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당나라 때, 중국인 또는 웃는 부처라고 불리는 건장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포대(布袋)였다. 그는 자신을 선사(禪師)라고 여기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선사라고 부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연히 그는 주위에 제자를 거느리는 것도 싫어했다.

대신에 그는 사탕과 과일, 과자가 든 자루를 등에 메고 거리를 돌아 다녔다. 그리곤 주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곤 했다.

선의 수행자들을 만날 때마다 그는 손을 내밀고 '한 푼 줍쇼."라고 말하곤 했다. 누가 그의 사찰에 와서 설법을 부탁해도 그는 '한 푼 줍쇼.'라고 말했다.

어느 날, 그가 자루를 메고 여느 때처럼 거리를 순례하는데 어떤 선사가 우연히 그를 발견하곤 물었다.

"선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오?"

그러자 포대는 즉시 무언의 대답으로 메고 있던 자루를 땅에 내려 놓았다.

선사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선이 이루는 바가 무엇이오?"

말이 끝나자마자, 즉시 포대는 다시 자루를 어깨에 메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원문 이해

 

웃음은 종교의 본질이다. 심각함은 결코 종교적인 것이 아니며, 종교적인 것이 될 수도 없다. 심각함은 에고이며 일종의 병이다. 그러나 웃음에는 에고가 없다.

그대의 웃음과 종교적인 사람의 웃음에는 차이가 있다. 그대는 항상 다른 사람을 보고 웃는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그 자신, 또는 모든 인간의 우스꽝스러움을 보고 웃는다.

종교는 삶의 축제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심각한 사람은 불구자가 된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장애물을 만든다. 그는 춤추고 노래하지 못하며 삶을 축하하지도 못한다. 그의 삶에서 축복의 차원은 사라진다. 그는 사막처럼 황폐해진다.

그대는 사막처럼 황폐하면서도 자신을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대는 특정 종교단체에 속해있을지는 모르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대는 기독교인, 힌두교인, 불교인, 자이나교인, 이슬람 교인이 될 수는 있지만 종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대는 어떤 것을 믿고 있을 뿐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대는 교리를 믿는다. 그리고 이론의 무게에 억눌린 사람은 심각해진다. 짐을 벗은 사람, 이론을 짊어지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웃음을 터뜨린다.

 

웃음만이 존재계에 대한 유일한 응답이다. 오로지 웃음만이 진정한 기도이며 감사이다.

웃음은 꽃이다. 붓다가 씨앗이라면 포대는 그 나무에 만개한 꽃이다. 붓다가 뿌리라면 포대는 그 나무의 꽃이다. 붓다를 이해하고 싶다면 포대를 이해하도록 하라. 사람들이 포대를 '웃는 붓다'라고 부른 것은 옳다. 붓다는 포대에 이르러 꽃이 되었다. 붓다는 포대 안에서 웃는다. 포대 안에서 깨달음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포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축제의 차원에 존재해야 한다. 이론과 학설, 개념, 교리, 철학에 얽매여 있다면 그대는 이 포대라는 인물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포대는 그대를 보고 웃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그토록 어리석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포대는 그대를 보고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이론과 학설, 교리와 철학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은 마치 음식을 요리할 생각은 않고 요리책을 먹으려는 것과 같다. 그대는 요리책을 공부하며 내내 굶주림에 시달린다. 그대는 인간이 책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사람들은 성경과 코란, 법구경, 바가바드 기타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그들은 종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다.

종교는 음식처럼 그대 안에서 소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는 그대의 피 속을 순환하여 그대의 뼈가 되고 살이 되어야 한다. 그것에 대해 생각만 해서는 안된다.   

생각은 그대의 가장 표피적인 부분이다. 그대는 종교를 안으로 빨아들이고 흡수해야 한다!

진리가 태어나면 즉시 학자들이 모여든다. 교수와 철학자, 신학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진리를 부숴버린다. 그들은 죽은 경전과 사상의 틀 안에 진리를 집어넣고 마음대로 주므른다. 싱싱하게 살아있던 꽃이 조화가 되어버린다. 진짜 장미꽃은 사라진다.

자, 포대의 이야기를 보자.

웃음은 그대 내면의 근원에서부터 어떤 에너지를 표면으로 날라다준다.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하고 마치 그림자처럼 웃음이 뒤따른다.

진정으로 웃을 때, 그대는 깊은 명상의 상태를 경험한다. 그 순간에 생각이 멈춘다. 웃음과 생각을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웃거나 생각하거나 둘 중 하나만을 할 수 있다. 진정으로 웃는다면 생각이 멈춘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속으로 생각이 흐르고 있다면 그대의 웃음은 절름발이가 될 것이다.

진정으로 웃을 때, 돌연 마음이 사라진다. 선에서 사용하는 모든 방법은 어떻게 하면 무심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웃음은 무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아름다운 입구들 가운데 하나이다.

웃는 이유를 묻지 말라! 특별한 이유는 없다. 하룻밤이 지났느데 그대는 여전히 살아서 침대 위에 있다.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그것은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그대가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세상 역시 변한 것 없이 거기에 있다.            

그대의 부인은 여전히 그대 옆에서 코를 골고 있으며, 똑같은 방, 똑같은 집이 거기에 있다. 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최소한 하룻밤만큼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 우유배달부가 다녀가는 소리, 차가 지나가는 소리, 똑같은 소음이 들려오고 있다. 그것은 웃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느 날엔가 그대는 아침을 맞지 못할 것이다. 우유배달부가 문을 두드리고 부인이 코를 골아도 그대는 그 자리에 없을 것이다. 엔젠가 죽음이 그대를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 문을 두드리기 전에 웃어라! 시간이 있을 때 웃어라!

이 우스운 세상을 보라. 다시 똑같은 날이 시작되고 있다. 그대는 평생동안 똑같은 일을 해 왔다. 오늘 아침도 그대는 슬리퍼를 신고 화장실로 달려갈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그대는 이를 닦고 세수를 한다. 무엇을 위해서? 어디에 가려고? 그대는 옷을 입고 사무실로 달려간다. 무엇을 위해서? 단지 내일도 똑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우스운 세상을 보라. 그리고 웃어라. 아침에 잠이 깨면 눈을 뜨지 말라. 잠이 달아났다고 느끼는 순간, 제일 먼저 웃기 시작하라. 그러면 그 웃음이 하루 종일 지속될 것이다. 아침 일찍 웃으면 그대는 하루 종일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웃음은 연쇄효과를 일으킨다. 아침의 웃음은 더 많은 웃음을 가져 온다.

포대는 어린아이와 노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어린애로 취급했다. 

 

그는 그들에게 장남감을 나누어 주곤 했다. 여기엔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세상은 장난감일 뿐!이라는 말보다 더 정확한 말은 없다. 그대가 삶이라고 생각하는 삶은 진짜가 아니다. 그것은 가짜이다. 그 삶은 덧없는 꿈이다.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

포대는 선의 수행자들을 만날 때 마다 '한 푼만 줍쇼.'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명상은 나누어줌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니 한 푼만 달라. 그대가 명상적인 사람이라면 무엇인가 나누어 준다. 그대는 축적하지 않는다. 그대는 구두쇠가 아니다. 그대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없을 때에도 세상은 여기에 있었다. 어느 날엔가 그대는 여기에 없을 것이지만 그때에도 세상은 여전히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주인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무엇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죽음이 문을 두드리기 전에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 주어라. 그대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줄 아는가? 그렇다면 그 노래를 나누어 주어라. 그대는 그림을 그릴 줄 아는가? 그렇다면 그림을 나누어 주어라. 춤을 출 수 있다면 그 춤을 나누어 주어라. 그대가 무엇을 갖고 있든지 모두 나누어 주어라.

'선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

그러자 포대는 사탕과 과자, 장난감이 든 자루를 내려 놓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은 포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루를 내려놓음으로써 그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내려 놓았다. 그 순간에 그가 소유한 것은 자루가 전부였다.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그 자루는 비본질적인 부분이었다. 그는 그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그 다음엔 본질적인 부분만 남는다. 자루가 유일하게 비본질적인 부분이었다. 그는 그것을 땅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는 무언(無言) 속에서 '선은 세상에 대한 완전한 포기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선은 비본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 자루처럼! 그러나 그것은 말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인 것이었다.

선사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선이 이루는 바가 무엇이오?"

말이 끝나자 마자, 이 행복한 중국인은 다시 자루를 어깨에 메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포대는 말한다.

"우리는 세상을 포기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도망치지는 않았다. 이것이 선이 이루는 바이다. 우리는 세상을 포기했지만 여전히 세상 속에 있다."

선에서는, 도피는 포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집착하지 말라.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라.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는 존재할 수는 없다.

이 세상이 유일한 곳이다. 다른 세상은 없다. 그러므로 사원과 수도원, 히말라야의 동굴 속아 앉아 있는 승려, 사두들은 단지 도망자일 뿐이다.

                     

포기하라! 도망칠 필요는 없다. 포기하라. 하지만 여기에 존재하라. 세상 속에 존재하라.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는 말라. 군중 속에 있으되 홀로 남아라. 필요한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라. 그러나 행위자가 되지는 말라. 에고를 긁어모으지 말라. 그것이 전부이다!

선의 본질은 포기이다. 그리고 선의 현실적인 모습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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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위나라에 동문오(東問吳)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들이 죽어도

비통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부인이 그에게 말했다.

"세사에 당신만큼

아들을 사랑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막상 그가 죽고 나니

슬퍼하는 기색도 없군요."

그다 대답했다.

"나에겐 아들이 없었던 시기가 있었소.

아들이 없었을 때 나는 슬퍼하지 않았소.

이제 그가 죽었으니 아들이 없었던 때로

다시 돌아간 것뿐이오.

그러니 내가 왜 슬퍼해야 한단 말이오?"

 

원문 이해

 

20세기는 부대적인 것이 가장 횡행하는 시대이다.   

인간은 '나의 것', '나의 소유물'에 너무 집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했다. 사람들은 '나(I)'를 잊었으며, '나의 것(my)'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나의 것'이 더 중요하게 될 때, 사람들은 부대적인 것에 더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나(I)'가 더 중요한 위치에 남아있을 때에 '나의 것(my)'은 충실한 하인일 뿐이다. 그때에는 그대가 주인이다. 그대는 노예가 아니다. 주인이 될 때, 그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된다.

이렇듯 순수한 '나'가 존재하는 본처(本處)를 선(禪)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부른다. 이 '나'는 에고와 아무 관계도 없다. 에고는 모든 비본질적인 소유물의 중심일 뿐이다. 에고는 '나의 것'이 축적된 것이다.

내 집, 내 차, 나의 신분, 나의 종교, 나의 경전, 나의 도덕성, 나의 성격, 나의 가족, 나의 유산, 나의 전통. 이 모든 '나의 것'들은 계속해서 축적되고 에고로써 굳어진다.

선(禪)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의 진면목을 발견하라.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 본래 얼굴을 발견하라. 네가 죽어서도 다시 가지게 될 그 얼굴을 발견하라.'

'내 것'이라는 이 게임은 가장 어리석은 게임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런 게임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지구는 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대가 죽은 뒤에도 지구는 이 자리에 남을 것이다.

그대가 갖고 있는 다이아몬드는 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리고 그대가 죽은 뒤에도 있을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그대를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그대에게 소유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이 '소유의 게임'은 가장 바보 같은 게임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이런 게임이 전부이다.

구제프는 이렇게 말했다.

'사물과 자신을 결부시키고 동일시하는 것을 포기하면, 멀지 않아 그대의 본질적인 존재와 마주칠 것이다."

소유의식은 내면의 환상, 내면의 꿈이며 잠이다. 그대가 어디에 있건 아무것도 단념할 필요가 없는 것, 이것이 진정한 포기의 의미이다. 그대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포기는 그대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대는 사물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소유할 수는 없다. 그대는 이 지구상에 영원히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소유할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

어떤 것을 이용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할 수는 있다. 자신을 이용하도록 허락해준 사물에 대해 그대는 감사해야 한다. 그 사물은 유용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포기이다. 진정한 포기는 소유한 물건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식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

이제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보자.

'아들이 죽었는데 비통해 하지 않는다.'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을 때 슬퍼하지 않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그대가 본질적인 어떤 것을 알았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그대가 불사(不死)의 어떤 것을 맛 보았을 때, 이 가변적이고 우연적인 세상을 초월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일반적인 경우, 이것이 우리의 논리이다.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에 잠겨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오류이다. 그 논리의 밑바닥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그대는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어떤 사람을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때에는 매우 슬퍼할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도록 하라.

그대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었다고 가정하자.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들을 전체적으로 사랑했다면 그대는 아무런 미련이나 슬픔없이 작별을 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경험은 완전한 것이었고 완전히 이루어졌다. 행해지지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경험이 완벽하게 이루어졌을 때, 그대는 쉽게 안녕을 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원했던 만큼 그들을 사랑하지 못했다면, 그대가 원했던 만큼 그들을 존경하지 못했다면 그대는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이제 아버지는 가고 없다. 이제는 그대의 사랑을 충족시킬 방도가 없다. 이젠 그대의 존경과 사랑을 나타낼 길이 없다.

그대는 이도저도 아닌 지점에 어중간하게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대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그대는 아무 미련 없이 작별을 고할 수 없다. 그대는 비통함에 잠겨 눈물을 흘리며 울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슬프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그대가 슬퍼하는 것은 이제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문이 닫혔고 그대는 기회를 놓쳤다.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은 아들은 더 비통하게 울 것이다.

"내 인생에도 아들이 없었던 때가 있었소, 아들이 없어도 나는 행복했소. 얼마 후 아들이 태어났고, 나는 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소. 그런데 이제 그는 죽었소. 나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과 똑같은 상황으로 돌아간 것이오. 아들이 없었을 때에도 나는 행복했소. 그러니 왜 내가 비통해야 한단 말이오? 한 때 나는 아버지가 아니었고 그 때에도 매우 행복했소. 그러다가 아들이 태어나면서 아버지가 되었소. 이제 나는 아버지가 되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간 것 뿐이오. 그러니 비통해 할 이유가 없소."

그대는 예전과 똑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대는 존재하지도 않았었고, 그때에 대해 불행했던 기억이 없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그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왜 걱정하는가? 그대는 똑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걱뿐이다.

선(禪)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의 진면목을 발견하라.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네가 죽은 다음에도 있을 그 진면목을 발견하라.'          

영원한 것을 찾아라. 일시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 부대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그대는 세상을 초월한다. 아무데로도 갈 필요가 없다. 부대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도록 경계하라. 그대의 의식을 제외한 모든 것은 부대적인 것이다.

그대의 각성을 제외한 모든 것이 부대적이다. 고통과 기쁨, 성공과 실패, 명예와 불명예, 이 모든 것이 일시적인 것이다. 오직 그대의 주시하는 의식만이 영원하다. 그 의식을 잡아라! 그 의식 안에 더 깊이 뿌리를 내려라.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라.

나는 그것들을 버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그대의 집, 부인, 자식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모든 관계는 일시적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들이 함께 있는 것은 영원한 상태가 아니다. 시작이 있었듯이 끝이 있을 것이다.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도 그대가 행복했었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러면 그 일이 끝날 때에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시금석으로 삼아라. 그러면 그대는 언제나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비본질적인 것인지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존재하는 것이 진리이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비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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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양고조(梁高祖)가 금강경을 설명해 달라고

부대사(傅大士)를 초빙했다.

약속된 날이 되어 선사가 도착했다.

부대사는 단상에 올라가더니 앞에 놓인 책상을 꽝 내려쳤다.

그리고는 밑으로 내려와 아무 말 없이 떠났다.

얼마동안 황제는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지공(誌公)이 물었다.

"여쭙기 황송하지만 그를 이해하셨는지요?"

황제는 슬프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지공이 말했다.

"저런, 부대사가 그토록 자상하게 알려주었건만!"

 

원문 이해

 

금강경은 보석 중의 보석이다. 금강경은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말해진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 한 것 중 하나이다. 금강경에 있는 붓다의 말은 가장 소중한 것들이다.

금강경의 기본적인 관념은, '아무것도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삶은 불가해하다.          

삶은 아무리 설명해도 불충분하며, 모든 철학은 매우 협소하다는 것을 증명될 뿐이다. 삶의 하늘은 너무나 광대해서 어떠한 가설이나 이론으로 그 하늘을 제한할 수 없다.

금강경의 토대는,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자의 도덕경과 같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즉 말해진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진리를 말하면 그것은 거짓이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이해하란 말인가?

황제는 금강경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에게 묻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금강경, 또는 그런 종류의 경전은 완전히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대사는 단상을 꽝 내리쳤다. 이것이 금강경에 대한 그의 설명이었다. 그는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가?

그 첫 번째는, 진리는 행동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로는 충분치 않다. 황제가 선사의 걷는 모습을 잘 관찰했다면, 거기에 금강경에 대한 설명히 있었을 것이다.

선사는 아름답고 우아하며 품위 있게 걸었다. 그의 걸음걸이에 금강경에 대한 주석이 있었다. 그는 붓다처럼 걸었을 것이다. 그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붓다이다. 그는 붓다처럼 깨달음의 빛을 방사하고 있었다. 그는 궁전 안에 새로운 우주를 갖고 왔을 것이다. 그것은 생동감이 넘치는 우주였다. 그의 문은 열려 있었다.

황제에게 눈이 있었다면 그는 붓다가 왔음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지구 위를 걷고 있는 붓다였다.           

다만 모습과 이름만 달랐을 뿐이다. 그는 왜 단상을 내려쳤을까? 그는 황제가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황제의 의식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를 깨우기 위하여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가 금강경에 대해 입을 열었다면, 그는 자신이 금강경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폭로하는 격이 되었을 것이다.

금강경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금강경은 진리 자체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에 대해 입을 연다면 그것은 진리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금강경에 대한 주석이란 침묵 뿐이다. 황제에게 침묵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다면, 그는 금강경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갑자기 떠나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상의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진리를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이젠 더 이상 꾸물거리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황제는 충경 받았다. 잠시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옆에 있던 지공이 "여쭙기 황송하지만 그를 이해하셨는지요?" 라고 묻는다.

이 사람 지공은 대단한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선사의 행동이 암시하는 바를 이해했다. 그는 선사의 걸음걸이에서 우아함을 보았다. 그는 침묵 안에서 빛나는 깨달음의 광채를 보았다. 그는 선사의 눈이 자비로 가득차 있음을 보았다. 그는 산들바람처럼 조용하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황제가 안쓰러웠다.

           

"황제는 슬프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역사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 붓다, 예수, 차라투스트라, 크리슈나 같은 인물들이 세상에 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또한 그들을 이해하는 사람도 극소수이다. 황제는 군중의 상징이다. 황제는 다수의 대중을 의미한다.

붓다가 와서 이 세상을 거닌다. 그는 이 세상에 다른 세상을 가져온다. 그는 말로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져온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 부대사(傅大士)

서은 부, 이름은 흡(翕), 무주선혜(無州善慧), 쌍림대사(雙林大士), 동양거사라고도 불리며, 동토(東土)의 유마(維摩), 미륵(彌勒)의 화신으로 추앙되며 <선혜대사어록> 4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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