그림자처럼 웃음이 뒤따른다.
진정으로 웃을 때, 그대는 깊은 명상의 상태를 경험한다. 그 순간에 생각이 멈춘다. 웃음과 생각을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웃거나 생각하거나 둘 중 하나만을 할 수 있다. 진정으로 웃는다면 생각이 멈춘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속으로 생각이 흐르고 있다면 그대의 웃음은 절름발이가 될 것이다.
진정으로 웃을 때, 돌연 마음이 사라진다. 선에서 사용하는 모든 방법은 어떻게 하면 무심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웃음은 무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아름다운 입구들 가운데 하나이다.
웃는 이유를 묻지 말라! 특별한 이유는 없다. 하룻밤이 지났느데 그대는 여전히 살아서 침대 위에 있다.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그것은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그대가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세상 역시 변한 것 없이 거기에 있다.
그대의 부인은 여전히 그대 옆에서 코를 골고 있으며, 똑같은 방, 똑같은 집이 거기에 있다. 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최소한 하룻밤만큼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 우유배달부가 다녀가는 소리, 차가 지나가는 소리, 똑같은 소음이 들려오고 있다. 그것은 웃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느 날엔가 그대는 아침을 맞지 못할 것이다. 우유배달부가 문을 두드리고 부인이 코를 골아도 그대는 그 자리에 없을 것이다. 엔젠가 죽음이 그대를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 문을 두드리기 전에 웃어라! 시간이 있을 때 웃어라!
이 우스운 세상을 보라. 다시 똑같은 날이 시작되고 있다. 그대는 평생동안 똑같은 일을 해 왔다. 오늘 아침도 그대는 슬리퍼를 신고 화장실로 달려갈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그대는 이를 닦고 세수를 한다. 무엇을 위해서? 어디에 가려고? 그대는 옷을 입고 사무실로 달려간다. 무엇을 위해서? 단지 내일도 똑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우스운 세상을 보라. 그리고 웃어라. 아침에 잠이 깨면 눈을 뜨지 말라. 잠이 달아났다고 느끼는 순간, 제일 먼저 웃기 시작하라. 그러면 그 웃음이 하루 종일 지속될 것이다. 아침 일찍 웃으면 그대는 하루 종일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웃음은 연쇄효과를 일으킨다. 아침의 웃음은 더 많은 웃음을 가져 온다.
포대는 어린아이와 노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어린애로 취급했다.
그는 그들에게 장남감을 나누어 주곤 했다. 여기엔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세상은 장난감일 뿐!이라는 말보다 더 정확한 말은 없다. 그대가 삶이라고 생각하는 삶은 진짜가 아니다. 그것은 가짜이다. 그 삶은 덧없는 꿈이다.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
포대는 선의 수행자들을 만날 때 마다 '한 푼만 줍쇼.'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명상은 나누어줌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니 한 푼만 달라. 그대가 명상적인 사람이라면 무엇인가 나누어 준다. 그대는 축적하지 않는다. 그대는 구두쇠가 아니다. 그대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없을 때에도 세상은 여기에 있었다. 어느 날엔가 그대는 여기에 없을 것이지만 그때에도 세상은 여전히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주인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무엇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죽음이 문을 두드리기 전에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 주어라. 그대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줄 아는가? 그렇다면 그 노래를 나누어 주어라. 그대는 그림을 그릴 줄 아는가? 그렇다면 그림을 나누어 주어라. 춤을 출 수 있다면 그 춤을 나누어 주어라. 그대가 무엇을 갖고 있든지 모두 나누어 주어라.
'선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
그러자 포대는 사탕과 과자, 장난감이 든 자루를 내려 놓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은 포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루를 내려놓음으로써 그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내려 놓았다. 그 순간에 그가 소유한 것은 자루가 전부였다.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그 자루는 비본질적인 부분이었다. 그는 그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그 다음엔 본질적인 부분만 남는다. 자루가 유일하게 비본질적인 부분이었다. 그는 그것을 땅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는 무언(無言) 속에서 '선은 세상에 대한 완전한 포기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선은 비본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 자루처럼! 그러나 그것은 말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인 것이었다.
선사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선이 이루는 바가 무엇이오?"
말이 끝나자 마자, 이 행복한 중국인은 다시 자루를 어깨에 메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포대는 말한다.
"우리는 세상을 포기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도망치지는 않았다. 이것이 선이 이루는 바이다. 우리는 세상을 포기했지만 여전히 세상 속에 있다."
선에서는, 도피는 포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집착하지 말라.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라.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는 존재할 수는 없다.
이 세상이 유일한 곳이다. 다른 세상은 없다. 그러므로 사원과 수도원, 히말라야의 동굴 속아 앉아 있는 승려, 사두들은 단지 도망자일 뿐이다.
포기하라! 도망칠 필요는 없다. 포기하라. 하지만 여기에 존재하라. 세상 속에 존재하라.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는 말라. 군중 속에 있으되 홀로 남아라. 필요한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라. 그러나 행위자가 되지는 말라. 에고를 긁어모으지 말라. 그것이 전부이다!
선의 본질은 포기이다. 그리고 선의 현실적인 모습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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