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우리는 같은 강물 속에 발을 담그지만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아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아무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차가움은 따스함이 되고, 따스함은 차가움이 된다.
젖은 것은 마르고, 마른 것은 젖게 된다.
병이 있기에 건강이 유쾌하고, 악이 있기에 선이 유쾌하다.
배고픔이 있기에 포만감이 유쾌하고, 피곤함이 있기에 휴식이 유쾌하다.
살아 있음과 죽음, 깨어 있음과 잠, 젊음과 늙음, 이것은 하나이며 똑같은 것이다.
상황에 따라 전자가 후자가 되고, 후자가 다시 전자가 된다.
뜻밖의 돌연한 반전에 의해서.
그것은 헤어졌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모든 것은 적당한 때가 있는 법이다.
원문 이해
외형적으로는 모든 것이 똑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변화하며 흐른다. 붓다에 의하면, 변화만이 영원하다. 변화가 단 하나의 영원한 현상이다. 오직 변화라는 현상만이 변하지 않는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모두 변화한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영혼은 없다. 그대는 자아가 아니다. 그대는 아트마(atma)가 아니라 아나트마(anatma)다. 그대는 무아다. 그대 안에는 영원한 것도 없고, 고정불변의 실체도 없다. 그대는 그저 하나의 흐름일 뿐이다."
왜 붓다가 무아를 설파하는가? 비존재와 무를 받아들이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때 그대는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버릴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버렸을 때 진리를 보는 눈이 생긴다. 이때 그대는 진리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에고가 있으면 진리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어떻게든지 이해에 도달해야 한다. 무아에 대한 이해, 변함없는 흐름에 대한 이해, 고정된 실체는 없고 흐름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때 그대는 투명한 거울이 된다. 이때에는 동요할 자도 없고 해석할 자도 없다. 왜곡할 자가 없다. 그대 안에서 존재계가 있는 그대로 반영된다. 이렇게 존재계가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 이것이 진리다.
영원히 존재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대가 주어진 순간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산 사람, 삶을 맘껏 즐길 사람은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삶을 즐기지 못한 사람, 주어진 순간을 제대로 살지 못한 사람은 두려워한다.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 많은데 떠날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음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이 다가오는데 그대는 삶을 통해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다. 성숙하지도 못했으며, 꽃처럼 피어나지도 못했다. 그대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이것이 두려움의 정체다.
삶을 완전히 산 사람은 항상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준비된 자세는 강요된 것이 아니다. 그의 준비성은 꽃에 비유될 수 있다. 꽃이 피어나 사방에 향기를 날린다. 매순간을 즐기며 산들바람에 춤춘다. 바람을 견디고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일출을 감상한다. 저녁때가 되면 완전한 만족이 오고, 꽃은 대지로 돌아가 휴식할 준비를 한다. 삶을 완전히 누리고 난 다음의 휴식은 아름답다. 이것이 자연의 이법(理法)이다. 꽃은 대지로 돌아가 잠을 잔다. 긴장도 없고 번뇌도 없다. 울면서 매달릴 일도 없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것이 삶의 첫 번째 영역이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한다. 이 삶을 누리고 찬양해야 한다. 이렇게 삶을 최대한으로 즐겼을 때 비로소 미련없이 떠날 수 있다. 아무 불만 없이 떠날 수 있다. 그대는 낮을 살았고 이제 밤이 왔다 그대의 낮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대는 파도처럼 굽이치는 삶을 살았으며, 순간이 요구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했다. 그 다음에 휴식할 시간이 오고, 그대는 다시 대지의 품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붓다,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육체가 죽기 전에 자아가 먼저 죽는다.
자아는 육체보다 더 허구적인 것이다. 육체가 더 실제적이다. 육체가 죽기 위해서는 7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자아는 매순간 죽는다. 잘 관찰해 보라. 그대는 아침에 어떤 자아를 갖고 있었는데 오후가 되면 다른 자아를 갖고 있다. 아침에 그대는 행복했었다. 그것은 다른 자아였다. 그런데 오후가 되면 그 자아가 가 버린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옳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태어날 때 갖고 있던 자아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태어날 때의 그대와 죽을 때의 그대가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붓다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연속체이긴 하지만 똑같은 것은 아니다."
변화가 만물의 본질이다. 영원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얻은 가장 심오한 통찰이다. 인간은 영원한 집을 갖고 싶어한다. 인간은 영원한 기반, 영원한 뿌리를 원한다. 그러나 영원은 허구(虛構)다. 외양의 동일함 때문에 영원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대의 얼굴은 아침이나 저녁이나 똑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대를 보고 똑같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대는 어제도 있었고, 그저께도 있었다. 그대의 얼굴이 똑같아 보인다. 그러나 정녕 그대가 똑같은 사람인가? 오늘 아침, 나를 보러 찾아왔을 때 그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대는 이미 변화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에도 그대는 똑같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무엇인가 그대 안으로 흘러들었다. 내가 그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대가 어떻게 다시 똑같은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절대로 똑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럴 방법이 없다. 매순간 수많은 여울이 그대의 의식 안으로 흘러든다. 길을 가는데 꽃이 그대를 보고 미소 짓는다. 이 꽃이 그대를 변화시킨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그대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이 바람이 그대를 변화시킨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그대에게 따스한 기운을 선사한다. 이 태양이 그대를 변화시킨다.
매순간,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
이것을 이해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을 이해하면 에고가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최고의 상황이 조성된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 할때, 왜 집착하겠는가? 아무리 집착해도 변화를 중단시킬 수는 없다. 강물의 흐름을 중단시킬 수는 없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그것을 중단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사물을 고정시키려고 한다. 그것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 놓는다. 아무것도 고정시킬 수 없다. 이 아침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그러나 내일 아침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아는가? 그대는 사랑마저 고정시키려고 한다. 오늘 아침과 똑같은 사랑을 내일 아침에도 붙잡아 두려고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고정시키려고 하고 집착한다면 그대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내일 아침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내일 아침은 미지의 세계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기대는 사물이 영원할 때에만 가능하다. 영원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기대는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모든 것이 계속 변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기대가 없다면 좌절도 있을 수 없다. 그대가 좌절을 겪는 것은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기대하지 않으면 좌절도 없다. 그대가 기대감을 갖는 것은 사물이 영원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지나간 기슭에 대해 생각한다. 이것이 문제다. 이것이 고민과 번뇌의 원인이다. 매순간 강물은 새로운 기슭에 닿는다. 미지의 세계로 흘러간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마음은 이미 지나간 기슭,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기슭에 미래를 투영하려고 한다.
모든 것은 아름다운 때가 있는 법이다. 저마다 적당한 때가 있다. 그것을 어기려고 하지 말라.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 나는 이것을 종교적이라고 부른다. 그대가 처한 순간에 진실하라. 젊을 때에는 젊은이답게 행동하라. 늙었을 때에는 늙은이답게 행동하라. 이것을 혼동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삶은 뒤죽박죽 될 것이며, 뒤죽박죽 된 것은 추하다. 그대 쪽에서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자연의 흐름을 따라가면 된다. 무엇을 행하건 그대가 행하는 것은 모두 틀렸다. 행위 자체가 틀렸다. 그저 자연에 맡기고 흘러가라.
자연은 그대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다. 자연은 자신의 법칙을 따른다. 이것이 "모든 것은 적당한 때가 있는 법이다" 라는 말의 의미다. 기다려라.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기다려라. 지금 당장 결과를 바라지 말라. 그런 바람 자체가 결과를 더 늦춘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라. 농부처럼 수동적으로 관찰하면서, 깨어 있는 의식으로 기다려라.
그러면 원하는 바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서두르면 놓칠 것이다. 시간을 너무 의식하면 명상으로 들어갈 수 없다. 명상은 시간이 없는 차원이기 때문이다. 항상 이것을 명심하라. 그대만 준비되면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난다.
계절과 보조를 맞추어라. 이것을 명심하라. 긴장할 시간에는 긴장하라! 거기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긴장을 모른다면 어떻게 쉬겠는가? 화를 낼 줄 모른다면 어떻게 자비를 알겠는가? 사랑에 빠진 적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통해 성장하겠는가? 모든 것은 알맞은 때가 있는 법이다. 때가 되면 저절로 온다. 지금까지 항상 그런 식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드넓은 존재계에 그대의 길을 강요하지 말라. 존재계가 어디로 가는지 잘 관찰하고 거기에 순응하라. 그에게는 자연을 떠미는 에고가 없다. 그는 자연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는 자연을 정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안다. 자연은 정복되지 않는다. 어떻게 부분이 전체를 정복한단 말인가? 불가능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연에 복종한다. 그는 자연이 어디로 가든 그림자처럼 따라간다. 그는 하늘에 떠다니는 흰 구름과 같다. 구름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바람 가는 곳이 그의 목적지다. 목적지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그곳에 지복이 있다. 모든 곳이 목적지다. 그대가 할 일은 자연에 자신을 맡기는 것뿐이다. 매순간이 삶의 최절정이다. 그것을 허용하라. 모든 것을 내맡기고 순응하라. 그러면 안심하고 휴식할 수 있다. 모든 것에는 제철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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