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의 지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혜_17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_3 (0) | 2019.10.04 |
---|---|
지혜_16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_2 (0) | 2019.09.28 |
지혜_15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_1 (0) | 2019.09.27 |
지혜_14 인디언의 영혼_9 (0) | 2019.09.23 |
지혜_13 인디언의 영혼_8 (0) | 2019.09.05 |
지혜_17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_3 (0) | 2019.10.04 |
---|---|
지혜_16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_2 (0) | 2019.09.28 |
지혜_15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_1 (0) | 2019.09.27 |
지혜_14 인디언의 영혼_9 (0) | 2019.09.23 |
지혜_13 인디언의 영혼_8 (0) | 2019.09.05 |
평원의 한 오솔길에서 귀를 기울인다. 부산한 소리들 너머에서 평소에는 듣지 못하던 어떤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그것을 강의 소리라고도 하고 신성한 산의 소리라고도 한다. 그 소리는 곧 자기 자신의 소리이며, 위대한 정령의 목소리다.
물론 우리 인디언들 사이에도 얼굴 흰 사람들처럼 자기가 그 신성한 산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누구나 두려움을 헤치고 자기희생을 통해 그 산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각자에게는 각자의 길이 있는 것이다.
그가 인디언이든 아니든, 누구나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도 자주. 특히 이른 아침이면 홀로 깨어 평원의 어린 안개와 지평의 한 틈을 뚫고 비쳐 오는 햇빛 줄기와 만나야 한다. 어머니인 대지의 숨결을 느껴야만 한다. 가만히 마음을 열고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보거나 꿈꾸는 돌이 되어 봐야 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지의 한 부분이며, 대지는 곧 오래전부터 자기의 한 부분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천막을 열면 평원으로 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어머니 대지는 우리에게 인간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준다. 어머니 대지는 생명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자신이 가진 선물을 나눠 준다. 그것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 대지 위에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을 잘 보살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바위는 수세기에 걸쳐 지혜를 간직하고 있으며, 가장 오래된 스승으로 일컬어진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바위를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바위로부터 우리는 내적인 힘과 인내를 배운다. 바위는 잘 움직이지 않지만, 한번 움직이면 온 세상이 주목해야 한다.
나무는 우리에게 정직함을 가르쳐 준다. 나무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 올려 가지 꼭대기까지 전달한다. 나무껍질 속을 수액이 흐르듯이 진리가 우리 안에 흘러야 한다. 모든 사람마다 그에게 해당하는 아무가 한 그루씩 있다고 인디언들은 믿는다. 세상 문제를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잔뜩 굽은 나무와 같다. 어떤 나무는 똑바로 아름답게 서 있다. 하지만 또 어떤 나무는 겉은 그렇지만 안이 썩어가고 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똑바르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서 있어야 하며, 땅에 건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나무가 독립적으로 서 있지만 한 가족의 일원이듯이,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동물들은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을 준다. 그것은 나눔의 가르침이다. 동물들은 우리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목숨을 포기한다. 인디언들은 사냥을 나갈 때면 가족을 먹일 수 있도록 동물을 한 마리 보내 달라고 위대한 정령에게 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래서 동물과 만나면, 그것은 그 동물이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동물을 죽인 다음에는 심장을 꺼내 사냥꾼들이 한 조각씩 나눠 가진 뒤 감사의 기도와 함께 어머니 대지에 묻어 주었다.
인디언의 연주(동영상) (0) | 2019.12.04 |
---|---|
지혜_16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_2 (0) | 2019.09.28 |
지혜_15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_1 (0) | 2019.09.27 |
지혜_14 인디언의 영혼_9 (0) | 2019.09.23 |
지혜_13 인디언의 영혼_8 (0) | 2019.09.05 |
아침에 눈을 뜨면 겨울 햇살 속에 묵묵히 서 있는 키 큰 나무들과 머리 위를 지나가는 한 떼의 구름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나는 바란다. 발에 밟히는 양치류들, 숨 쉴 때마다 느껴지는 달콤한 대기, 침묵하는 바위들, 이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과연 무엇인가!
당신들의 문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흙탕을 덮고 있는 가벼운 나뭇잎과 같은 것이다. 나뭇잎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 버린다. 당신들은 늘 최고의 문명인임을 자랑하지만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고 욕설을 서슴지 않는다. 당신들이 자랑하는 세련된 교양이나 매너 따위는 금방 날아가 버리고, 당신들은 그래야만 자신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다는 듯 온갖 수단으로 상대방을 공격한다.
우리 인디언들은 그렇지 않다. 당신들 눈에는 우리가 야만인으로 보일지 몰라도 우리는 쓸데없이 화내는 것을 언제나 경계한다. 특히 그것이 인생의 사소한 일이라면 들소가 산들바람에 미동도 하지 않듯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당신들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는 욕설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우리는 남이 자기를 모욕해도, 그것이 진실이 아니고 오해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기다릴 뿐이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진실이 아닌 것이 오래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 인디언은 나무와 풀, 짐승과 사람, 별과 모래 같은 것들이 한결같이 위대한 정령의 품에서 나왔으며,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면 다시금 그 품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각자의 삶은 각자의 것이고, 누구도 타인의 길을 지시하거나 명령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들쥐는 들쥐만의 세계에서 열심히 살아갈 것이고, 비록 그가 이 생에서 약간의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위대한 정령은 그것을 하나의 배움의 과정으로 여길 것이가. 나뭇가지에서 노려보는 찌르레기는 찌르레기만의 세계에서 열심히 살아갈 것이고, 설령 그가 다른 나무에 앉은 찌르레기에게 약간의 미안한 행동을 했다 해도 그것 역시 배움의 과정에 포함될 것이다.
들쥐는 찌르레기에게 들쥐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찌르레기는 들쥐에게 찌르레기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 아메리카 인디언들 역시 누구에게 자신의 믿음을 선전하고 강요하는 것을 금기로 삼고 있다.
위대한 정령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경우, 우리 인디언은 홀로 평원의 오솔길로 나아가 그곳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명상에 잠긴다. 평원은 사방이 고요하고 가끔씩 들리는 풀벌레 소리나 풀섶에서 동물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외에는 방해꾼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내면과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홀로 사방이 고요한 곳에서 자신과 만나고 위대한 정령과 대화하는 일에 익숙해 있다. 자연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악한 자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세상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배워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지 전체가 어머니의 품이고, 그곳이 곧 학교이며 교회라고 믿는다. 대지 위의 모든 것이 책이며 스승이고, 서로를 선한 세계로 힌도하는 성직자들이다. 우리는 그밖의 또 다른 교회를 원하지 않는다. 당신들이 우리를 무조건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것에 답답함을 느낄 따름이다.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전사가 입술이 하얗게 되고,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듯이, 홀로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갖지 못한 사람은 그 영혼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다.
그래서 인디언은 아이들을 키울 때 자주 평원이나 삼림 속에 나가 홀로 있는 시간을 갖도록 배려한다. 한두 시간이나 하루 이틀이 아니라 적어도 열흘씩 인디언들은 최소한의 먹을 것을 가지고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장소로 가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얼굴 흰 사람들은 그것을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할지라도 모르지만 그것은 한 인간이 이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자기 확인 과정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인간은 신 앞에서 겸허해진다. 자연만큼 우리에게 겸허함을 가르치는 것은 없다. 자연만큼 순수의 빛을 심어 주는 것은 없다. 자연과 멀어진 사람들은 문명화되는 속도만큼 순수의 빛을 잃었다.
목이 마를 때 물을 찾듯이 우리 인디언들은 영혼의 갈증을 느낄 때면 평원이나 들판으로 걸어 나간다. 그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는 홀연히 깨닫는다. 혼자만의 시간이란 없다는 것을. 대지는 보이지 않는 혼들로 가득 차 있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곤충들과 명랑한 햇빛이 내는 소리들로 가득 차 있기에, 그 속에서 누구라도 혼자가 아니다. 자신이 아무리 혼자뿐이라고 주장해도 혼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디언의 연주(동영상) (0) | 2019.12.04 |
---|---|
지혜_17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_3 (0) | 2019.10.04 |
지혜_15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_1 (0) | 2019.09.27 |
지혜_14 인디언의 영혼_9 (0) | 2019.09.23 |
지혜_13 인디언의 영혼_8 (0) | 2019.09.05 |
인디언 추장의 연설문
보라, 언제나 새로운 날이다!
들소 가죽 천막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이른 아침의 대기와 만날 때마다 나는 그것을 깨닫는다. 눈을 뜨고 바라보기만 하면 언제나 새로운 날이라고! 한겨울의 바람, 봄을 기다리며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 평원으로 난 좁은 오솔길들,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임을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삶은 어디에나 있다. 나뭇가지 위에도, 작은 개미들의 굴 속에도, 북풍한설에 흩날리는 나뭇잎들 속에도 있다. 돌을 들춰 보면 그곳에서 어떤 것들이 움직인다. 그 삶들이 가만히 내 삶을 응시하고 있다. 나는 그런 삶을 언제까지나 사랑해 왔다. 내게 주어진 어떤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님을 믿기 때문이다.
한때 나는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에게 닥쳐온 불행을 지켜보면서 삶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다. 인디언으로 태어난 나 자신이 슬펐고, 그 슬픔을 달랠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를 바라봐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나는 살아남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 삶은 위대한 정령이 내게 준 것이 아닌가. 그것에는 분명히 깊은 뜻이 있으리라고 나는 믿었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제대로 삶을 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인디언들의 오랜 믿음이며, 나는 언제나 그 믿음에 따라 살아왔다. 늘 새로운 순간들에 마음을 쏟으려고 노력했다.
평원에 앉아 하루가 저무는 것을 바라보는 것! 우리는 바로 그런 삶을 살았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그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한 계절에 한 번씩이라도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 인디언 부족은 어려서부터 세상의 신비에 눈을 떴다. 아이들은 평원과 삼림지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자연의 변화에 민감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것들이 저마다 생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결코 과장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우리는 생의 외경심에 지나간 날들의 시름을 잊었으며, 여름은 여름대로 우리의 마음을 충만하게 만들었다. 삶 속에는 어느 것 하나 진부한 것이 없었다. 눈을 뜨고 인디언 천막 밖으로 나가면 늘 새로운 순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은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의 신비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 역시 하나의 신비임을 알았다. 숨 쉬고, 걷고, 앉아 있는 것이 모두 신비였다. 자연 속을 거닐거나 이른 아침 평원에 떠오르는 태양을 응시하는 일도 하나의 신비였다. 지평선을 향해 뻗어 내린 산의 곡선들, 바위의 힘찬 굴곡, 물웅덩이에 비친 그림자, 절벽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물줄기들이 우리 자신의 신비와 마주치면 그곳에서 음악이 들리는 듯했다. 불행하게 장님이 된 사람조차도 그 신비를 잃지 않았다. 그에게는 온갖 소리들이 그 신비를 알려 주었으므로.
눈을 감고 평원의 오솔길에 앉아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소리들이 우리가 살아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새소리, 바람 소리, 물 흘러가는 소리, 나비의 날개가 부딪치는 은밀한 소리, 그리고 침묵의 소리까지도 그 속에 포함되어어 있었다. 우리는 자주 평원을 뛰어 다니곤 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이런 생을 우리에게 주신 이에게 감사드리곤 했다.
인간은 삶에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당신들 얼굴 흰 사람들은 행복과는 거꾸로 난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 나무들도 없어지고 시냇물은 맑음을 잃었다. 새들과 짐승들은 갈 곳을 잃었다. 그러니 결국 인간이 갈 곳이 어디겠는가?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보다 이 세상에 나무가 많았으면 하는 것이다. 시냇물과 강물도 예전처럼 푸르러지고, 들녘과 산에는 키 큰 나무가 많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과 저녁나절에 숨을 들이쉬면 내 영혼이 맑아지기를 바란다.
당신들은 문명인임을 자랑한다. 나는 당신들이 우리보다 더 지혜롭고 영리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왜 당신들은 진정한 행복과는 거꾸로 난 길을 향해 가는가?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당신들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산을 깍아 결국 손에 얻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으로 당신들의 영혼을 맑게 할 것인가? 한 줌의 맑고 신선한 바람이 큰 교회당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당신들은 왜 모르는가?
지혜_17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_3 (0) | 2019.10.04 |
---|---|
지혜_16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_2 (0) | 2019.09.28 |
지혜_14 인디언의 영혼_9 (0) | 2019.09.23 |
지혜_13 인디언의 영혼_8 (0) | 2019.09.05 |
지혜_12 인디언의 영혼_7 (0) | 2019.09.04 |
우리 인디언들을 배신자, 피에 굶주린 자들, 잔인한 야만인들이라고 왜곡시키는 얼굴 흰 자들조차도 인디언이 가진 용기를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우리의 용기가 단지 무지하고, 야만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만 보인다. 인디언들은 용기를 최고의 도덕적인 가치로 여겼다. 그들에게는 용기가 공격적인 자기 과시가 아니라 완벽한 자기 절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진정한 용기를 가진 자는 어떤 두려움과 분노, 욕망과 고통에도 자신을 내어주는 법이 없다. 그는 모든 상황에서 자기 자신이 주인이다. 그리고 그의 용기는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진정한 영웅의 높이에까지 이른다.
"어떤 추위와 배고픔, 어떤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이빨을 곤두세우고 덤벼드는 위험과 죽음 앞에서도 선한 일을 하려는 그대의 의지를 포기하지 말라."
한겨울에 굶어 죽어 가는 자신의 부족을 위해 들소를 찿아 떠나는 한 인디언에게 부족의 늙은 추장이 한 말이다. 이것이 얼굴 흰 자들이 유치하다고 여기는 인디언들의 용기이다.
죽음은 삶의 큰 시험이다. 언제나 삶의 뒤편에 따라다니는 죽음을 대하는 인디언들의 마음 자세는 우리의 인격과 철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인디언들에게 죽음은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단순하고 평온하게 죽음을 만났으며, 자신의 가족과 후손에게 마지막 선물이 될 수 있는 명예로운 최후를 맞이하기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전투에서 죽기를 자청했으며, 개인적인 싸움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가장 큰 불명예로 여긴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는 전통에 따라 마지막 순간에 침대를 집 밖 마당으로 내간다. 영혼이 툭 트인 하늘 아래서 떠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확실히 인디언들은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세에서 좋은 상태나 조건을 얻기 위해 안달하지도 않았다. 인디언들은 천국을 '행복한 사냥터' 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최근에 생긴 개념이다. 아마도 그것은 얼굴 흰 사람들이 지어냈을 것이다. 삶이 다하면 우리의 영혼은 처음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위대한 신비에게로 되돌아가며, 그다음에는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져 모든 곳에 있게 되고 모든 자연물들 속에 널리 존재하게 된다고 믿는다.
자연스러운 삶을 살다가 문명이라는 인위적인 삶으로 옮겨 감으로써 우리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것들을 많이 잃었다.
우리의 땅으로 온 얼굴 흰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당신들 인디언들은 어린아이와 같다. 무엇을 만들 줄도 발명할 줄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유일신이 있으며, 그분은 우리에게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고 다스릴 권한을 주셨다. 그 증거로 우리에게는 그분의 신성한 책이 있다. 그 책은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안내자이며, 그곳에 적힌 모든 단어들은 진실되고 구속력이 있다.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들이고, 우월한 종족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이교도와 불신자들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황금 문을 가진 천국이 있다. 또한 그런 영혼들이 영원히 고통받는 지옥이 있다. 우리는 존경받을 만하고, 진실되고, 세련되며, 종교적이고, 평화로운 사람들이다. 우리는 잔인함과 불의를 미워한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람들을 교육하고, 기독교인으로 만들며, 약하고 미개한 사람들의 권리와 재산을 보호하는 일이다."
이 선교사들의 말을 귀담아 들은 우리들은 얼굴 흰 사람들만이 진정한 신을 갖고 있으며, 인디언들이 지금까지 신성시해 오던 것들은 죄다 마귀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철학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사람의 인디언이다. 나는 얼굴 흰 자들의 문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나 옳은 것과 공명정대한 것에 대한 인디언의 감각을 한 번도 잃지 않았다.
인디언들의 민주적인 정신 속에서 어머니 대지는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열려 있으며, 누구도 다른 사람을 가난하게 하거나 노예로 만들지 않는다. 대지의 좋은 것들은 우리 혼자만 독차지할 것들이 아니라 우리의 누이와 형제들과 즐겁게 나눠 가져야 할 것들이다. 나눠 갖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진 특권이다.
지혜_16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_2 (0) | 2019.09.28 |
---|---|
지혜_15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_1 (0) | 2019.09.27 |
지혜_13 인디언의 영혼_8 (0) | 2019.09.05 |
지혜_12 인디언의 영혼_7 (0) | 2019.09.04 |
지혜_11 인디언의 영혼_6 (0) | 2019.09.01 |
진정한 인디언은 자신의 재산이나 노동에 값을 매기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힘과 능력으로 베풀 따름이었다. 힘들고 위험한 일에 자신이 선택되는 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였으며, 그것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렇다고 인디언들이 소유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물건을 훔치다가 발각되면 도둑이라는 뜻의 '와마논' 이라는 이름이 평생 동안 붙어 다니며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되었다.
단 하나 예외는 음식을 훔치는 일이었다. 배가 고픈데 아무도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언제든 자유롭게 음식을 가져다 먹을 수 있었다. 인디언 공동체에는 도덕적인 규범 말고는 방범 체계가 따로 있지 않았다. 집에는 문도 자물쇠도 없었으며,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활짝 열려 있었다.
얼굴 흰 사람들은 인디언들이 천성적으로 잔인하고 복수심에 불타 있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그것은 우리의 철학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전투를 젊은이들에게 남성다움을 심어 주기 위한 하나의 놀이로 여겼다. 영토를 확장하거나 형제인 부족을 완전히 말살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전에는 전투를 벌여도 하루 종일 서로의 대담무쌍함과 말 타는 기술을 과시하면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서로를 죽이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대학에서 미식 축구 시합을 하다가 부상당하는 정도밖에 다치지 않았다.
부족간에 전투가 벌어져도 누군가를 죽게 하면 그 전사는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머리를 산발한 채 30일 동안 슬픔에 잠겨 지냈다. 물론 적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큰 죄는 아니었지만, 그렇듯 참회의 의식을 행하는 것은 떠나간 영혼을 존중하는 마음의 표시였다. 인디언들에게 무분별한 잔인함과 훨씬 야만적인 전투 방식이 생겨난 것은 얼굴 흰 사람들이 총과 칼과 독주를 가지고 온 다음부터다. 그들이 우리에게 복수의 감정과 물욕을 심어 준 장본인들이다.
부족 안에세 살인을 저지른 자는 큰 죄를 범한 것이 되기 때문에 부족 회의의 판결을 받아야만 했으며, 종종 자신의 목숨으로 죄값을 치러야 했다. 인디언들은 죄를 지었을 때 달아나거나 교묘히 법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 죄가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산속 깊은 곳에서 이루어졌든 한밤중에 행해졌든 아무 차이가 없었다. 인디언은 위대한 신비가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희생자 부족의 어른들과 현자들 앞에 나타나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죄를 저지른 이의 가족들도 그를 옹호하거나 방어하기 위해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심판관들은 모든 상황을 세심하게 살펴 그 살인이 자기방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상대방이 심하게 감정을 자극한 나머지 일어난 일인지 명확히 확인했다. 자기방어를 위한 것이었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죄인에게 홀로 30일 동안 슬피 울라고 판결을 내린 후 풀어 주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살인자의 가까운 가족에게 그를 사형에 철할 권한을 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족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족에서 추방시키는 것으로 벌을 대신했다.
독한 위스키가 들어와 술 취해 난동 부리는 사람이 없던 시절, 인디언 사회에서는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살인이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인디언들은 폭력적이거나 다툼을 일삼는 사람들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혜_15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_1 (0) | 2019.09.27 |
---|---|
지혜_14 인디언의 영혼_9 (0) | 2019.09.23 |
지혜_12 인디언의 영혼_7 (0) | 2019.09.04 |
지혜_11 인디언의 영혼_6 (0) | 2019.09.01 |
지혜_10 인디언의 영혼_5 (0) | 2019.08.31 |
많은 전투에 참가해 얼굴이 흉터로 얼룩진 한 늙은 인디언 전사가 한 말을 나는 기억한다. 그때 나는 수 족, 샤이엔 족, 크리 족, 오지브웨 족 등 여러 부족에서 온 젊은이들과 함께 작은 통나무 교회에서 예수의 삶과 인격에 대해 애기하고 있었다. 그때 그 늙은 전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는 지금 그대가 말하는 그 계율을 이미 수천 년 동안 지키며 살아왔다.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살아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창조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도 그냥 주어졌고, 햇빛이나 비처럼 땅도 무상으로 주어졌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누가 바꿔 놓았는가? 바로 얼굴 흰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신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아버지이신 신의 그런 특성들을 조금도 물려받지 못한 듯하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형제인 그리스도조차도 본받지 않는다."
또 다른 인디언 노인은 의견을 묻자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나는 그 예수라는 사람이 인디언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물질을 손에 넣는 것, 나아가 많은 소유물을 갖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고 평화에 이끌렸다. 그는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계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사랑으로 일한 것에 대해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얼굴 흰 사람들의 문명은 그런 원리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 인디언들은 예수가 말한 그 단순한 원리들을 늘 지키며 살아왔다. 그가 인디언이 아니라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모든 종교는 그 나름의 성서를 갖고 있다. 우리 인디언들의 성서는 시, 역사, 예언, 격언, 민간 설화 등이 뒤섞여 있으며, 기독교의 성경책에 적힌 것과 비슷한 가르침들을 우리 역시 갖고 있다. 인디언들이 가진 문학 전체가 곧 우리의 성서이다. 그 책은 가장 지혜로운 현자들에 의해 소중한 씨앗이 뿌려지고 어린아이들의 순진무구한 입술과 호기심에 찬 눈동자 속에서 새롭게 되살아나는 살아 있는 책이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전해지며 성스럽게 간직되어 온 금언, 우화, 신비한 전설과 설화들을 바탕으로 우리의 문화와 철학이 세워졌다.
인디언은 천성적으로 관대하고 마음이 열려 있기 때문에, 위대한 정령이 인간에게만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안의 모든 존재들이 그것을 만드신 이의 불멸성과 완전함을 나눠 갖고 있다고 믿었다.
지혜_14 인디언의 영혼_9 (0) | 2019.09.23 |
---|---|
지혜_13 인디언의 영혼_8 (0) | 2019.09.05 |
지혜_11 인디언의 영혼_6 (0) | 2019.09.01 |
지혜_10 인디언의 영혼_5 (0) | 2019.08.31 |
지혜_9 인디언의 영혼_4 (0) | 2019.08.29 |
우리 인디언들은 어려서부터 강한 자기 존중과 함께, 가족과 부족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절제된 생활에 대한 훈련을 받았다.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부족 사람 모두가 그 아이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가 세상에 도착했음을 마을의 목청 큰 사람이 모두에게 알렸다. 이날 아이의 부모는 노인들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돌렸다.
아이가 처음으로 걸음마를 했을 때라든가, 귀를 뚫었을 때, 혹은 처음 사냥을 해 왔을 때도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 모두에게 그 사실이 공표되었다. 그럼으로써 아이가 어떤 공로를 세우고 어떻게 성장해 가는가를 부족 전체가 한 가족으로서 지켜볼 수 있었다. 따라서 아이는 자신의 명성을 잃지 않기 위해 감정과 욕망을 절제하면서 어른으로 성장해 갔다.
인디언들은 아이들이 일찍부터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참여하고, 부족의 지도자가 되거나 잔치를 베푸는 사람이 되려는 건강한 바람을 갖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용감할 뿐만 아니라 진실되고 자비롭지 않고선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아이에게 일깨웠다. 또한 자신의 명예와 절제된 태도를 지키지 않으면 그런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덕적인 생활에 영향을 주는 많은 의식과 풍습들이 있었다. 여성은 일정 기간 동안 엄격히 홀로 생활해야 했으며, 전투에 나가거나 종교적인 일에참가하는 남자는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이 금지 되었다. 자신의 부족 사이에서 공적인 위치를 차지하려면 반드시 그것에 버금가는 덕과 인격을 갖춰야 했다. 그는 자기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부족을 위해 살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아야 했다.
이렇듯 우리 인디언들은 어려서부터 완벽한 자기 절제 훈련을 쌓았으며, 얼굴 흰 사람들이 밀려오기 전까지는 부자연스럽거나 지나친 욕망에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소유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이라는 것이 우리 인디언들의 믿음이었다. 물질적인 길을 뒤쫓으면 머지않아 영혼이 중심을 잃는다. 따라서 인디언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자비심의 미덕을 배웠다.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남에게 주도록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래서 일찍부터 주는 것의 기쁨을 알았다. 만약 아이가 작은 물건에 너무 집착하거나 혼자서 모든 것을 독차지하려는 성향을 보이면, 배풀 줄 모르는 욕심 많은 사람이 어떻게 손가락질 받고 멸시당하는지 일깨워 주는 설화나 우화들을 들려주었다.
인디언들의 모든 중요한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서로 나누는 일이었다. 생일이나 결혼, 죽음 등의 경조사가 있을 때면 사람들을 초대해 음식을 나눴으며,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기념하는 특별한 날에도 나눔을 빼놓지 않았다. 그런 날이면 자신이 가진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나눠 주는 경우도 허다했다.
마음이 순수하고 단순한 인디언들은 말 그대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친구나 다른 부족에서 온 손님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중에서도 가난하고 늙은 사람에게 먼저 나눠 주었다. 그러고는 절대로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위대한 정령에게 바치는 종교적인 재물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바치는 사람에게만 어떤 의미를 지닐 뿐이었다.
부모 없는 아이나 늙은 사람은 가까운 친척뿐 아니라 부족 전체의 보살핌을 받았다. 인디언 부모들은 딸들을 보내 돌봐 줄 이 없는 불행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옷을 수선해 주는 일을 자랑으로 삼았다. 맏딸에게 주어지는 '웨노나' 라는 이름은 특별히 그런 의미를 갖고 있었으며,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소녀는 그런 이름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여겼다.
지혜_13 인디언의 영혼_8 (0) | 2019.09.05 |
---|---|
지혜_12 인디언의 영혼_7 (0) | 2019.09.04 |
지혜_10 인디언의 영혼_5 (0) | 2019.08.31 |
지혜_9 인디언의 영혼_4 (0) | 2019.08.29 |
지혜_8 인디언의 영혼_3 (0) | 2019.08.29 |
우리는 자연을 완성된 아름다움으로 여기며, 그것을 파괴하는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내가 수 족 추장들에게 워싱턴을 구경시켜 준 적이 있다. 나는 추장들의 마음속에 현대 문명이 이뤄 낸 놀라운 성과물들에 대해 깊은 인상을 심어 주고자 노력했다. 이 의회 의사당과 유명한 건물들을 방문한 뒤, 우리는 이름난 미술관으로 갔다. 그곳에서 나는 얼굴 흰 사람들이 그곳에 걸린 그림들을 뛰어난 천재의 작품이며 훌륭한 예술품으로 여긴다는 것을 설명해써다. 그러자 한 늙은 추장이 말했다.
"정말로 얼굴 흰 사람들의 철학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자부심과 위엄을 간직한 채 수 세기 동안 서 있어 온 숲들을 넘어뜨리고, 어머니 대지의 가슴을 마구 파헤치며, 은빛 물줄기들을 더러운 시궁창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신의 그림들과 걸작품들을 가차없이 파괴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작은 사각의 종이에 수많은 물감을 발라 그것을 걸작품이라 찬양한다."
여기에 인디언들이 문명 세계의 예술적 기준에 못 미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창조적인 상상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타고난 예술가들이었다. 다만 관점이 다를 뿐이었다.
우리의 눈에는 아름다움이란 언제나 새롭고 살아 있는 것이었다. 위대한 신비인 신조차도 매 계절마다 세상을 새 옷으로 갈아입히지 않는가.
진정한 의미에서 보면, 인디언에게는 삶의 모든 것이 하나의 종교적인 행위였다. 그는 만물 속에서 영혼을 자가거했으며, 그것들로부터 영적인 힘을 끌어낼 줄 알았다. 유한한 생을 사는 형제인 동물들에게 존경심을 갖고, 사냥한 다음에는 동물의 시신을 편안히 누이고 상징적인 깃털이나 물감으로 동물의 머리를 장식한 뒤, 신성한 담뱃대를 손에 들고 기도하는 자세로 서 있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물의 영혼은 자유를 얻고, 그 육신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바쳐질 수 있었다.
어렸을 때 나는 남에게 베푸는 법을 알았다. 그런데 문명인이 된 다음부터 그 아름다움을 잊었다. 그때는 자연스러운 삶을 살았으나 지금은 인위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때는 조약돌 하나도 가치있게 여겼으며, 나무를 봐도 놀라워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얼굴 흰 사람들과 더불어 액자에 넣어진 풍경화 앞에서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고 있다. 바위를 갈아서 생긴 돌가루로 벽돌을 만들고 그 벽돌로 문명 사회의 인위적인 벽을 쌓듯이, 내 안에 있던 인디언은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무엇보다도 겸손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 특히 영적인 자만심은 인디언의 성격이나 가르침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인디언은 자신의 말솜씨가 뛰어나다고 해서 얼굴 흰 사람들처럼 상대방을 어리석은 야만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위험한 재능으로 여겼다.
그 대신 우리 인디언은 침묵의 힘을 믿었으며, 그것을 완전한 평정의 표시로 여겼다. 침묵은 육체, 정신, 영혼의 절대적인 조화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삶의 어떤 폭풍우 속에서도 나무 잎사귀 하나 떨리지 않고 물결 하나 일지 않듯이 그 영혼이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평화로움을 유지하는 것, 그 본성 속에 변함없이 삶의 이상적인 자세와 행동을 간직하는 것을 인디언은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았다.
만약 침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것이다.
"침묵은 위대한 신비 그 자체다. 성스러운 침묵은 신의 목소리이니까."
또 만약 당신이 "그 침묵의 열매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것이다.
"침묵의 열매는 자신을 다스리는 힘, 진정한 용기와 인내, 위엄, 그리고 존경심이다. 침묵은 인격의 받침돌이다."
늙은 추장 와바샤는 말했다.
"젊었을 때 그대의 혀를 잘 지키라. 그러면 늙어서 그대의 부족에게 도움이 될 한 가지 생각이 그대 안에서 익어 갈 것이다."
유연하고 균형 잡히고 기품 있고 참을성 있는 완전한 신체를 상상하는 순간, 이미 인디언은 도덕적인 삶의 기초를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육체적인 쾌락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은 결코 영혼이 머무는 신전을 늙어서까지 건강하게 유지할 수 없다. 그런 진리를 바탕으로 인디언들은 엄격한 신체 단련과 함께 삶의 규범이 되는 도덕률을 세웠다.
인디언은 어려서부터속에 남성다운 강인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을 키웠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선 음식과 성적인 관계에 대한 엄격한 자세, 그것과 더불어 지속적이고 격렬한 운동이 필요했다. 인디언 남자는 이따금씩 짧은 기간 동안 금식을 행했으며, 격렬한 달리기와 수영, 또는 땀천막 의식 등으로 넘쳐나는 기운을 소모시켰다. 특히 금식 수련과 함께 육체를 지치게 함으로써 지나친 성적 욕망을 치유할 수 있었다.
지혜_12 인디언의 영혼_7 (0) | 2019.09.04 |
---|---|
지혜_11 인디언의 영혼_6 (0) | 2019.09.01 |
지혜_9 인디언의 영혼_4 (0) | 2019.08.29 |
지혜_8 인디언의 영혼_3 (0) | 2019.08.29 |
지혜_7 인디언의 영혼_2 (0) | 2019.08.21 |
인디언들에게 학교 건물과 책과 정기적인 수업 시간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디언 아이들은 자연의 방식으로 교육받았다. 언제나 자연 세계와 가까이 접촉함으로써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모든 생명체들과 마음이 담긴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인디언 아이에게는 영적인 세계가 더없이 실제적인 것이었으며, 생명의 빛이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존재들 속에 풀리지 않는, 그리고 풀릴 수도 없는 위대한 신비가 깃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인디언들은 말과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직접적인 경험에 더 무게를 두었다. 왜냐하면 모든 배움이란 간접적으로 그것을 전해 듣는 사람에게는 죽은 언어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신체 단련도 철저하고 합리적이었으며, 도덕적이고 영적인 측면에 대한 가르침은 그 어떤 종족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했다. 우리는 가르치는 기술을 인격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리고 교육의 근본이 위대한 신비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들과 대지를 사랑하는 데 있음을 잊지 않았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삶을 사는 인간이라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디언과 한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연과 가까운 학생들이었다. 얼굴 흰 사람들이 책을 갖고 공부하듯, 인디언들은 자연 속의 여러 행동 방식들을 통해 배웠다. 인디언 아이들은 부족의 어른들을 지켜봄으로써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을 배웠다.
야생의 평원에 사는 아이들만큼 오감을 잘 사용하기란 불가능하다. 인디언들은 누구보다도 잘 보고, 듣고, 냄새 맡았다. 또 잘 보고 듣는 것만큼 깊이 느끼고, 깊이 맛보았다. 야생의 생활보다 기억력을 발달시키는 생활은 없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침묵과 과묵함을 배웠다. 그것들은 인디언 성격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사냥꾼과 전사가 되기 위해선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며, 그것은 인내심과 자기를 다스리는 힘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문명 세계의 아이들이 법률가나 대통령이 되기를 희망하듯이 인디언 아이들은 용기 있는 인간이 되기를 희망했다.
인디언의 삶 속에는 단 하나의 의무만이 있었다. 그것은 기도의 의무였다. 기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존재를 날마다 새롭게 인식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우리에게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면 인디언은 모카신을 신고 물가로 걸어나갔다.
그곳에서 맑고 시원한 물 한 움큼을 얼굴에 뿌리거나 아니면 물속에 몸 전체를 담갔다. 몸을 씻고 난 뒤엔, 밝아 오는 새벽을 향해 똑바로 서서 지평선 위로 춤추며 떠오르는 태양에게 말없는 기도를 드렸다. 우리의 아내나 남편이 우리보다 먼저, 또는 나중에 그곳에 나와 기도를 올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함께가 아니라 각자 홀로 기도했다.
모든 영혼은 각자 아침의 태양과 만나야 한다. 새롭고 부드러운 대지, 그 위대한 침묵 앞에 홀로 마주서야 한다.
사냥을 나간 인디언은 너무도 아름답고 장엄한 대자연 앞에서 말을 잃을 때가 있었다. 바위산 위에는 검은 먹구름과 함께 무지개가 드리워지고, 푸르른 계곡 심장부에서 하얀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드넓은 평원에서는 석양빛이 하루의 작별을 고했다. 그런 것들과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예배하는 자세를 갖추곤 했다. 그러기에 인디언은 굳이 일주일 중 하루를 신성한 날로 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곧 신이 준 날이었다!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눈은 종교적인 마음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 점에서 인디언들은 누구보다 탁월하다.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인 신의 작품을 똑같이 흉내내거나, 모방이 불가능한 그것을 모방할 수 있다고 가장하지도 않았다. 아름다운 것은 상품으로 만들어 거래를 해선 안 되며, 오직 존경받고 찬양받아야 한다. 그것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정신이었다.
지혜_11 인디언의 영혼_6 (0) | 2019.09.01 |
---|---|
지혜_10 인디언의 영혼_5 (0) | 2019.08.31 |
지혜_8 인디언의 영혼_3 (0) | 2019.08.29 |
지혜_7 인디언의 영혼_2 (0) | 2019.08.21 |
지혜_6 인디언의 영혼_1 (0) | 2019.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