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갠지스 강에 몸을 담글 때에도 영원의 어머니에 대해 말한다. 깔리, 시간의 여신에 대하여.
간단한 말 한마디로도 무지와 불신을 물리칠 수 있나니, 깔리와 크리슈나는 하나다.
말은 다를지 모르지만 그 의미는 정확히 똑같다. 말의 장벽을 부순 자는 그 한계를 정복한다.
알라이든, 예수든, 모세이든 깔리든, 부자나 가난한 자나, 성자든 바보든,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하나이며 똑같다. 자신의 사상에 몰두해 있는 자.
그는 다른 사람에게 미친 사람으로 보이리라. 그는 삶의 해안가에 정박한 나룻배로 모든 사람을 초대하며, 두 팔을 활짝 벌려 세상을 환영한다.
원문 이해
바툴의 모든 탐구는 '새로운 인간'을 위한 것이다. 새로운 인간이란 어떤 사람인가?
사람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살 수 있다. 하나는 존재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자신을 지니는 인간이 되거나, 세속적인 것들을 소유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또는 많은 것들을 소유함으로 해서 그것들에 소유당하는 인간이 되거나, 자신을 지니면서 어떠한 것에도 소유되지 않는 인간이 될 수 있다.
바툴은 소유적인 인간을 세속적 인간이라고 부른다. 세속적인 인간은 돈과 생활용품, 은행잔고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는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많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근본적인 오류 중의 하나다. 온 세상을 가지면서도 거지로 남을 수 있다.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공허하다.
알렉산더 대왕은 세속적인 인간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전 세계를 정복하기 원했고, 거의 그 소망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 양손을 관 밖으로 내놓으시오."
신하들이 말했다.
"우리는 그런 풍습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장례 의식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폐하는 왜 그토록 불합리한 장례식을 원하십니까?"
알렉산더가 대답했다.
"그것이 내 삶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빈손으로 가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니 내 양손을 관 밖으로 내놓으라. 나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삶 전체가 낭비되었다."
존재적인 인간은 새로운 인간으로 불린다. 그를 새로운 인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존재적인 인간이 태어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붓다와 예수 같은 인물은 매우 드물게 태어난다. 이 케케묵은 대중속에서 진정한 존재를 지니고 나타나, 자신의 왕국이 내면에 있음을 선언하는 자는 드물다. 그러므로 바툴이 그를 새로운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
존재적인 인간, 새로운 인간은 즉흥적이고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그는 순간을 산다. 그는 지금 여기에 산다.
깔리는 '지금' 의 상징이다. 깔리는 영원을 상징한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사는 것,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이것이 새로운 인간으로 가는 길이다.
마음의 간섭 없이 조용하게 귀 기울인다면, 아는 자(깨달은 자)의 간단한 말 한 마디로도 무지와 불신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 보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많은 일들이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대는 여전히 똑같다. 의식은 똑같이 남아있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미래에 무슨 일이 발생할 수 있겠는가?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는 꿈이다.
실체를 꿰뚫어 볼 수 있다면, 모든 노력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있었다. 실체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실체는 생성을 모른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실체는 미래를 모른다. 그것은 이미 여기에 있다. 그것은 항상 여기에 있어 왔다. 그것을 보기만 하면 된다. 일단 그것을 보게 되면 모든 걱정과 고통이 사라진다. 무모한 노력을 그만두고 쉴 수 있다. 긴장이 사라지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즐기면서 행복을 맛볼 수 있다.
동양의 정의에 따르면 이렇다.
'생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꿈이다.
아무 사념도 없다면, 그때에는 무엇이든지 간에 모두 실체다.'
바툴은 노래한다.
"나에게 알려지지 않은 한 사람, 그리고 나, 우리 둘은 함께 산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그 한 사람을 바툴은 '본질적 인간' 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둘로 존재한다. 하나는 중심에 있는 본질적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주변에 있는 후천적 인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을 주변과 동일시한다. 어떻게 하면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본질적 인간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주시가 그 길이다. 무엇을 하던지 간에 주시자로 남으라. 자신을 기억하라. 길을 걸을 때에도 내면에는 걷지 않는 한 사람이 있음을 명심하라. 그는 길을 걸은 적이 없으며 그대와 함께 걸을 수도 없다. 그에겐 다리가 없다. 그가 바로 본질적 인간이다. 거기가 중심이다. 그 중심을 통해 보아야 실체를 알게 된다. 바툴이 노래하는 그 실체를 알게 된다.
자신의 영원한 근원, 자신의 영원성을 보게 되면, 삶의 영원성 또한 볼 수 있다.
중심에 존재한다면, 삶의 중심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원 주변에 머문다면 삶의 겉모습, 삶의 주변만을 볼 뿐이다.
원둘레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마차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바퀴는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러나 바퀴의 중심은 움직이지 않는다. 바퀴는 그 불변의 중심축 위에서 움직인다. 그 부동의 중심축 위에 바퀴의 운동이 존재한다.
그대 또한 이와 같다. 그대는 중심축을 갖는다. 그 중심축은 부동이다. 그와 동시에 바퀴처럼 계속 움직이는 정체성을 갖는다. 그대는 수많은 생 동안 먼 거리를 여행해 왔다. 바퀴는 수많은 길을 알고 있다. 그러나 중심축은 항상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두 가지 방법으로 실체를 관찰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겉 바퀴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매순간 변화한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중심축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그때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이 삶으 중심축을 발견할 수 있는가? 주시에 의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먹을 때는 먹어라. 그러나 내면에 먹지 않는 한 인물이 있음을 잊지 말라. 음식이 몸속에 들어간다. 그러나 의식은 그것을 지켜본다.
누군가 모욕을 하면 화가 치민다. 그러나 주시자로 남는다. 모욕은 외부에서 온 것이고 분노는 원둘레에서 솟아오른다. 여전히 중심에 남아 지켜보고 있다. 누군가 원 주변을 자극했고 그곳에 분노가 인다. 분노가 먹구름처럼 애워싼다.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면서 중심축에 있다. 원 주변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모욕과 분노는 외부에 있다. 그것들은 그대와 분리되어 있다.
생각은 이해의 부재(不在)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한다. 이해가 떠오를 때 생각은 사라진다. 이것은 장님이 길을 더듬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눈이 있을 때 길을 더듬지 않는다. 직접 길을 본다. 이해는 눈과 같다. 더듬지 않고 길을 본다. 그러나 생각은 더듬거린다. 뭐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계속 생각하고 추측한다. 생각은 옳은 답을 주지 못한다. 생각은 이미 알려진 것만 반복하기 때문이다. 생각은 미지(未知)의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모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다. 생각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한다. 되풀이해서 생각하고, 기존의 생각들을 엮어서 새롭게 구성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진실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해는 신선하고 새롭다. 이해는 과거와 아무 상관도 없다. 이해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이해는 실제에 대한 통찰력이다.
생각에는 수많은 의문이 생겨날 뿐 해답이 불가능하다. 어떤 해답을 찾았다고 느낄 때에도 그것은 진정한 해답이 아니다. 다만 어떤 방법으로 행동할 것을 결정했기 때문에 그 행동의 근거로써 해답이 필요해진다.
의존할 해답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해답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해답을 깊이 들여다보라. 그러면 그 해답으로부터 수많은 의문이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해에는 오직 해답이 있을 뿐 의문이 없다. 이해에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외부에서 차용한 것이다. 모든 생각은 타인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주의 깊게 관찰해 보라. 진정으로 자기 것이라고 여겨지는 생각,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을 찾을 수 있는가? 자신의 생각 모두가 빌려온 것이다. 그 생각들의 진원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생각들 모두가 남에게 빌려온 것이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 마음은 컴퓨터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해답을 내놓기 전에 컴퓨터에 자료를 입력해야 한다. 모든 정보를 제공해야한 컴퓨터는 해답을 내놓을 수 있다. 이것이 마음의 기능이다.
마음은 바이오컴퓨터다. 온갖 자료, 지식, 정보를 수집한다. 어떤 의문이 떠오르면 마음은 그 수집된 내용을 토대로 해답을 내놓는다. 이것은 진정한 응답이 아니다. 이미 죽어버린 과거로부터 나온 내용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해란 무엇인가? 이해는 순수한 지성이다. 이 순수한 지성은 본래 그대의 것이다.
우리는 이런 지성을 갖고 태어났다. 아무도 그대에게 지성을 줄 수 없다. 지식은 줄 수 있지만 지성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성은 그대 고유의 예리함이다. 명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예리하고 분명하게 만든다. 명상을 통해 그대가 빌려온 지식들을 버리고 자신의 존재를 회복한다. 자신의 본래면목, 순진무구함, 신선함이 명상을 통해 회복된다. 이 신선함을 통해 행동할 때 그 행동은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 전적으로 지금 여기에 대응한다. 이 대응은 상황의 도전에서 기인한 것이지, 과거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질문을 던질 때 그대는 어떻게 하는가? 해답을 찾기 위해 즉각 마음 안으로 들어간다. 온갖 지식이 수집되어 있는 마음의 지하실로 들어가 해답을 찾는다. 이것이 생각이다. 그러나 다른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이 질문을 던질 때 그대는 침묵한다. 꿰뚤어보는 눈을 갖고 질문 안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기억체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파고드는 것이다. 주어진 질문 자체를 직접 대면한다. 그러고 나서 모르면 모른다고 말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물었다고 하자.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즉시 '물론, 신은 존재합니다.' 하는 식으로 말한다. 이 대답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기억 속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기독교적인 기억체계, 힌두교적인 기억체계, 이슬람교의 기억체계에서 나온 대답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 대답은 아무 쓸모도 없다. 공산주의의 기억체계를 갖고 있다면 '아니,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대답들은 기억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해의 인간은 다만 질문을 주의 깊게 듣고 그 질문 안으로 깊이 들어가 관찰한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할 것이며, 안다면 안다고 말한다. 여기서 '안다면' 이라는 말은 '직접 체험했다며' 이라는 뜻이다.
이해의 인간은 진실하다. 비록 그가 '나는 모릅니다.' 라고 말한다 해도 그의 무지는 지식보다 더 값지다. 최소한 그의 무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수용성은 진리에 더 가깝다. 최소한 그는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그는 위선자가 아니다.
관찰해 보라. 그러면 모든 대답이 기억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억이 작용하지 않는 통로, 순수한 의식만이 작용하는 통로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라. 바로 그것이 이해다. 생각을 버리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명상과 사랑이 그것이다.
반응과 대응을 살펴보자.
반응은 생각에서 나오지만 대응은 이해에서 나온다. 반응은 과거로부터 나오지만 대응은 항상 현재 안에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반응 밖에 모른다. 우리는 이미 반응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면에 갖추고 있다. 누군가 어떤 행동을 하면 우리는 즉각 반응을 보인다. 마치 버튼을 누르면 즉각 기계가 작동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 그대를 모욕하면 그대는 화를 낸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대는 거의 기계와 같다. 누군가 버튼을 누르면 그대는 화를 낸다. 이번에는 예전과 다른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런데 상황을 살펴볼 단 한순간의 여유도 허용하지 않는다. 한 순간도 기다리지 않고 즉각 화를 낸다. 어쩌면 그대를 모욕한 사람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는 그대에 관해 어떤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그대가 모욕감을 느끼는 이유다. 또는 그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아주 심술궂은 사람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상대방을 관찰해야 한다. 그가 옳다면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는 그대에 관한 진실을 보여 주었다. 그는 그대에게 자비를 보여 주었다.
그는 그대의 가슴에 진리를 전해줌으로써 호의를 표시했다. 그대가 상처를 입는다 해도 그것은 그의 탓이 아니다. 또는 그가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대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을 수도 있다. 이때에도 화를 낼 필요는 없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다. 완전히 틀린 말에 대해서는 아무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말에 진실이 담겨 있지 않다면 화를 낼 필요가 없다. 그의 터무니없는 트집을 웃어넘길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붓다를 모욕했다. 제자인 아난다가 붓다에게 말했다.
"저는 화가 치밀었는데 당신은 묵묵히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당신께서 제가 나서도록 허락했다면 그를 따끔하게 꾸짖었을 것입니다."
붓다가 말했다.
"네가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처음에는 그 사람이 나를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는 네가 그러는구나. 그가 무슨 말을 했든 그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이다. 그러니 왜 화를 내겠느냐? 오히려 네가 나를 더 놀라게 하는구나. 너는 격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 완연하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잘못은 다른 사람이 했는데 왜 네가 스스로를 벌하느냐? 지금 너는 네 자신을 벌하고 있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침착하라. 화를 낼 필요가 없다. 분노는 불이다. 왜 네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태우느냐? 잘못은 다른 사람이 했는데 왜 네가 자신을 벌하느냐? 어리석은 짓을 그만둬라."
믿음과 신뢰 역시 마찬가지다.
믿음은 마음에 속한다. 믿음은 생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신뢰는 무심, 각성, 이해에 속한다.
믿음은 맹목적이다. 맹목적으로 믿도록 배웠기 때문에 믿는다. 믿음은 결코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대에게 붙은 꼬리표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부터 성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따라서 존재 깊숙히 침투해 들어갈 수 없다. 얼마동안 이 꼬리표를 달고 다니다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간단하게 떼어버린다. 기독교인이 아닌 기독교인, 힌두교 교인이 아닌 힌두교 교인들이 있다. 그들은 오로지 믿음 때문에 힌두교 교인이 되었지만 그 믿음을 결코 이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믿음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기독교인, 힌두교 교인, 이슬람 교인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대로 산 적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슬람 교인이 되겠는가?
믿음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깨어있는 의식으로 삶을 주시하면 서서히 신뢰가 솟아난다. 믿음은 다른 사람의 것이지만 신뢰는 그대의 것이다. 믿음을 버려라. 그래야 신뢰가 솟아날 수 있다. 믿음에 만족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신뢰가 솟아나지 않는다.
동정과 자비 역시 똑같다.
동정은 마음에 속한다. 어떤 사람이 불행한 문제에 빠진 것을 보고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남을 돕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며 선한 행위라고 배웠다. 그것이 훌륭한 시민정신이라고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동정심을 느낀다.
그러나 자비는 배운 것과 아무 상관도 없다. 자비는 동정이 아니라 감정이입으로 솟아난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전체적으로 볼 때에서야 자비가 솟아난다. 상대방과 똑같은 상황 속에서 느끼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이 처한 상황 속으로 전체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교제와 교류를 살펴보자.
교제는 마음에 속한다. 교제는 언어적이고, 지적이고, 개념적이다. 그러나 교류는 무심에 속한다. 교류는 깊은 침묵의 일부다. 교류는 에너지의 전이 현상이며 비언어적이다. 어떠한 매개체도 없이 하나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즉각 전이 되는 것, 이것이 교류다.
경이감과 외경심의 차이는 무엇인가? 경이감을 느낄 때 그대는 어떤 실마리를 찾으려고 한다. '어떻게 해야 이 경이감을 해결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다. 경이감은 의문부호를 만들어내고, 그대는 그 의문부호와 싸우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철학은 경이감과의 투쟁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철학은 처음에는 경이감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다음에는 그 경이감을 풀어버리려고 노력한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풀어내려교 애쓴다. 그래야 경이감을 떨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경이감은 편치 않은 상태, 일종의 긴장상태로 느껴진다. 그래서 철학자는 다시 편안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그는 어떤 해답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의문을 떨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신비는 더 이상 신비가 아니다. 결국, 경이감에서 비롯된 철학이 경이감에 반대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는 외경심에서 싹튼다. 외경심 또한 경이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혀 다른 하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외경심은 의문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외경심은 깊은 사랑과 감사, 겸손함을 불러일으킨다. 외경심은 그대로 엎드려 절하고 싶은 상태로 몰고 간다. 외경심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깊이 존중해야 하는 신비다.
엎드려 기도하고 싶어진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게 된다. 그것은 너무나 광대하기 때문에 생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기도하고 싶을 것이다. 그것과 깊은 사랑에 빠지기를 원한다.
경이감이 의문부호를 만들지 않을 때 그것은 외경심이 된다. 의문부호가 생긴다면 외경심은 경이감이 되고 만다. 이것이 철학과 종교의 차이점이다. 이 둘은 변증법적으로 완전히 상반되는 길이다. 철학자는 끝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끊임없이 생각을 거두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