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이 로고스가 영원히 옳다 하여도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듣기 전에도 이해하지 못하고 듣고 난 후에도 이해하지 못한다.
만물에 공통되는 것, 우리는 그것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로고스는 만물에 공통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독자적인 지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인간의 본성은 진정한 이해가 없다. 신의 본성만이 그런 이해를 갖고 있다.
인간은 사물의 도리를 알지 못한다. 그를 애워싸고 있는 것만이 지성적이다.
인간은 신성한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의심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은 로고스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스스로 로고스에 대항한다.
결코 없어지지 않는 것으로부터 어느 누가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
원문 이해
로고스(logos)는 우주 전체, 이 존재계 자체의 논리다. 로고스는 궁극적인 법칙이다. 이것을 노자는 '도(道)' 라고 했으며, 우파니샤드와 베다에서는 '리트(rit)' 라고 불렀다.
로고스는 모든 곳에 현존한다. 나무 안에, 돌 속에, 하늘에, 모든 곳에 로고스가 있다! 그대 안에, 그대 주변의 모든 것 안에 로고스가 현존한다. 삶은 대립을 통해 움직인다. 삶은 변증법적이다. 삶은 대립을 통해 풍성해진다. 삶은 대립을 통해 더 나은 종합으로 나아간다.
듣는 것만으로는 도움이 안된다. 그대 자신이 변해야 한다. 내면의 문을 열어야 한다.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껴야 한다. 로고스를 통해 존재하고, 그것을 음식처럼 흡수하고 소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그것이 그대의 피 속에 흐르고 그대 존재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가 불가능하다.
로고스는 이론이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내적인 성장이 필요하다. 로고스는 만물에 공통된다. 로고스는 만물의 공통된 기반이다. 로고스는 공통된 대륙이다. 그런데 그대는 자신을 타인과 분리된 외딴 섬으로 생각한다. 그대는 자기만의 지성을 따른다. 이것이 모든 어리석음의 기본이다. 존재계는 전체다. 지성 또한 전체다. 지성은 전체에 속한다. 그러므로 공통된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만물의 공통성을 찾아라. 공통된 것을 발견하라. 공통된 것일수록 진실하다. 그리고 예외적인 것일수록 더 거짓이다. 평범해져라. 그러면 근본에, 진리에 더 가까워진다. 만일 절대적으로 평범해질 수 있다면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매순간이 은총으로 충만해진다. 절대적으로 평범할 때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음식을 먹으면 먹는 행위 그 자체가 신성한 의식(儀式)이 된다. 잠을 잘 때에는 그 잠이 신성한 의식이 된다.
그댄느 태양 아래 걷는다.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그대는 숨쉰다. 행복해지는 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그대는 사랑한다.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하는가? 모든 것이 이미 주어졌다. 예외적인 인물이 되려고 하는 그대의 마음이 문제다. 법칙을 따르라. 만물에 공통된 것을 따르라. 특별한 인물이 되려고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불행해질 것이다.
우리는 전체에서 왔다가 전체로 돌아간다.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왔다가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이 과정 전체가 신비에 싸여 있다. 그러니 어떻게 그대만의 개인적인 지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것은 다소 어려운 말이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라.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중의 하나이다. 의식 또한 공통적인 것이다. 물고기들이 깊은 바다에 살듯이, 우리는 공통된 의식 속에 존재한다. 그대의 의식과 내 의식은 둘이 아니다. 똑같은 의식의 두 센터일 뿐이다. 그러므로 간혹 우리는 공통된 기반을 느낀다.
어떤 사람이 슬프다고 하자. 그는 그대에게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곁에 앉는 것만으로 그대는 갑자기 슬픔이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의식은 공통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존재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지금 일어나는 일 뿐만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바로 이 순간에 존재계 전체가 한데로 모이기 때문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이 순간에 집결되어 있다.
개인적인 지성은 불가능하다. 재능이 탁월한 사람들,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그것을 느낀다. 아인슈타인이나 규리 부인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그것을 느낀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에 발견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무엇인가 그를 사로잡고 있는 순간에 발견이 이루어졌다. 그 순간에 전체적인 의식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시인들에게 물어 보라. 영감이 일어날 때마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적 의식이 그들을 사로잡고, 그들은 단순히 매개체가 된다.
큐리 부인은 노벨상을 탔다. 그러나 이 노벨상은 보편적 기반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녀는 특정한 수학적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2년여를 노심초사했지만 해결책을 찿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연구에 지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 속에서 무엇인가 일어났다. 잠 속에서 사람들은 더 열린다. 잠 속에서 그대는 에고이스트가 아니다. 그대는 아무것도 아니다. 잠 속에서 그대는 개체성에 매달리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생기와 활력을 느끼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잠을 자는 동안 그대는 보편적 기반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대는 전체적인 의식의 바다에 들어가 있었다. 개인적 지성의 틀에 갇혀 있지 않았다. 잠시 동안 그대는 전체 안에 들어가 있었으며, 이 전체가 그대를 소생시키고 생기를 불어넣었다.
밤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 큐리 부인은 자다가 일어나서 책상 앞으로 갔다. 그리고 수년 동안 고심하던 문제의 해결책을 노트에 적었다. 그 다음에 그녀는 다시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는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은 다음 책상 앞에 가 앉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토록 찾던 해답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것을 누가 써 놓았을까? 이곳엔 나밖에 없는데..." 하고 의아해 했다. 간혹 하녀가 들락거리긴 했지만 그 하녀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큐리 부인이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려고 노트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자신의 필체였다. 잠결에 쓴 것이기 때문에 약간 다르긴 했지만 자신의 필체가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눈을 감고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려고 했다. 그리고 꿈처럼 일어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자다가 일어나서 노트에 무엇인가 적은 것이다.
보편적 의식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대는 이것을 그대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 의식은 결코 그대의 것이 될 수 없다. 이 의식은 항상 우주 공간을 떠다닌다. 그대 주변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 더 열려 있어라. 모든 것을 내맡기고 수용하라. 전체가 되어야만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부분이 어떻게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명상의 모든 것이다. 명상이란 전체가 그대를 통해 흐르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명상 속에서 그대는 사라진다. 문득 그대는 전체가 된다.
그대는 지성적이지 않다. 그대를 에워싼 바다,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것, 그대의 내면에도 있고 밖에도 있는 그것이 지성적이다. 그러나 그대는 아니다. 그대는 하나의 오류(誤謬)에 불과하다.
그대는 의심한다.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성한 것이 그대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그대의 의심 때문에. 단 하나의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의심이다. 그리고 단 하나의 문이 있다면 그것은 신뢰이다. 자연을 신뢰할 때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간다. 그러나 자연을 신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된다.
자연적이 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울까?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 자연적이 되면 그대는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 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 다른 어려움은 없다. 성욕이 일어날 때 그대로 따르다. 금욕주의는 자연에 대한 투쟁이다. 배가 고플 때는 먹어라. 단식은 자연에 어긋난다. 그대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에도 먹는다. 이 또한 자연에 어긋난다. 그대는 섹스를 원하지 않을 때에도 아내와 사회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섹스를 한다. 이것은 자연에 반하는 행동이다. '자연스럽다' 는 것은 그대의 내적인 존재를 따르는 걸 의미한다. 어떤 느낌이 오건 거기에 에고를 개입시키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자연적인 길이다. 이 길을 가다 보면 그대의 에고는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동물처럼 살아라. 단 하나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다. 동물처럼 살되 깨어 있으라.
자연과 싸우지 말라. 자연을 관조하면서 그대로 허용하라. 자연이 그대를 어디로 인도하건 좋다. 마음이 만들어 낸 목표는 모두 허구다. 그런 목적을 갖고 있는 한 그대는 무엇을 하건 성공할 수 없다. 결국 자연이 이긴다. 오직 전체만이 성공할 수 있다. 그러니 처음부터 부질없는 싸움을 벌이지 말라.
자연을 허용하면 궁극의 목적지에 이른다. 인위적으로 해야 할 일은 없다. 자연은 이미 모든 것을 구비하고 있다. 그대는 한 알의 씨앗이다. 그대 안에 설계도 전부가 들어 있다. 우리는 땅에 씨앗을 뿌린다. 씨앗은 나무에 대한 모든 청사진을 갖고 있다. 나무의 골격, 앞으로 피어날 꽃과 이파리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씨앗은 나무가 될 조감도를 갖고 있다. 자연이 허용하기만 하면 된다. 씨앗은 우주적 의식에 의존한다. 씨앗은 개인적인 지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인간은 신이 될 청사진을 갖고 있다. 인간은 신의 씨앗이다. 인간의 의식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이 의식이 성장하고 성장하여 우주가 되는 지점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대 쪽에서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수련도 필요 없고, 교리나 강령도 필요 없고, 종교도 필요 없다. 자연으로 충분하다! 이 자연을 허용하기만 하면 된다. 자연을 신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신뢰를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다.
신뢰가 생명이다. 신뢰가 커질수록 더 풍요로운 삶이 그대 앞에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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