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이해의 부재(不在)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한다. 이해가 떠오를 때 생각은 사라진다. 이것은 장님이 길을 더듬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눈이 있을 때 길을 더듬지 않는다. 직접 길을 본다. 이해는 눈과 같다. 더듬지 않고 길을 본다. 그러나 생각은 더듬거린다. 뭐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계속 생각하고 추측한다. 생각은 옳은 답을 주지 못한다. 생각은 이미 알려진 것만 반복하기 때문이다. 생각은 미지(未知)의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모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다. 생각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한다. 되풀이해서 생각하고, 기존의 생각들을 엮어서 새롭게 구성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진실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해는 신선하고 새롭다. 이해는 과거와 아무 상관도 없다. 이해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이해는 실제에 대한 통찰력이다.
생각에는 수많은 의문이 생겨날 뿐 해답이 불가능하다. 어떤 해답을 찾았다고 느낄 때에도 그것은 진정한 해답이 아니다. 다만 어떤 방법으로 행동할 것을 결정했기 때문에 그 행동의 근거로써 해답이 필요해진다.
의존할 해답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해답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해답을 깊이 들여다보라. 그러면 그 해답으로부터 수많은 의문이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해에는 오직 해답이 있을 뿐 의문이 없다. 이해에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외부에서 차용한 것이다. 모든 생각은 타인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주의 깊게 관찰해 보라. 진정으로 자기 것이라고 여겨지는 생각,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을 찾을 수 있는가? 자신의 생각 모두가 빌려온 것이다. 그 생각들의 진원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생각들 모두가 남에게 빌려온 것이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 마음은 컴퓨터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해답을 내놓기 전에 컴퓨터에 자료를 입력해야 한다. 모든 정보를 제공해야한 컴퓨터는 해답을 내놓을 수 있다. 이것이 마음의 기능이다.
마음은 바이오컴퓨터다. 온갖 자료, 지식, 정보를 수집한다. 어떤 의문이 떠오르면 마음은 그 수집된 내용을 토대로 해답을 내놓는다. 이것은 진정한 응답이 아니다. 이미 죽어버린 과거로부터 나온 내용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해란 무엇인가? 이해는 순수한 지성이다. 이 순수한 지성은 본래 그대의 것이다.
우리는 이런 지성을 갖고 태어났다. 아무도 그대에게 지성을 줄 수 없다. 지식은 줄 수 있지만 지성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성은 그대 고유의 예리함이다. 명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예리하고 분명하게 만든다. 명상을 통해 그대가 빌려온 지식들을 버리고 자신의 존재를 회복한다. 자신의 본래면목, 순진무구함, 신선함이 명상을 통해 회복된다. 이 신선함을 통해 행동할 때 그 행동은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 전적으로 지금 여기에 대응한다. 이 대응은 상황의 도전에서 기인한 것이지, 과거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질문을 던질 때 그대는 어떻게 하는가? 해답을 찾기 위해 즉각 마음 안으로 들어간다. 온갖 지식이 수집되어 있는 마음의 지하실로 들어가 해답을 찾는다. 이것이 생각이다. 그러나 다른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이 질문을 던질 때 그대는 침묵한다. 꿰뚤어보는 눈을 갖고 질문 안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기억체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파고드는 것이다. 주어진 질문 자체를 직접 대면한다. 그러고 나서 모르면 모른다고 말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물었다고 하자.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즉시 '물론, 신은 존재합니다.' 하는 식으로 말한다. 이 대답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기억 속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기독교적인 기억체계, 힌두교적인 기억체계, 이슬람교의 기억체계에서 나온 대답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 대답은 아무 쓸모도 없다. 공산주의의 기억체계를 갖고 있다면 '아니,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대답들은 기억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해의 인간은 다만 질문을 주의 깊게 듣고 그 질문 안으로 깊이 들어가 관찰한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할 것이며, 안다면 안다고 말한다. 여기서 '안다면' 이라는 말은 '직접 체험했다며' 이라는 뜻이다.
이해의 인간은 진실하다. 비록 그가 '나는 모릅니다.' 라고 말한다 해도 그의 무지는 지식보다 더 값지다. 최소한 그의 무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수용성은 진리에 더 가깝다. 최소한 그는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그는 위선자가 아니다.
관찰해 보라. 그러면 모든 대답이 기억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억이 작용하지 않는 통로, 순수한 의식만이 작용하는 통로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라. 바로 그것이 이해다. 생각을 버리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명상과 사랑이 그것이다.
반응과 대응을 살펴보자.
반응은 생각에서 나오지만 대응은 이해에서 나온다. 반응은 과거로부터 나오지만 대응은 항상 현재 안에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반응 밖에 모른다. 우리는 이미 반응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면에 갖추고 있다. 누군가 어떤 행동을 하면 우리는 즉각 반응을 보인다. 마치 버튼을 누르면 즉각 기계가 작동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 그대를 모욕하면 그대는 화를 낸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대는 거의 기계와 같다. 누군가 버튼을 누르면 그대는 화를 낸다. 이번에는 예전과 다른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런데 상황을 살펴볼 단 한순간의 여유도 허용하지 않는다. 한 순간도 기다리지 않고 즉각 화를 낸다. 어쩌면 그대를 모욕한 사람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는 그대에 관해 어떤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그대가 모욕감을 느끼는 이유다. 또는 그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아주 심술궂은 사람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상대방을 관찰해야 한다. 그가 옳다면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는 그대에 관한 진실을 보여 주었다. 그는 그대에게 자비를 보여 주었다.
그는 그대의 가슴에 진리를 전해줌으로써 호의를 표시했다. 그대가 상처를 입는다 해도 그것은 그의 탓이 아니다. 또는 그가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대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을 수도 있다. 이때에도 화를 낼 필요는 없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다. 완전히 틀린 말에 대해서는 아무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말에 진실이 담겨 있지 않다면 화를 낼 필요가 없다. 그의 터무니없는 트집을 웃어넘길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붓다를 모욕했다. 제자인 아난다가 붓다에게 말했다.
"저는 화가 치밀었는데 당신은 묵묵히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당신께서 제가 나서도록 허락했다면 그를 따끔하게 꾸짖었을 것입니다."
붓다가 말했다.
"네가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처음에는 그 사람이 나를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는 네가 그러는구나. 그가 무슨 말을 했든 그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이다. 그러니 왜 화를 내겠느냐? 오히려 네가 나를 더 놀라게 하는구나. 너는 격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 완연하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잘못은 다른 사람이 했는데 왜 네가 스스로를 벌하느냐? 지금 너는 네 자신을 벌하고 있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침착하라. 화를 낼 필요가 없다. 분노는 불이다. 왜 네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태우느냐? 잘못은 다른 사람이 했는데 왜 네가 자신을 벌하느냐? 어리석은 짓을 그만둬라."
믿음과 신뢰 역시 마찬가지다.
믿음은 마음에 속한다. 믿음은 생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신뢰는 무심, 각성, 이해에 속한다.
믿음은 맹목적이다. 맹목적으로 믿도록 배웠기 때문에 믿는다. 믿음은 결코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대에게 붙은 꼬리표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부터 성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따라서 존재 깊숙히 침투해 들어갈 수 없다. 얼마동안 이 꼬리표를 달고 다니다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간단하게 떼어버린다. 기독교인이 아닌 기독교인, 힌두교 교인이 아닌 힌두교 교인들이 있다. 그들은 오로지 믿음 때문에 힌두교 교인이 되었지만 그 믿음을 결코 이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믿음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기독교인, 힌두교 교인, 이슬람 교인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대로 산 적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슬람 교인이 되겠는가?
믿음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깨어있는 의식으로 삶을 주시하면 서서히 신뢰가 솟아난다. 믿음은 다른 사람의 것이지만 신뢰는 그대의 것이다. 믿음을 버려라. 그래야 신뢰가 솟아날 수 있다. 믿음에 만족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신뢰가 솟아나지 않는다.
동정과 자비 역시 똑같다.
동정은 마음에 속한다. 어떤 사람이 불행한 문제에 빠진 것을 보고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남을 돕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며 선한 행위라고 배웠다. 그것이 훌륭한 시민정신이라고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동정심을 느낀다.
그러나 자비는 배운 것과 아무 상관도 없다. 자비는 동정이 아니라 감정이입으로 솟아난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전체적으로 볼 때에서야 자비가 솟아난다. 상대방과 똑같은 상황 속에서 느끼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이 처한 상황 속으로 전체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교제와 교류를 살펴보자.
교제는 마음에 속한다. 교제는 언어적이고, 지적이고, 개념적이다. 그러나 교류는 무심에 속한다. 교류는 깊은 침묵의 일부다. 교류는 에너지의 전이 현상이며 비언어적이다. 어떠한 매개체도 없이 하나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즉각 전이 되는 것, 이것이 교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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