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우리는 같은 강물 속에 발을 담그지만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아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아무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차가움은 따스함이 되고, 따스함은 차가움이 된다.

젖은 것은 마르고, 마른 것은 젖게 된다.

병이 있기에 건강이 유쾌하고, 악이 있기에 선이 유쾌하다.

배고픔이 있기에 포만감이 유쾌하고, 피곤함이 있기에 휴식이 유쾌하다.

살아 있음과 죽음, 깨어 있음과 잠, 젊음과 늙음, 이것은 하나이며 똑같은 것이다.

상황에 따라 전자가 후자가 되고, 후자가 다시 전자가 된다.

뜻밖의 돌연한 반전에 의해서.

그것은 헤어졌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모든 것은 적당한 때가 있는 법이다.

 

원문 이해

 

 

외형적으로는 모든 것이 똑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변화하며 흐른다. 붓다에 의하면, 변화만이 영원하다. 변화가 단 하나의 영원한 현상이다. 오직 변화라는 현상만이 변하지 않는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모두 변화한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영혼은 없다. 그대는 자아가 아니다. 그대는 아트마(atma)가 아니라 아나트마(anatma)다. 그대는 무아다. 그대 안에는 영원한 것도 없고, 고정불변의 실체도 없다. 그대는 그저 하나의 흐름일 뿐이다."

왜 붓다가 무아를 설파하는가? 비존재와 무를 받아들이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때 그대는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버릴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버렸을 때 진리를 보는 눈이 생긴다. 이때 그대는 진리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에고가 있으면 진리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어떻게든지 이해에 도달해야 한다. 무아에 대한 이해, 변함없는 흐름에 대한 이해, 고정된 실체는 없고 흐름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때 그대는 투명한 거울이 된다. 이때에는 동요할 자도 없고 해석할 자도 없다. 왜곡할 자가 없다. 그대 안에서 존재계가 있는 그대로 반영된다. 이렇게 존재계가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 이것이 진리다.

영원히 존재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대가 주어진 순간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산 사람, 삶을 맘껏 즐길 사람은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삶을 즐기지 못한 사람, 주어진 순간을 제대로 살지 못한 사람은 두려워한다.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 많은데 떠날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음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이 다가오는데 그대는 삶을 통해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다. 성숙하지도 못했으며, 꽃처럼 피어나지도 못했다. 그대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이것이 두려움의 정체다.

삶을 완전히 산 사람은 항상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준비된 자세는 강요된 것이 아니다. 그의 준비성은 꽃에 비유될 수 있다. 꽃이 피어나 사방에 향기를 날린다. 매순간을 즐기며 산들바람에 춤춘다. 바람을 견디고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일출을 감상한다. 저녁때가 되면 완전한 만족이 오고, 꽃은 대지로 돌아가 휴식할 준비를 한다. 삶을 완전히 누리고 난 다음의 휴식은 아름답다. 이것이 자연의 이법(理法)이다. 꽃은 대지로 돌아가 잠을 잔다. 긴장도 없고 번뇌도 없다. 울면서 매달릴 일도 없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것이 삶의 첫 번째 영역이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한다. 이 삶을 누리고 찬양해야 한다. 이렇게 삶을 최대한으로 즐겼을 때 비로소 미련없이 떠날 수 있다. 아무 불만 없이 떠날 수 있다. 그대는 낮을 살았고 이제 밤이 왔다 그대의 낮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대는 파도처럼 굽이치는 삶을 살았으며, 순간이 요구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했다. 그 다음에 휴식할 시간이 오고, 그대는 다시 대지의 품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붓다,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육체가 죽기 전에 자아가 먼저 죽는다.               

자아는 육체보다 더 허구적인 것이다. 육체가 더 실제적이다. 육체가 죽기 위해서는 7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자아는 매순간 죽는다. 잘 관찰해 보라. 그대는 아침에 어떤 자아를 갖고 있었는데 오후가 되면 다른 자아를 갖고 있다. 아침에 그대는 행복했었다. 그것은 다른 자아였다. 그런데 오후가 되면 그 자아가 가 버린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옳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태어날 때 갖고 있던 자아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태어날 때의 그대와 죽을 때의 그대가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붓다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연속체이긴 하지만 똑같은 것은 아니다."

변화가 만물의 본질이다. 영원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얻은 가장 심오한 통찰이다. 인간은 영원한 집을 갖고 싶어한다. 인간은 영원한 기반, 영원한 뿌리를 원한다. 그러나 영원은 허구(虛構)다. 외양의 동일함 때문에 영원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대의 얼굴은 아침이나 저녁이나 똑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대를 보고 똑같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대는 어제도 있었고, 그저께도 있었다. 그대의 얼굴이 똑같아 보인다. 그러나 정녕 그대가 똑같은 사람인가? 오늘 아침, 나를 보러 찾아왔을 때 그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대는 이미 변화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에도 그대는 똑같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무엇인가 그대 안으로 흘러들었다. 내가 그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대가 어떻게 다시 똑같은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절대로 똑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럴 방법이 없다. 매순간 수많은 여울이 그대의 의식 안으로 흘러든다. 길을 가는데 꽃이 그대를 보고 미소 짓는다. 이 꽃이 그대를 변화시킨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그대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이 바람이 그대를 변화시킨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그대에게 따스한 기운을 선사한다. 이 태양이 그대를 변화시킨다.

매순간,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

이것을 이해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을 이해하면 에고가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최고의 상황이 조성된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 할때, 왜 집착하겠는가? 아무리 집착해도 변화를 중단시킬 수는 없다. 강물의 흐름을 중단시킬 수는 없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그것을 중단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사물을 고정시키려고 한다. 그것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 놓는다. 아무것도 고정시킬 수 없다. 이 아침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그러나 내일 아침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아는가? 그대는 사랑마저 고정시키려고 한다. 오늘 아침과 똑같은 사랑을 내일 아침에도 붙잡아 두려고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고정시키려고 하고 집착한다면 그대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내일 아침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내일 아침은 미지의 세계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기대는 사물이 영원할 때에만 가능하다. 영원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기대는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모든 것이 계속 변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기대가 없다면 좌절도 있을 수 없다. 그대가 좌절을 겪는 것은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기대하지 않으면 좌절도 없다. 그대가 기대감을 갖는 것은 사물이 영원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지나간 기슭에 대해 생각한다. 이것이 문제다. 이것이 고민과 번뇌의 원인이다. 매순간 강물은 새로운 기슭에 닿는다. 미지의 세계로 흘러간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마음은 이미 지나간 기슭,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기슭에 미래를 투영하려고 한다.

모든 것은 아름다운 때가 있는 법이다. 저마다 적당한 때가 있다. 그것을 어기려고 하지 말라.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 나는 이것을 종교적이라고 부른다. 그대가 처한 순간에 진실하라. 젊을 때에는 젊은이답게 행동하라. 늙었을 때에는 늙은이답게 행동하라. 이것을 혼동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삶은 뒤죽박죽 될 것이며, 뒤죽박죽 된 것은 추하다. 그대 쪽에서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자연의 흐름을 따라가면 된다. 무엇을 행하건 그대가 행하는 것은 모두 틀렸다. 행위 자체가 틀렸다. 그저 자연에 맡기고 흘러가라.

자연은 그대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다. 자연은 자신의 법칙을 따른다. 이것이 "모든 것은 적당한 때가 있는 법이다" 라는 말의 의미다. 기다려라.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기다려라. 지금 당장 결과를 바라지 말라. 그런 바람 자체가 결과를 더 늦춘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라. 농부처럼 수동적으로 관찰하면서, 깨어 있는 의식으로 기다려라.               

 

그러면 원하는 바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서두르면 놓칠 것이다. 시간을 너무 의식하면 명상으로 들어갈 수 없다. 명상은 시간이 없는 차원이기 때문이다. 항상 이것을 명심하라. 그대만 준비되면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난다.

계절과 보조를 맞추어라. 이것을 명심하라. 긴장할 시간에는 긴장하라! 거기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긴장을 모른다면 어떻게 쉬겠는가? 화를 낼 줄 모른다면 어떻게 자비를 알겠는가? 사랑에 빠진 적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통해 성장하겠는가? 모든 것은 알맞은 때가 있는 법이다. 때가 되면 저절로 온다. 지금까지 항상 그런 식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드넓은 존재계에 그대의 길을 강요하지 말라. 존재계가 어디로 가는지 잘 관찰하고 거기에 순응하라. 그에게는 자연을 떠미는 에고가 없다. 그는 자연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는 자연을 정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안다. 자연은 정복되지 않는다. 어떻게 부분이 전체를 정복한단 말인가? 불가능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연에 복종한다. 그는 자연이 어디로 가든 그림자처럼 따라간다. 그는 하늘에 떠다니는 흰 구름과 같다. 구름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바람 가는 곳이 그의 목적지다. 목적지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그곳에 지복이 있다. 모든 곳이 목적지다. 그대가 할 일은 자연에 자신을 맡기는 것뿐이다. 매순간이 삶의 최절정이다. 그것을 허용하라. 모든 것을 내맡기고 순응하라. 그러면 안심하고 휴식할 수 있다. 모든 것에는 제철이 있는 법이다.

LIST

원문

 

인간이 바라는 대로 되었다면 더 나빠졌을 것이다.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한 결코 진리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은 발견하기도 어렵고 얻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본질은 숨기를 좋아한다.

델피의 신탁은 말하지도 않고 숨기지도 않는다. 암시를 줄 뿐.

 

원문 이해

 

존재의 차원에는 언어가 없다. 언어에 의존하면 존재와 교류할 수 없다. 존재는 신비하다. 해석이 불가능하다. 이 존재계를 사는 것은 가능하지만 생각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존재계는 하나의 암시(暗示)다. 무엇인가 보여주기는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을 통해서는 존재에 접근할 수 없다. 그대는 존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거듭하여도 존재의 차원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생각이 장애물이 된다.

보고 느껴라. 만져 보아라. 그러면 존재계와 더 가까워질 것이다. 생각하지 말라.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그대는 빗나간다. 생각이 없을 때 그대는 활짝 열린다. 수용적인 상태가 된다. 존재계가 그대를 통해 흐르고, 그대가 존재계 안으로 흘러든다.

그대는 경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경청은 활짝 열려 있는 상태, 모든 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경청할 때 그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생각은 독단적이지만 경청은 수용적이다. 이렇게 귀를 기울이면 자연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가 아니다. 자연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연은 무엇을 사용하는가?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이 암호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한 송이 꽃이 피어 있을 때 이 꽃에 깃든 암호는 무엇일까? 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녕 꽃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꽃은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다만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꽃은 무언의 메시지를 전해 준다.                         

 

이 무언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는 그대 또한 무언이 되어야 한다. 똑같은 것들끼리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꽃 옆에 앉아 있을 때에는 인간이 되지 말고 꽃이 되어라. 나무 옆에 앉아 있을 때에는 인간이 되지 말고 나무가 되어라. 강에서 목욕을 할때에는 인간이 되지 말고 강이 되어라. 이때 수많은 암시가 그대에게 주어진다. 이것은 언어적인 교제가 아니라 영적인 교섭이다. 자연이 수천 개의 혀로 말하지만 그것은 언어가 아니다. 자연은 수많은 경로를 통해 말하지만 그대는 사전을 참고할 수 없다. 철학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대는 이미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왜 의미를 묻는가? 그대는 해석을 원한다. 언어적으로 규정하고 싶어한다. 그대는 영적인 교섭이 아니라 언어적인 소통을 원한다. 그러나 존재계는 의미심장하지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존재계의 의미는 실존적이다. 보라. 관찰하고 느껴라. 그 안으로 들어가라. 존재계가 그대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하고 아무것도 묻지 말라. 묻는 즉시 그대는 대학으로 가는 것이지 우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주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아무것도 묻지 말라. 대답할 자가 없다              

그대 존재의 질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주와 연결될 수 있다.

자연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다면, 밖에 서서 묻지 말고 그 안으로 들어가라. 밖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그대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존재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대는 에고를 잃는다. 그대가 사라진다. 자연은 그대를 위해 수많은 문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 그대는 밖에 서서 기웃거리며 자연을 알고 싶어한다. 자연에는 바깥이 없다. 모든 것이 안에 있다. 어떻게 자연의 바깥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전체가 안에 있다. 그런데 마음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려고 한다. 마음은 바깥에 서서 기웃거리며 관찰하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직접 자연에 참여해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 자연과 하나가 되고, 구름처럼 사라져야 한다.

왜? 더 나빠질까? 그대가 바라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그대 자신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대가 옳은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옳은 것을 바라기 위해서는 먼저 그대 자신이 옳아야 한다. 욕망은 그대의 일부다. 욕망은 그대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대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그대' 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욕망은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들 모두가 존재와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무욕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욕망을 버려라. 그대가 지옥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욕망을 버려라. 그러면 문이 열린다. 욕망이 마음을 낳는다. 욕망의 본질을 이해하라. 욕망은 과거를 미래에 투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미래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모두 과거에서 나온 것이다. 모든 욕망은 과거의 반복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미래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것을 바랄 수 있는가? 미래에 있는 것을 욕구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대는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과거가 이미 알려진 세계라면 미래는 미지의 세계다. 그대가 미래에 대해 무엇을 바란다 해도 그것은 모두 과거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욕망을 버려라. 그대의 욕망을 개입시키지 말고 미래가 오게 놔두라. 미래는 저절로 올 것이다. 미래는 그대의 욕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미래는 이미 오고 있다. 미래에 그대의 욕망을 투사할 필요가 없다. 수동적이 되어라. 미래에 관해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말라.                

그냥 오게 놔두라. 미래에 관해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라. 이것이 무욕의 의미다. 무욕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버리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헤라클레토스는 말한다.

"그대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은 것은 참 잘된 일이다." 그래야만 그대가 깨어날 가능성이 있다. 모든 것이 충족된다면 그대는 결코 진리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불행과 고통, 그대 스스로 창조한 지옥, 이런 것들이 그대를 일깨운다. 이런 것들이 충격을 주어 그대를 깨어나게 한다.

깨어남이란 자신이 주변에 만들어 놓은 허구적인 세계를 깨닫고 그것을 버리는 것이다. 아무 노력 없이 버린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간단하게 포기한다. 이것을 명심하라. 만일 그것을 버리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노력 자체가 그대 자신을 추하게 만든다. 진실로 필요한 것은 이해지 노력이 아니다. 그것의 실체를 보고 이해하라. 그리고 버려라. 그대가 불행한 것은 욕망 때문이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가? 여기에 무슨 논증과 설득이 필요한가? 그대가 욕망을 통해 지옥을 만들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에 무슨 노력이 필요한가? 이해하고 즉시 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즉시 버릴 수 있을 때 그대는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갖게 된다.

진리는 기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대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짓이 될 것이다. 그대가 기대하는 것은 모두 심리적 투영이다. 그것은 마음의 일부다. 그러나 진리는 기대의 대상이 아니다. 기대는 그대를 지각이 없는 상태로 몰아간다. 진리는 그대에게 기다림조차 없을 때 일어난다. 그것은 돌발적인 깨달음이다.

사실,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을 얻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것이 어려워지는 이유는 그대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이 마음을 옆으로 밀어 놓을 것인가? 마음은 아주 미묘하다. 마음을 밀어 놓는 일에도 마음이 남아 있다. 마음은 "좋다! 나는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 또한 마음이다. 마음은 이제 "신이 문을 두드리게 하라.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 말한다. 이 또한 마음이다. 마음은 "나는 명상할 것이다. 나는 모든 사념을 버릴 것이다" 하고 말한다. 마음은 "봐라. 나는 모든 생각을 버렸다. 나는 텅 비었다" 고 말한다. 그러나 이 또한 마음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건 마음이 끼어 든다.             

이것이 문제다. 핵심을 보라. 노력은 도움이 안 된다. 그저 핵심을 보라. 마음은 주장을 통해 존재한다. 이 핵심을 보라! 왜 나는 핵심을 보라고 말하는가? 핵심을 볼 때에는 주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핵심을 보지 못할 때 마음이 "봐라. 나는 아무 주장도 하지 않는다" 고 주장한다. 이 핵심을 보아라. "나는 비어 있다" 는 주장이 아니라 '비어 있음' 이 필요하다. 깨어 있음이 필요한 것이지 "나는 깨어 있다" 는 주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 가 끼어든다면 그대는 아직도 칠흑 같은 마음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나' 가 존재하지 않을 때 빛이 나타난다.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 투명한 인식이 자리잡는다. 이때 그대는 멀리까지 볼 수 있다. 전체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한다.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진리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결코 진리에 도달하지 못했다."

본질은 숨기를 좋아한다. 아름다운 현상이다. 본질은 표면에 있지 않다. 본질은 중심에 숨어 있다. 본질은 나무의 뿌리처럼 깊은 곳에 숨어 있다. 왜 그런가? 본질은 왜 숨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이것은 하나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그대는 숨박꼭질을 해보았을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 존재계는 게임이다. 하나의 놀이이며 유희다. 본질은 숨는다. 이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대는 발견하려는 노력을 통해 성장한다. 꽃 속에 신은 아주 은밀하게 숨어 있다. 건성으로 꽃을 본다면 그대는 신을 보지 못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형상 모두가 신이 숨어 있는 장소다. 꽃도 그렇고 조약돌도 그렇다. 신은 모든 곳에 숨어 있다. 수많은 형상 속에 신이 숨어 있다. 그대가 어디에 있건, 신은 그대 주변의 모든 형상 속에 존재한다. 어떤 형상이건 신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들어갈 준비만 갖추면 된다. 아무런 기대와 욕망 없이, 아무것도 투영하지 않고 들어갈 준비만 하면 돌연 그대 앞에 문이 열린다.

암시는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암시는 삶을 통해 경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마음에게 현혹되지 말라. 마음에게 이렇게 말하라.

"이것은 네 일이 아니다. 이 일은 너와 상관없다. 이 일은 내게 맡기고 너는 다른 데 가서 놀아라. 이 암시가 나의 존재 깊숙이 들어가도록 놔두라"

삶은 해결해야 할 문제나 수수께끼가 아니다. 살고, 즐기고, 누려야 할 신비인 것이다.

LIST

원문

 

만물에게 동일한 이 우주는 어떤 신이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주는 항상 존재해 왔으며,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이 우주는 영원히 살아 있는 촛불이다.

정기적으로 스스로 점화하고 스스로 꺼지는 촛불.

불에는 갈망과 만족의 단계가 있다.

태양은 날마다 새롭다.

 

원문 이해

 

세상의 창조자로서 따로 존재하는 신은 없다. 창조물과 창조자, 창조성이 하나다. 그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존재계는 하나다.

존재계가 신이다. 아무도 존재계를 창조하지 않았다. 이 세상을 책임질 창조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불필요한 질문과 대답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존재계는 엄연히 여기에 있다. 그리고 신은 존재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존재계 자체가 신이다. 신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전체다.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전체다. 존재계는 스스로 나오도, 스스로 소멸한다. 이 원리를 헤라클레이토스는 '불' 이라고 말한다. 불은 아름다운 상징이다. 불은 역동적인 에너지를 준다. 불은 이 존재계가 역동적이고 변증법적인 에너지라는 것을 암시한다. 존재계는 스스로 움직여 간다. '에너지' 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준다. 그러나 '신' 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에너지가 진리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대는 에너지다.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새들은 에너지다.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나무도 에너지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 이 모두가 에너지다. 에너지는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에너지는 중립적이다. 

그대는 세상을 대하는 여러 가지 태도들을 관찰할 수 있다. 만일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대는 이 전체적인 에너지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죄다.                

이 전체적인 에너지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모르고 잘못 적응하는 것, 이것이 죄다. 이 에너지 시스템은 중립적이다. 이 시스템을 따르면 행복해질 것이요, 따르지 않으면 불행해질 것이다. 이것이 로고스다. 이것이 도(道)이며 리트(rit)다.

모든 불행은 그대가 어디론가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존재한다. 불행은 그대가 궤도를 이탈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시 돌아 오라. 몸의 소리, 자연의 소리,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자연의 소리를 귀담아 들어라. 로고스에 귀를 기울여라. 로고스를 깨달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러면 그들이 항상 자연스럽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들은 강물을 밀어내지 않는다. 다만 강물과 더불어 흐를 뿐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지복을 가져다 준다.

하나의 에너지 현상이 되어야 한다. 침묵하라. 그대 자신을 활짝 열어제쳐라. 양손을 하늘을 향해 높이 들어라.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하고 머리를 쳐들어라. 그리고 존재계가 그대 안에 흐르는 것을 느껴라. 에너지, 또는 프라나(prana)가 팔을 통해 아래로 내려올 때 부드러운 진동이 느껴질 것이다.              

미풍에 하늘거리는 나뭇잎처럼 되어라. 이 진동을 허용하라. 그에 협조하라. 그 다음에는 몸 전체가 에너지로 진동하게 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허용하라. 이제는 대지와 일치된 흐름을 느껴라. 하늘과 땅, 위와 아래, 음과 양, 남성과 여성, ..... 이 흐름에 모든 것을 맡겨라. 그대 자신을 버려라.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존재계와 하나가 된다. 용해되어 사라진다. 2, 3분 후에, 또는 에너지로 완전히 충만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땅 위에 엎드려 대지에 입을 맞추어라. 그대를 매개체로 하여 신적인 에너지와 대지의 에너지가 합쳐진다.

노자는 말했다.

"통치자가 없을 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법이 없을 때에는 범죄도 없었다. 현자(賢者)가 없을 때에는 바보도 없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통치자들이 생겨나 규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규율이 생김과 동시에 무질서가 생겨났다. 만물엔 항상 대립되는 반대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현자들이 나타났으며, 그들은 인간이 교육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인간은 반항적이 되었으며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그 다음에 법이 생겼다.                  

더 많은 법이 생길수록 인간은 더 많은 죄를 짓게 되었다."

배고픔은 날마다 새롭다. 사랑은 날마다 새롭다. 삶은 날마다 새롭다. '날마다' 라는 말도 좋은 표현이 아니다. 매순간, 몸짓 하나하나, 움직임 하나하나가 새롭다. 모든 것이 새롭다.

날마다 떠오르는 태양은 새롭다. 날마다 맞는 아침, 늘 찾아오는 배고픔과 포만감도 새롭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은 낡은 것이다. 마음은 축적된 과거다. 마음은 기억의 창고다. 마음은 모든 것을 낡고 죽은 것으로 만든다. 모든 것이 시시하고 더러워 보인다. 이것은 마음 때문이다. 마음을 버려라. 기억을 옆으로 밀어 놓아라. 그러면 그대의 아내가 날마다 새롭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나는 이 여자와 30년을 살았다. 나는 그녀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다." 고 생각한다. 이것은 기억 때문이다. 그러나 정녕 그대가 그녀를 아는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영원한 이방인이다.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알 수 있는가? 사물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을 낱낱이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순간마다 변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이, 똑같은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물이 그렇게 변하듯이 의식의 흐름도 변화한다. 마음을 옆으로 밀어 놓아라.                   

낡은 눈을 통해 보지 말라. 그러면 그대의 아내가 새롭게 보인다. 몸짓 하나하나가 새롭다. 이때 그대의 삶은 끊임없는 흥겨움과 활력으로 넘치게 된다.

아무것도 똑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 오직 마음만이 낡고 죽어 있다. 마음 없이 삶을 관조하는 것, 이것이 명상이다.

 

 

LIST

원문

 

이 로고스가 영원히 옳다 하여도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듣기 전에도 이해하지 못하고 듣고 난 후에도 이해하지 못한다.

만물에 공통되는 것, 우리는 그것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로고스는 만물에 공통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독자적인 지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인간의 본성은 진정한 이해가 없다. 신의 본성만이 그런 이해를 갖고 있다.

인간은 사물의 도리를 알지 못한다. 그를 애워싸고 있는 것만이 지성적이다.

인간은 신성한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의심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은 로고스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스스로 로고스에 대항한다.

결코 없어지지 않는 것으로부터 어느 누가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

 

원문 이해

 

로고스(logos)는 우주 전체, 이 존재계 자체의 논리다. 로고스는 궁극적인 법칙이다. 이것을 노자는 '도(道)' 라고 했으며, 우파니샤드와 베다에서는 '리트(rit)' 라고 불렀다.                

 

로고스는 모든 곳에 현존한다. 나무 안에, 돌 속에, 하늘에, 모든 곳에 로고스가 있다! 그대 안에, 그대 주변의 모든 것 안에 로고스가 현존한다. 삶은 대립을 통해 움직인다. 삶은 변증법적이다. 삶은 대립을 통해 풍성해진다. 삶은 대립을 통해 더 나은 종합으로 나아간다.

듣는 것만으로는 도움이 안된다. 그대 자신이 변해야 한다. 내면의 문을 열어야 한다.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껴야 한다. 로고스를 통해 존재하고, 그것을 음식처럼 흡수하고 소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그것이 그대의 피 속에 흐르고 그대 존재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가 불가능하다.

로고스는 이론이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내적인 성장이 필요하다. 로고스는 만물에 공통된다. 로고스는 만물의 공통된 기반이다. 로고스는 공통된 대륙이다. 그런데 그대는 자신을 타인과 분리된 외딴 섬으로 생각한다. 그대는 자기만의 지성을 따른다. 이것이 모든 어리석음의 기본이다. 존재계는 전체다. 지성 또한 전체다. 지성은 전체에 속한다. 그러므로 공통된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만물의 공통성을 찾아라. 공통된 것을 발견하라. 공통된 것일수록 진실하다. 그리고 예외적인 것일수록 더 거짓이다. 평범해져라. 그러면 근본에, 진리에 더 가까워진다. 만일 절대적으로 평범해질 수 있다면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매순간이 은총으로 충만해진다. 절대적으로 평범할 때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음식을 먹으면 먹는 행위 그 자체가 신성한 의식(儀式)이 된다. 잠을 잘 때에는 그 잠이 신성한 의식이 된다.           

그댄느 태양 아래 걷는다.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그대는 숨쉰다. 행복해지는 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그대는 사랑한다.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하는가? 모든 것이 이미 주어졌다. 예외적인 인물이 되려고 하는 그대의 마음이 문제다. 법칙을 따르라. 만물에 공통된 것을 따르라. 특별한 인물이 되려고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불행해질 것이다.

우리는 전체에서 왔다가 전체로 돌아간다.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왔다가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이 과정 전체가 신비에 싸여 있다. 그러니 어떻게 그대만의 개인적인 지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것은 다소 어려운 말이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라.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중의 하나이다. 의식 또한 공통적인 것이다. 물고기들이 깊은 바다에 살듯이, 우리는 공통된 의식 속에 존재한다. 그대의 의식과 내 의식은 둘이 아니다. 똑같은 의식의 두 센터일 뿐이다. 그러므로 간혹 우리는 공통된 기반을 느낀다.

어떤 사람이 슬프다고 하자. 그는 그대에게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곁에 앉는 것만으로 그대는 갑자기 슬픔이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의식은 공통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존재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지금 일어나는 일 뿐만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바로 이 순간에 존재계 전체가 한데로 모이기 때문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이 순간에 집결되어 있다.

개인적인 지성은 불가능하다. 재능이 탁월한 사람들,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그것을 느낀다. 아인슈타인이나 규리 부인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그것을 느낀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에 발견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무엇인가 그를 사로잡고 있는 순간에 발견이 이루어졌다. 그 순간에 전체적인 의식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시인들에게 물어 보라. 영감이 일어날 때마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적 의식이 그들을 사로잡고, 그들은 단순히 매개체가 된다.

큐리 부인은 노벨상을 탔다. 그러나 이 노벨상은 보편적 기반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녀는 특정한 수학적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2년여를 노심초사했지만 해결책을 찿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연구에 지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 속에서 무엇인가 일어났다. 잠 속에서 사람들은 더 열린다. 잠 속에서 그대는 에고이스트가 아니다. 그대는 아무것도 아니다. 잠 속에서 그대는 개체성에 매달리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생기와 활력을 느끼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잠을 자는 동안 그대는 보편적 기반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대는 전체적인 의식의 바다에 들어가 있었다. 개인적 지성의 틀에 갇혀 있지 않았다. 잠시 동안 그대는 전체 안에 들어가 있었으며, 이 전체가 그대를 소생시키고 생기를 불어넣었다.

밤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 큐리 부인은 자다가 일어나서 책상 앞으로 갔다. 그리고 수년 동안 고심하던 문제의 해결책을 노트에 적었다. 그 다음에 그녀는 다시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는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은 다음 책상 앞에 가 앉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토록 찾던 해답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것을 누가 써 놓았을까? 이곳엔 나밖에 없는데..." 하고 의아해 했다. 간혹 하녀가 들락거리긴 했지만 그 하녀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큐리 부인이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려고 노트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자신의 필체였다. 잠결에 쓴 것이기 때문에 약간 다르긴 했지만 자신의 필체가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눈을 감고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려고 했다. 그리고 꿈처럼 일어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자다가 일어나서 노트에 무엇인가 적은 것이다.

보편적 의식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대는 이것을 그대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 의식은 결코 그대의 것이 될 수 없다. 이 의식은 항상 우주 공간을 떠다닌다. 그대 주변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 더 열려 있어라. 모든 것을 내맡기고 수용하라. 전체가 되어야만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부분이 어떻게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명상의 모든 것이다. 명상이란 전체가 그대를 통해 흐르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명상 속에서 그대는 사라진다. 문득 그대는 전체가 된다.

그대는 지성적이지 않다. 그대를 에워싼 바다,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것, 그대의 내면에도 있고 밖에도 있는 그것이 지성적이다. 그러나 그대는 아니다. 그대는 하나의 오류(誤謬)에 불과하다.

그대는 의심한다.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성한 것이 그대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그대의 의심 때문에. 단 하나의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의심이다. 그리고 단 하나의 문이 있다면 그것은 신뢰이다. 자연을 신뢰할 때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간다. 그러나 자연을 신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된다.

자연적이 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울까?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 자연적이 되면 그대는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 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 다른 어려움은 없다. 성욕이 일어날 때 그대로 따르다. 금욕주의는 자연에 대한 투쟁이다. 배가 고플 때는 먹어라. 단식은 자연에 어긋난다. 그대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에도 먹는다. 이 또한 자연에 어긋난다. 그대는 섹스를 원하지 않을 때에도 아내와 사회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섹스를 한다. 이것은 자연에 반하는 행동이다. '자연스럽다' 는 것은 그대의 내적인 존재를 따르는 걸 의미한다. 어떤 느낌이 오건 거기에 에고를 개입시키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자연적인 길이다. 이 길을 가다 보면 그대의 에고는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동물처럼 살아라. 단 하나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다. 동물처럼 살되 깨어 있으라.

자연과 싸우지 말라. 자연을 관조하면서 그대로 허용하라. 자연이 그대를 어디로 인도하건 좋다. 마음이 만들어 낸 목표는 모두 허구다. 그런 목적을 갖고 있는 한 그대는 무엇을 하건 성공할 수 없다. 결국 자연이 이긴다. 오직 전체만이 성공할 수 있다. 그러니 처음부터 부질없는 싸움을 벌이지 말라.

 

자연을 허용하면 궁극의 목적지에 이른다. 인위적으로 해야 할 일은 없다. 자연은 이미 모든 것을 구비하고 있다. 그대는 한 알의 씨앗이다. 그대 안에 설계도 전부가 들어 있다. 우리는 땅에 씨앗을 뿌린다. 씨앗은 나무에 대한 모든 청사진을 갖고 있다. 나무의 골격, 앞으로 피어날 꽃과 이파리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씨앗은 나무가 될 조감도를 갖고 있다. 자연이 허용하기만 하면 된다. 씨앗은 우주적 의식에 의존한다. 씨앗은 개인적인 지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인간은 신이 될 청사진을 갖고 있다. 인간은 신의 씨앗이다. 인간의 의식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이 의식이 성장하고 성장하여 우주가 되는 지점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대 쪽에서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수련도 필요 없고, 교리나 강령도 필요 없고, 종교도 필요 없다. 자연으로 충분하다! 이 자연을 허용하기만 하면 된다. 자연을 신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신뢰를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다.

신뢰가 생명이다. 신뢰가 커질수록 더 풍요로운 삶이 그대 앞에 열릴 것이다.

LIST

원문

 

취한 사람은 어린아이에게 끌려간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비틀거리며 따라간다.

그의 영혼은 젖어 있으므로

영혼은 축축해짐으로써 쾌락을 얻는다.

건조한 영혼이 가장 지혜로우며 최상의 것이다.

 

원문 이해

 

취한 사람은 퇴보한다. 그는 퇴행하여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 이 퇴행은 성장이 아니다. 그대는 퇴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전진함으써, 위로 성장함으로써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그대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지만 이것은 퇴행이 아니라 진보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퇴행했을 때 그대는 유치해질 것이다. 무엇인가 얻기는커녕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퇴행했을 때 내적인 시스템 전부가 불구가 된다. 이렇게 되면 겉으로는 어른으로 보이겠지만 내적으로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천진난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치해지는 것이다. 순진무구한 것이 아니라 매우 교활해진다. 이 교활함이 너무도 깊기 때문에 그대는 다른 사람들에게 교활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속임수를 쓴다. 그대 자신의 의식, 자신의 미래, 자신의 가능서에 대해서도 교활한 술수를 부린다. 이것이 퇴행이다.      

 

서양에서는 술이나 마약에 취한 상태를 가리켜 'stoned' 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은 아주 훌륭한 표현이다. 마약에 취한 사람은 돌(stone)이 된다. 이것이 최악의 경우다. 그는 식물보다 못한 상태로 떨어졌다. 그는 바위 덩어리가 되었다. 모든 가능성이 사라졌다. 그의 현존이 사라졌다. 내면에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젖은 상태다. 그는 물이 되었다. 물이 사방으로 넘실대고 있다. 방향 감각도 없고 내적인 통합성도 없다. 중심이 없다. 이런 순간에 죽으면 자신이 죽는 것초차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이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는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이 결여된 상태다.

다른 종류의 마약도 있다. 정치가들 또한 마약에 중독되어 있다. 그들은 권력과 지위라는 마약에 중독되었다. 권력은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가장 강력한 마약이다. 정치가들은 마약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독한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다.

재물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재물을 쫓고 있는 사람을 보라. 그는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이다. 그는 열심히 일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개인적인 마약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대는 화가가 될 수도 있고, 시인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그대의 마약이 된다. 그대 자신을 망각하고서 하는 행위, 의식을 잃고 완전히 동일시가 되어 버리는 행위, 주시가 없는 행위는 무엇이든지 다 마약이다. 헤라클레이토는 이것을 '습한 상태' 라고 부른다.                      

 

건조한 영혼만이 하늘로 날라오를 수 있다. 건조한 영혼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하지 못한다. '건조해진다' 는 것은 무슨 뜻인가? 주의 깊게 깨어 있다는 뜻이다. 무엇을 하건 의식적으로 하라. 나는 "이 일을 하지 말라. 저 일을 하지 말라." 고 말하지 않는다. 무엇을 하건 상관없이 더 깨어 있어라. 그러면 모든 행동이 그대를 더 건조하게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이때 초연함이 찾아온다. 주의 깊게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자연적으로 초연해진다.

어떤 일을 하든 잠자듯이 하지 말라. 모든 행동, 생각, 느낌을 관찰하라. 관찰하고 행동하라. 매순간이 소중하다. 이 소중한 순간들을 잠으로 낭비하지 말라. 매순간을 의식적일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면 점점 더 의식이 성장한다. 어느 날 아침, 그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일어날 것이다. 건조하고 초연한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랑하되 집착하지 않는 사람, 세상 속에 있으면서 언덕 위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 역설적인 경지를 이룩해야 한다. 이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언덕 위의 주시자로 남아야 한다.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동시에 세상 속에 있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지혜로운 최고의 영혼이다.

어린아이가 되는 동시에 노인이 되어라. 모든 욕망을 경험하고 끝낸 노인,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 노인,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노인이 되어라. 어린아이처럼 예민하고, 노인처럼 건조해져라. 이것이 지혜의 모든 것이다. 이것이 지혜로워지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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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몇 명의 방문객이 뜻하지 않게 헤라클레이토스를 찾아갔을 때 그는 불가에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여기에도 신은 있다."

나는 나 자신을 탐구했다.

시간은 장기를 두는 아이와 같으니, 왕권이 그의 것이다.

광신은 신격화된 질병이다.

 

원문 이해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지식을 빌려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대 자신을 탐구하는 것이다. 물론 빌려 오는 것은 쉽다. 그러나 빌려 온 것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이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진리는 그대의 것이 되어야 한다.               

내가 진리를 안다 해도 그것을 그대에게 전해줄 수는 없다. 전해 주는 가운데 그것은 거짓이 된다. 이것이 진리의 본성이다. 아무도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진리는 빌려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훔칠 수도 없고 돈으로 살 수도 없다. 그대 스스로 알아야 한다. 그대 스스로 알지 못하는 한 그대의 지식은 앎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무지를 가리는 위장책에 불과하다. 그대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며, 완전히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이다.

진리는 살아 있는 현상이다. 이것을 첫 번째로 기억해야 한다. 누가 그대를 대신해 살아 주겠는가? 그대 스스로 살아야 한다. 아무도 그대를 대신해 살아 줄 수 없다. 다른 사람이 그대를 대신해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대 스스로 사랑해야 한다.

진리는 그대 스스로 살면서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진리는 밖에 있지 않다. 진리는 그대의 내면에서 성장한다. 진리는 물건이나 대상이 아니다. 진리는 그대의 추체성이다.

진리는 그대를 해방시키지만 거짓은 감옥이 된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광신은 신격화된 질병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결코 광신자가 되지 않는다. 그는 이론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는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진리가 다차원적인 얼굴을 갖고 있으며, 그 얼굴을 바라보는 방식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안다. 어떤 사람이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때 그가 보는 것은 모두 개인적인 것이다. 이 개인적인 시각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와 똑같은 사람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개인적인 시각은 독창적이다. 모든 시각, 진리와의 만남 모두가 독특하다.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진리로 가는 길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는 진리의 얼굴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편협한 광신도가 될 수 있겠는가? 그가 "나의 진리만이 진짜다. 나의 신만이 진짜 신이다. 당신의 신은 가짜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말은 진리를 빌려 온 사람들의 말이다. 세상에는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탐구한 적이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진리를 놓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다차원적인 경험, 진리의 다양성을 놓치겠는가? 어떻게 "오로지 나의 진리는 진짜다!" 하고 외칠 수 있겠는가? 진리를 아는 사람은 '나' 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어떻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수 있겠는가? 어떻게 광신자가 되겠는가?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한다.

"여기에도 신은 있다."         

그는 사원에 가지 않았다. 보는 눈을 갖고 있다면, 듣고 느낄 수 있다면 굳이 사원에 갈 필요가 있는가? 이 자리에도 신은 있다.

신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다.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존재계 자체가 신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여기에도 신은 있다" 고 말한다. 이것을 느낄 수 있다면 매순간이 신성하고, 모든 것이 성스럽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성하다. 이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교회에 가고 절에 가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변화가 필요한 것은 그대이지 상황이 아니다. 상황은 똑같다. 절 밖에도 절 안에도 신은 있다. 신은 어디에나 있다. 그런데 그대는 이것을 보지 못하고 장소를 바꾼다. 그대는 집을 떠나 사원에 가서 신을 찾는다.

내적인 변형이 필요하다. 상황을 바꾸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심리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사물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그러면 돌연 세상 전체가 사원이 된다. 사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왕권은 아이의 것이며, 시간은 장기를 두는 어린아이와 같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짤막한 문장 속에 '릴라(leela)' 즉 유희라는 개념을 압축시켜 놓고 있다. 삶은 게임과 같다. 삶을 비즈니스로 만들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삶을 놓칠 것이다. 그대가 삶을 놓치는 것은 이 삶을 비즈니스로 만들기 때문이다. 삶은 놀이다. 놀이를 즐겨라. 무엇인가 달성하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어린아이처럼 되어라. 그는 놀이를 통해 무엇을 성취할 것인지 걱정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은 게임에서 져도 팔짝팔짝 뛰면서 즐거워한다. 놀이에서는 실패해도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삶이 놀이라면 져도 지는 것이 아니다. 반면, 삶이 비즈니스라면 승리해도 지는 것이다. 나폴레옹과 알렉산더를 보아라. 승리마저 패배다. 그들이 결국 무엇을 발견했는가? 아무리 이겨도 아무것도 성취되지 않는다. 간절하게 바라던 목적을 이룬 후에 느끼는 것은 좌절감뿐이다. 삶 전체를 잃은 것이다.

명심하라. 어떤 목적을 추구하면 삶 전체를 잃을 것이다. 삶에는 아무 목적도 없다. 삶은 목적 없는 놀이다. 삶은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다. 그저 삶 자체를 즐길 뿐이다.

이것은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의 마음은 수학적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삶의 목적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삶에는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다. 마음은 즉각 "삶에 아무 의미도 없다면 왜 사는가? 왜 자살하지 않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러나 보라. 의미가 있으면 모든 것이 추해진다. 삶이 사업처럼 된다. 목적이 있으면 삶 전체가 시(詩)를 잃어버린다.

삶에 시가 존재하는 것은 이 삶에 아무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장미꽃은 왜 피어나는가? 장미꽃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도 모른다. 하지만 피어나는 것 자체가 아름답지 않은가? 왜 이유를 알아야 하는가? 피어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다."

새들에게 왜 노래하는지 물어 보라. 새들은 이렇게 터무니없는 질문을 하는 그대를 보고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노래하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다.              

이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왜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가? 마음은 목적을 추구한다. 항상 무엇인가 성취하려고 한다. 마음은 단순하게 즐기지 못한다. 장래에 성취해야 할 무엇인가 있어야 한다. 도달할 목적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마음이 편안함을 느낀다. 아무것도 성취할 것이 없을 때 마음은 제풀에 지쳐 쓰러진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기울여야 하는 모든 노력이다. 마음이 쓰러지게 하라.

삶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다. 도달할 목적지가 없다. 지금 이 순간 존재계 전체가 즐거움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그대를 제외한 우주 만물이 축제를 벌이고 있다. 왜 여기에 동참하지 않는가? 왜 목적 없이 피어나는 꽃이 되지 않는가? 왜 의미 없이 흐르는 강처럼 되지 못하는가? 왜 포효하는 바다, 즐거움에 넘실대는 바다처럼 되지 못하는가?

시간에 대해서도 헤라클레이토스는 수학적 이론을 전개하지 않는다. 그는 시간이 장기를 두는 아이와 같다고 말한다. 낮과 밤이 움직인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시간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간다고 믿지 않는다. 시간은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수레바퀴와 같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시간이 직선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면의 세계를 아는 사람들은 시간이 수레바퀴와 같다고 말한다. 시간은 직선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원을 그리며 돈다. 과학자들이 시간을 직선적인 것으로 보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 그들은 전체를 보지 못한다. 부분을 볼 뿐이다. 과학적인 마음은 모든 것을 분류하고 세분화시킨다. 그래서 과학자는 부분만을 본다.             

 

그리고 이 부분마저 더 작은 부분으로 나눈다. 그는 계속해서 나눈다. 그는 전체를 볼 수 없다. 과학의 원리 자체가 그로 하여금 한 부분을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든다. 그는 점점 더 분명히 보게 되는 반면 점점 더 부분에 국한된다. 그의 시각은 명확하고 치밀해지지만 대상물은 점점 더 작아진다. 그리하여 그는 가장 작은 부분인 원자에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시간에서는 가장 작은 부분인 '찰나' 에 도달한다.

원의 극히 일부만 놓고 보면 직선처럼 보인다. 그러나 원은 광대하다. 이 지구와 같다. 땅 위에서 선을 긋고 그 선을 직선으로 생각한다면 그대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둥근 지구 위에서 어떻게 직선을 그을 수 있겠는가? 그 선을 계속 연장하면 곡선이 될 것이다. 지구 전체를 돌아 하나의 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직선은 이 거대한 원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은 전체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시간이 직선적인 것으로 보인다. 종교는 전체를 본다. 과학은 숲을 못 보고 나무를 보지만, 종교는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본다. 전체를 보면 모든 것이 원형(圓形)이다. 시간 또한 원을 그리며 움직인다. 시간은 게임이다. 아무 데로도 가지 않고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게임이다. 이것을 알면 마음의 긴장이 떨어져 나간다. 미래의 어딘가에 도달한다는 것이 무의미해진다. 이때 그대는 순간을 즐기기 시작한다.

삶은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달성하려는 노력이 아니다. 삶은 즐거운 축제다.

LIST

원문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임의적인 추측을 만들지 말라.

많은 학식도 이해를 가르쳐 주지는 못하네.

금을 찿는 사람들은 깊이 땅을 파헤치지만 얻는 것은 거의 없으라.

모든 길을 여행해 보아도 영혼의 한계를 발견할 수는 없으리니, 그 의미는 너무나 깊고 깊어라.

 

원문 이해

 

그대의 마음을 관찰해 보라. 종교적으로 될 수 있었던 기회를 마음이 얼마나 많이 빼앗아 갔던가? 꽃을 볼 때 그대는 즉시 꽃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을 살지 못한다. 꽃이 활짝 피어 있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현상이다. 하나의 기적이다.

과학자들은 삶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삶이 존재해야만 하는 아무 이유도 없다. 수많은 행성들 중에            

이 작은 지구 위에만, 그것도 수 천년 동안만 삶이 존재했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다. 이 생명이 언제까지 존재할지, 그 목적과 운명, 근원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과학자들은 기껏해야 이 삶이 기적이며 우연한 일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꽃은 기적이다. 이 죽어 있는 우주 속에서, 바위 덩어리에 불과한 무수한 행성들 가운데 작은 씨앗이 싹터 식물이 되고 삶을 즐긴다. 한 송이 꽃이 피어나는 데, 그저 생각하고 말하는 데 그친다. 그대는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놓친다.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대는 침묵할 것이다. 무엇인가 엄청난 것을 느낄 때 그대는 경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 순간에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말은 천박한 것이다. 그 순간에 말을 하는 것은 순전히 어리석은 짓이다. 말을 함으로써 그대는 그 순간을 놓친다.

침묵하라. 그 순간을 먹고 마셔라. 그 꽃이 그대 내면에 퍼져 나가도록 하라. 이때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성이 사라진다. 이것은 아주 미묘한 현상이다. 그대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니며, 꽃은 더 이상 객체가 아니다. 경계선이 허물어진다. 갑자기 꽃이 그대 안에 있고, 그대가 꽃 안에 있다. 삶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대 또한 꽃이다. 의식은 꽃이다. 꽃 또한 살아 있는 의식이다. 꽃과 직접 만나라.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라. 그러면 무엇이 진정한 꽃인지 알게 된다. 그대가 안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대의 앎을 이론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진정으로 무엇인가 알 때, 그 앎의 주변에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경험은 끝없이 광대한데 이론은 너무나 협소하다. 철학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그대가 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철학자와 종교적인 사람은 길을 달리한다. 철학자는 계속 생각하고 말하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심화시킨다. 이렇게 경험을 심화시키다 보면 그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 온다. 철학자는 결국 하나의 에고로 굳어지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어디에도 그를 발견할 수 없다.

마음이 무엇을 하겠는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아주 불합리하게 보인다. 이 광대한 존재계를 머리로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모든 노력이 헛되다. 머리를 통해서 보지 말라. 머리를 버리고 직접 보라! 그러면 그대 또한 광대한 존재가 된다. 그대가 작아진 것은 머리를 통해서 보기 때문이다. 머리의 협소함 때문에 그대 또한 협소해진 것이다. 머리를 버려라! 머리 없이 직접 존재계를 보라. 이 말은 마음속에 아무 생각도 없이 완전히 깨어 있는 의식으로 보라는 뜻이다. 이론화시키지 말고 직접 삶을 살라는 뜻이다.

우리의 추측은 모두 임의적인 것이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                  

"신이 존재하는가?" 하고 물으면 그대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만일 "존재한다" 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그대의 추측일 뿐이다. 그대는 정녕 신이 존재하는 것을 아는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대답해도 역시 추측일 뿐이다. 그대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녕 아는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긍정해도 틀리고 부정해도 틀린다.

그런 까닭에 붓다는 침묵을 지켰다. 신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그는 신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질문이 어리석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어리석은 질문에 대답하는 것 또한 어리석다는 것을 안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안하고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모든 것이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존재계는 경험을 필요로 한다. 학식은 앎이 아니다. 앎이란 직접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다. 앎은 스스로 얻은 것이지만 학식은 남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진정으로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는 모른다. 그저 믿을 뿐이다. 그러나 명심하라. 믿음은 도움이 안 된다. 믿음은 학식의 일부다. 신뢰는 전혀 다른 것이다. 어떤 것을 직접 맛보았을 때 신뢰가 생겨난다. 믿음은 앎을 대신하기 위한 대용품일 뿐이다. 사실, 믿음은 결코 앎을 대신하지 못한다. 그대는 태양을 믿지 않는다. 그대는 태양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안다. 그대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믿는가? 아니다. 그대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안다. 지금 그대는 이 자리에 앉아 있다. 그것을 믿는가?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안다. 그런데 그대는 신을 믿는다. 모르기 때문이다.                   

무지는 믿음이 될 수도 있고, 불신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무지는 변함이 없다. 앎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지식이 아니라 앎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앎은 과정이지만 지식은 이미 끝난 것이다. 지식은 고정된 사물과 같다. 그것은 소유할 수도 있고 조작할 수도 있다. 지식은 완제품이다. 그러나 앎은 하나의 과정이다. 앎은 끊임없이 흐르는 강과 같다. 그것은 소유할 수도 없고, 끝났다고 말할 수도 없다. 존재계는 영원하다. 어떻게 앎이 끝날 수 있겠는가?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알았다!" 고 자신하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그런 지점은 결코 오지 않는다. 명심하라. 삶은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진행 중인 과정이다. 삶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움직인다. 삶은 항상 현재에 있다.

많은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일이 일어난다.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은 점점 더 각성이 줄어든다. 그는 실제 상황이 아니라 지식을 통해 행동한다. 그는 어리석어지고 바보같이 행동한다. 지혜롭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현재 상황에 대한 감응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죽은 과거를 통해 행동한다.

경이와 신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놀라지 않는다. 그들을 놀래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그들은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안다. 모든 것을 아는데 어떻게 경이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경이감을 느낀다. 이것은 예수가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며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고                   

말한 뜻이다. 왜 그런가? 경이감이 신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며, 오직 순수한 가슴만이 경이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순수한 가슴을 갖고 있을 때 그대는 경이감을 느낀다. 모든 것이 그대를 놀라게 한다. 나비 한 마리도 신비롭게 보인다.

장자가 나무 밑에 앉아 있다가 두세 마리의 나비가 서로를 뒤쫓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보고 그는 짤막한 시를 지었다.

"내게는 이 나비들이 꽃처럼 보인다. 시들어서 땅에 떨어졌던 꽃들이 돌아왔다. 이제 그들이 나무 위에 돌아왔다."

이런 사람은 신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대는 안 된다. 누군가 나비에 관해 물으면 그대는 즉시 책을 펼쳐 들고 나비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대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가? 말로 표현된 것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가?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 영원히 말로 표현되지 않을 그 무엇, 아무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만일 모든 것이 말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경이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이 때 그대는 경이감을 잃어버릴 것이다.

이 시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은 것을 알지만 한편으로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신과 멀어졌다. 지식이 산처럼 쌓이고 도서관은 날로 커져간다. 사람들은 수많은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지식을 강요한다. 그들이 앎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그들의 경이감이 자라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그들이 더욱더 신비감에 휩싸이는 것을 방해한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그들은 더 많은 신비감을 느껴야 한다. 꽃과 나비와 바위를 보고              

감동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지식으로 가득 채워 놓는다.

이 학식 있는 자들은 땅을 깊이 파고 들어가지만 거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산 전체를 무너뜨리고는 생쥐 한 마리 밖에 찾지 못한다. 그들이 무엇을 얻었는가? 그들은 금을 찾는 도굴꾼과 같다.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 그저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헤라클레이토스는 '금' 이라는 상징을 사용한다. 금이 무슨 가치를 갖는가? 그대가 금에 부여한 가치는 하나의 약속일 뿐이다. 우리가 금에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금 자체가 본래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금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동물들은 금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개에게 금과 뼈다귀를 던져 주면 그는 당연히 뼈다귀를 선택할 것이다. 개는 그대의 황금에 아무 관심도 없다. 금이 무슨 가치를 갖는가? 금 자체에 내재된 가치가 있는가? 아무 가치도 없다. 금의 가치는 사회적인 투영일 뿐이다.

그대가 금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금이 가치를 갖는 것이다. 그대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가치 있게 된다. 금을 찾는 사람들이 깊이 땅을 파헤치지만 거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이것이 지식을 파헤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들은 경험, 진리, 삶을 파헤치지 않는다. 삶이 곧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론과 지식을 통해 파헤칠 수 있는 진리는 모두 죽은 것이다.

이 세 단어를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첫 번째 단어는 '기지(旣知)'다. '기지'

 

는 이미 알려진 것이다. 그 다음에 '미지(未知)'라는 단어가 있다. '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과학은 존재계를 이 두 단어, 즉 기지와 미지로 나눈다. 기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미지는 앞으로 우리가 알게 될 것이다.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데 종교는 이 세상을 세 단어로 나눈다. 기지와 미지 그리고 불가지(不可知)이다.

불가지의 영역을 완전히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지의 차원은 항상 알려지지 않은 채 남을 것이다. 불가지의 차원은 그 본질상 마음이 다룰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다. 이 차원은 광대하고 무한하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전체다. 어떤 식으로든 부분이 전체를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부분이 전체를 담을 수 있는가? 마음이 솟아났다가 회귀하는 근원이 있다. 이 근원을 마음이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절대 불가능하다. 우리가 온 그곳을 우리가 알 수 있겠는가? 우리는 파도와 같다. 파도가 바다 전체를 담을 수 있는가? 물론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바다는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저 웃을 뿐이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부모 앞에서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다.                  

부모는 그저 웃는다. 이해될 수 없는 차원, 불가지의 차원이 있다.

모든 길을 여행해도 그대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길이 하나로 합쳐지지만 그대는 결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삶에는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삶은 축제다. 아무 목적도 없다. 삶은 특정한 목적지로 가지 않는다. 단지 가는 것을 즐길 뿐 특정한 목적지가 없다. 삶은 놀이이며 게임이다. 삶을 심각하게 대하지 말라. 심각하면 삶을 놓친다. 진지하되 심각하지는 말라. 심각함과 진지함은 전혀 다른 것이다. 심각할 때 그대는 목적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한다. 수단과 목적이 구분되고, 방법과 성과가 구별된다. 그대는 야망으로 가득찬다. 심각함은 야망이다. 그것은 질병이다. 심각함은 머리에 속한다. 그러므로 심각한 사람, 생각이 많은 사람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웃지 못한다. 그는 놀이를 즐기지 못한다. 왜냐 하면 그는 언제나 "이 놀이를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삶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진지한 사람은 전혀 다르다. 진지함은 가슴에 속한다. 그는 진실하지만 심각하지 않다.             

그는 추구하지만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의 추구는 어린아이의 놀이와 같다. 발견해도 그만, 발견하지 못해도 그만이다. 어린아이를 보라. 그는 강아지를 쫓아 달리다가 중간에 나비를 발견한다. 그러면 즉시 방향을 바꾸어 나비를 쫓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 옆에 피어 있는 꽃을 발견한다. 이제 그는 나비를 잊고 꽃에 전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심각하지 않다. 그러나 매우 진지하다. 그는 강아지와 나비를 잊었다. 이제는 꽃이 전부다. 어떤 것에 전적인 관심을 쏟을 때, 그것이 진지함이다. 어떤 것을 수단으로 보고 관심을 기울일 때 그대는 교활하다. 그대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대가 관심을 갖는 것은 수단에 불과하다. 그대는 착취한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길을 이용한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는 길이 목적지다. 종교적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디에 있건 그곳이 목적지다.

내가 어떤 사람이건 이 사람이 목적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의 삶 전체가 내게 집중되어 있다. 달리 갈 곳이 없다. 이 순간을 전체적으로 즐기고 누려야 한다.

LIST

원문

 

신은 낮인 동시에 밤이며 겨울인 동시에 여름이다.

그는 전쟁인 동시에 평화이며 풍족함인 동시에 결핍이다.

바닷물은 순수한 동시에 불결하다.

물고기에게는 마실 수 있으며 유익한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마실 수도 없고 치명적인 것이다.

낮과 봄의 본질은 하나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하나같이 똑같다.

잠자는 사람들도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에 동참하고 협조한다.

원 안에서 시작과 끝은 하나다.

 

원문 이해

 

신은 인격체가 아니다. 인류는 신을 인격체로 간주함으로써 많은 문제를 빚어 왔다.               

신을 인격체로 보는 것은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다. 우리는 신을 우리 자신의 모습대로 묘사한다. 물론, 신은 완벽한 모습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대의 형상이 신이 될 수는 없다. 그대는 한 부분에 불과하다. 이 거대한 존재계에서 그대는 아주 작은 부분, 하나의 원자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부분적인 형상 속에 전체를 끼워 넣을 수 있겠는가? 전체는 부분을 초월한다. 전체는 무한하게 넓다.

신을 그대의 형상에 따라 인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대의 형상을 버려야 한다. 형상이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그대는 거울이 되어 신을 반영할 수 있다.

신은 에너지다. 신은 절대적인 각성이다. 신은 지복이며 환희다. 정의될 수도 없고 한계도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영원히 존재한다. 신은 전체를 의미한다.

전체는 인격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을 첫 번째로 이해해야 한다. 아주 깊이 이해해야 한다. 단지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가능한 한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신을 전체로 인식하고 느낄 수 있다면 그대의 기도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이때 그대의 기도는 어리석은 기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때 신은 그대의 편에 설 수 없다. 그는 모두의 편이다. 신은 그대와 함께 있는 것처럼 그대의 적과도 함께 한다. 신은 성자 안에 있듯이 죄인 안에도 있다. 신은 모든 것이다. 그는 빛 속에 있듯이 어둠 속에도 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대립되는 모든 것이 그 안에서 만나 하나가 된다.

신은 나뉘어질 수 없다. 그는 불가분의 존재댜. 첫째로, 그는 인격체가 아니다. 그리고 명심하라. 그대 또한 인격체가 아니다. 그대가 인격체로 보이는 이유는 그대가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인격체는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순간이 온다.

이런 까닭에 선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도의 길로 들어가기 전에 강은 강이고, 산은 산이다. 도의 길로 들어서면 강은 강이 아니고, 산은 산이 아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달하면 다시 강은 강이고, 산은 산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그들은 모든 것이 흐릿해지는 시기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흐릿해졌을 때 그대는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 절망적인 상태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아이덴티가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아이덴티를 얻게 된다. 기존의 아이덴티는 형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아이덴티는 형상이 없을 것이다.

신에 대한 모든 개념을 버려라. 그래야만 첫걸음을 뗄 수 있다. 아무런 개념도 없이, 아무 옷도 걸치지 않고 발가벗은 채 신에게로 가라. 아무런 관념도 없이 텅 빈 가슴으로 신을 향해 나아가라.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텅 비었을 때 그대는 신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이 된다. 필요한 것은 수용성뿐이다. 개념도, 철학도, 이론도 필요 없다.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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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이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들, 중용을 지키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중용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덕이다.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행하며, 사물의 본질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데 지혜가 있나니.

로고스가 아니라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만물이 하나임을 시인하는 것이 지혜다.

지혜은 하나다. 만물을 조정하는 지성, 만물을 통하여 그 지성을 아는 것이 지혜다.

지혜는 유일무이하다. 이지혜는 제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라지 않는 동시에 또 그렇게 불리기를 원한다.

 

원문 이해

첫째,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본래는 이렇게 어려워서는 안 된다. 이것은 가장 쉬운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대는 '자기에 대한 무지'에 너무나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그대 자신과 마주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사회와 국가, 종교헤 의해 인정받는 그대의 삶 전체가 '자기에 대한 무지'에 기초하고 있다.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살아간다. 사회가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에 위험한 일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혁명적일 수 밖에 없다.

지식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혁명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지식은 대학이나 경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나는 그대 자신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그대 자신과 마주쳤을 때 저절로 생겨나는 지식, 완전히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사회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의 눈을 통해 보듯이 그대 자신을 보았을 때 생기는 지식, 문명화되고 세뇌되고 교육받은 모습이 아니라 야생화 같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보았을 때 생기는 지식, 내가 말하는 지식은 이런 것이다.

사회는 그대를 혁명가가 아니라 로봇처럼 만들려고 한다. 이것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로봇을 다루는 것은 쉽다. 그러나 자신을 아는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회는 지배를 원한다. 특권층은 그대를 지배하고 억압하고 착취한다. 그들은 그대가 자신에 대해 무지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첫 번째 난관이다. 인간은 사회에 태어날 수밖에 없다. 부모, 선생, 성직자 등 모두가 사회의 일부이다. 사회가 사방에서 그대를 애워싸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탈출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해 보인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문을 어디에서 발견할 것인가? 그대는 사방으로 포위되어 있다.

두 번째 난관은 그대 자신에게서 온다. 그대 또한 타인을 억압하고 지배하기를 원한다. 그대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이 두 번째 어려움은 첫 번째 난관보다 더 심각하다. 타인을 지배하기 원하면 그대 자신이 지배당할 것이다. 타인을 착취하려고 하면 그대 자신이 착취당할 것이다. 누군가를 노예로 삼으려고 하면 그대 자신이 노예가 될 것이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것이 자신에 대한 앎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이런 장애물만 없다면 자신에 대한 앎은 세상에서 가장 간단하고 쉬운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두가지 장애물을 주시하라. 그리고 그대 자신을 버리는 것으로 시작하라. 먼저 지배와 착취, 소유에 대한 욕구를 버려라. 그러면 사회의 올가미에서 순식간에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에고(ego)가 문제다. 이것이 그대 자신을 알지 못하는 이유다. 에고는 그대 자신에 대한 거짓된 이미지를 준다. 그대는 이 것짓된 얼굴에 너무 많은 투자를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고상하게 생각한다. 자신에 대해 그렇게 허구적인 개념을 갖고 있다.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이 거짓된 이미지를 버려야 한다. 그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자신을 한 꺼풀만 벗겨 보면 질투와 소유욕, 증오심, 분노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있다.

수천 년 동안 여러 붓다들이 "너 자신을 알라"고 누차 일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을 아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자신의 추함과 마주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 추함을 통과해야 한다. 그대의 내부에는 아름다운 존재가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존재는 외곽에 있지 않다. 그것은 중심에 있다. 그리고 중심에 도달하려면 외곽을 통과해야 한다. 추한 모습들에서 도망쳐서는 안 된다. 도망칠 방도가 없다.           

그 추한 모습들을 통과해 들어가야 한다. 온갖 추함과 부정적인 면들, 증오, 질투, 공격성 등을 통과해야 한다. 기꺼이 이 외곽을 통과해 들어갈 준비가 되어야만 중심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시간의 세계, 인간의 역사 전체를 통과해야 한다. 이 역사는 그대의 몸과 마음, 두뇌의 세포 하나하나에 깊이 박혀 있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과거 전체가 그대와 함께 있다. 이 과거를 통과해야 한다.

사람들이 헤라클레이토스, 노자, 붓다, 예수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실행에 옮기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실행에 옮긴다. 실행에 옮길 준비가 되어 있다면 먼저 그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해야 한다. 행복해지려는 욕망만으로는 도움이 안된다. 행복해지려는 욕망이 아니라 진리를 알려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

진리와 하나가 되었다고 느낄 때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다. 이때 그대는 어떤 리듬을 느낀다. 이 리듬이 행복이다. 처음부터 직접 행복을 찾을 수는 없다.

진리를 구하려면 그대 자신이 진실해야 한다. 존재계에서 진리를 추구하려면 먼저 그대 안의 진실을 찾아야 한다. 이를 통해 그대는 더욱더 '자기기억'을 많이 하게 된다.       

이것이 두 가지 길이다. 자기 망각은 세속의 길이며, 자기 기억은 신의 길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절대로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다. 반면, 행복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진리를 추구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행복을 발견했다. 이것이 행복의 역설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첫 번째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실이 있다. 자신에 대한 앎을 유일한 탐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헤라클레이토스가 강조하는 것이 있다. 극단으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면 자신에 대한 앎이 쉽게 얻어진다는 것이다.

중간에 머물면 마음이 사라진다. 극단에 있을 때 마음이 존재한다. 극단에 있을 때에는 거듭해서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식을 할 때 그대는 단식에 대해 생각한다. 단식할 때는 음식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적당량만 먹는다면, 정중앙에 존재한다면 생각할 것이 무엇인가? 중간에 있는 사람은 생각할 것이 없다. 그는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잠 잔다. 이것으로 끝이다! 거기에 생각할 것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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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인간은 잠들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깨어 있는 동안에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식하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귀머거리와 같다. 아무리 그들이 듣는다 해도 그들에게는 이런 말이 어울린다.

"그들은 어디에 있건 그 자리에 있지 못하네."

 

잠든 것처럼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

 

깨어난 사람들은 공통된 하나의 세계를 갖지만 잠자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사적인 세계를 갖는다.

 

깨어 있을 때에는 무엇을 보든 죽음이고

잠자고 있을 때에는 무엇을 보든 꿈이다.  

원문 이해

 

잠을 잘 때 그대는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깨어 있는 동안에는 주변에 벌어지는 일을 자각하는가?

마음에 대해 많은 연구가 행해졌다. 그 결과에 따르면 외부에서 오는 정보의 98퍼센트가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오직 2퍼센트만이 마음속으로 들어가며, 그 2퍼센트 또한 그대의 해석을 거친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그대는 다른 말로 듣는다. 내가 어떤 말을 하면 그대는 그 말을 해석해서 자신의 잠이 방해받지 않도록 한다. 마음이 즉각 해석을 가한다. 그대는 마음속에 자리를 마련하고 그 말을 받아 들인다. 그 말은 그대의 일부가 된다. 이것이 그대가 붓다, 그리스도, 헤라클레이토스를 계속 놓치는 이유다. 그들은 자신이 발견하고 경험한 바를 계속 들려준다. 하지만 그대는 그 말에 즉각 해석을 가한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속임수를 쓰고 있다.

그대는 어디에 있건 그 자리에 있지 못하다. 그대가 있는 곳이 그대가 부재(不在)하는 곳이다.  

그대는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다. 자기 자신이 있는 그곳에 존재하지 못하다.

이것이 잠이다. 현재 순간에 있지 못하는 것,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지 않고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이것이 잠이다.

꿈은 사적인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사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진리는 개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진리는 내 것이나 네 것이 될 수 없다. 진리는 기독교인이나 힌두교인의 것, 또는 인도인이나 그리스인의 것이 될 수 없다. 진리는 사적인 것이 아니다. 반면 꿈은 사적인 것이다. 사적인 것은 무엇인든지 꿈의 세계에 속한다. 진리는 활짝 열린 하늘이다. 이 하늘은 모두의 것이다. 하늘은 하나다.

노자의 말이 다르고, 붓다의 말이 다르다. 헤라이클레이토스의 말도 다르다. 그러나 그들이 의미하는 뜻은 똑같다. 그들은 똑같은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사적인 세계에 살지 않는다. 그들의 꿈과 욕망, 마음이 사라짐과 아울러 사적인 세계 또한 사라졌다. 마음은 사적인 세계를 갖는다. 그러나 의식의 차원에는 사적인 세계가 없다.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하나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들 모두가 하나의 세계를 갖고 있다. 이것이 실제의 존재계이다.           

그러나 깊이 잠들어 꿈꾸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 그대의 세계를 버려야 한다.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요구하는 단 하나의 포기이다. 나는 그대의 아내를 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직장과 돈을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사적인 꿈의 세계를 버리라고 말한다.

버려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다. 어떻게 이 세상을 버릴 수 있는가? 히말라야도 이 세상에 속한다. 그러나 진짜로 포기해야 할 세상은 마음이다. 개인적인 꿈의 세계를 버려야 한다. 꿈의 세계를 포기하면서 시장 바닥에 앉아 있어도 히말라야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마음의 세계, 꿈의 세계를 버리지 못한다면 그대는 히말라야로 들어가서도 사적인 세계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인간은 꿈의 구름 층에 싸여 있을 때는 죽음을 직시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직시해야만 종교적이 된다. 그 전에는 안 된다. 죽음을 직시할 때,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할 때, 자신의 주변에 꿈의 구름층을 형성하지 않고 죽음과 정면으로 만날 때, 이때 문득 그대는 죽음이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죽음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삶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죽음을 향해 갈 수 밖에 없는 삶이라면 순간 순간을 미련 없이, 후회 없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미련, 후회가 없으니 죽음이 두려우랴! 삶은 곧 죽음의 연속인 것을! 삶은 끝없는 죽음의 순간 순간이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살아라.

순간에 존재하라. 이 순간 속에 전체적으로 존재하라. 과거의 간섭을 허락하지 말라. 미래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죽었다.

긴장하지 말라. 지금 여기를 놓쳤다고 느낄 때마다 즉시 현재로 돌아오라. 그것이 전부다. 죄책감을 갖지 말라. 그것은 마음의 속임수다. 다시 마음이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후회하지 말라. "나는 또 잊었다."고 느낄 때마다 그대가 하고 있는 일로 돌아오라. 목욕을 할 때에는 목욕하는 순간으로 돌아오라. 식사를 할 때에는 식사를 하는 순간으로 돌아오라. 산보를 할 때에는 산보하는 순간으로 돌아오라.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순간 즉시 돌아오라. 그저 돌아오면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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