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늘과 땅으로 나의 관을 삼을 것이다. 해와 달은 나를 보호하는 한 쌍의 옥이 될 것이며 행성과 별무리들이 내 둘레에서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그리고 만물이 내 장례식 날 조문객들로 참석할 것이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모든 것은 두루 돌보아진다."
제자들이 말했다.
"우리는 까마귀와 솔개들이 스승님의 시신을 쪼아 먹을까 두렵습니다."
장자가 말했다.
"그렇다, 땅 위에 있으면 나는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될 것이다. 그리고 땅속에서는 개미와 벌레들에게 먹힐 것이다. 그러니 왜 그대들은 새에게 먹히는 경우만 생각하는가?"
원문 이해
삶도 단순하고 죽음도 단순하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모든 것을 문제로 여기고,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모든 것을 문제라고 여기는 순간, 그때는 어떤 것도 해결될 수가 없다. 이미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
삶은 매우 단순한것, 죽음 또한 단순하다. 그러나 그대가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볼 때만 그렇다. 일단 마음을 끌어들이기만 하면 그때 모든 것은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매 순간 삶이 그대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그대는 머리로 궁리하고 있다. 그대는 삶에게 말한다. '기다리라, 내가 문을 열어 주겠다. 그러나 먼저 결정 내릴 시간을 달라.' 삶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평생토록 삶이 그냥 왔다가 간다. 그대는 살아 있지도 않고 죽어 있지도 않은 채 다만 고달프게 질질 끌려갈 뿐이다.
삶과 죽음은 둘 다 좋은 것이다. 삶에도 그 자체에 아름다움이 있고, 죽음에도 그 자체에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삶은 하나의 문제다.
그러므로 죽음 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그것을 해결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 사실 그것은 이미 해결된 상태다. 애초부터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 문제를 만들어 낸 것은 다름 아닌 그대 자신이다.
별들을 보라. 거기에 문제는 없다. 나무들을 보라. 거기에 어떤 문제도 없다. 주위의 모든 것을 보라. 인간이 없었다면 모두 다 이미 해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나무들은 누가 세상을 창조했느냐고 결코 묻지 않는다. 나무들은 단순히 생명 에너지를 누리고 있다. 누가 세상을 창조했는가 하고 묻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리고 누가 창조했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 갑이, 을이, 병이, 정이...... , 그것이 무슨 차이인가?
또 그것이 창조되었든 창조되지 않았든 무슨 차이인가? 갑이 창조했다고 해도, 을이 창조했다고 해도, 아니면 아무도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이 그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대는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고, 삶은 여전히 같은 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러므로 왜 불필요한 질문, 무의미한 질문을 하는가? ㅡ
그리고 왜 그 속으로 휘말려드는가?
강은 자신이 어디로 흘러가는가 물어봄 없이 흐름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하여 강은 바다에 이른다. 만일 강이 질문하기 시작했다면 바다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강의 에너지는 도중에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강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가 목적지인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것을 묻는다면 그 문제에 사로잡혀 결국에는 미쳐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강은 어느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 염려하지 않고 흐름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강은 어김없이 바다에 이른다.
나무와 강물도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데 왜 그대라고 할 수 없는가?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는데 왜 그대는 걱정하는가? 그것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라. 이것이 곧 장자 철학의 핵심, 장자의 도다.
강물이 도달할 수 있다면 인간도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들이 도착한다면 인간도 도착할 것이다. 이 생명체 전체가 움직이고 있으며, 그대 또한 그것의 일부다. 생각으로 궁리하지 말라. 생각에 붙잡히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생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맴돌다가 결국에는 흐름을 잃을 것이다.
최종적인 목적지는 끝내 다가오지 않는다.
그대가 관념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삶은 하나의 문제가 된다. 관념 없이 본다면 삶은 하나의 신비다. 관념을 통해서 보면 삶은 이미 죽어 있다. 그리고 그대가 관념을 초월해, 무심을 통해 본다면 삶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마음의 관념은 살아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마음은 오직 죽은 것, 물질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때 삶이 물질적인 차원으로 전락한다..
이제 장자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다. 죽으면서 그는 무엇을 말했는가? 장자 같은 도의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때 제자들은 절대적으로 침묵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쳐선 안 된다. 도의 사람의 죽음은 삶의 절정, 하나의 클라이막스이다.
장자는 삶의 절정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한 인간의 의식이 절대적 차원에 이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때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장자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관념이 끼어드는 것을, 어리석은 질문이 시작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나라의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환공이 어느 날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침 수레 만드는 목수인 윤편이라는 자가 뜰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윤편이 문득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일어나더니 환공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좀 여쭙겠습니다만, 왕께서 지금 읽고 계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들의 말씀이다."
윤편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성인들은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오래전에 죽었다."
그러자 윤편이 말했다.
"그렇다면 왕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이 남긴 찌꺼기이군요."
환공이 화가 나서 말했다.
"수레 만드는 목수인 주제에 무엇을 안다고 떠드는 것이냐? 네가 지금 한 말에 대해 이치에 닿는 설명을 하지 못하면 목숨이 없어질 줄 알라."
그 수레 만드는 자가 말했다.
"저는 어디까지나 제 일에서 얻은 경험으로 미루어 말한 것일 뿐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렁해서 쉽게 빠져 버립니다. 또 덜 깎으면 조여서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게 적절히 손을 놀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퀴가 꼭 맞아 제가 원하는 대로 일이 끝납니다.
그러나 그 기술은 손으로 익혀 마음으로 짐작할 뿐 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요령을 심지어 제 자식놈에게조차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으며 자식놈 역시 저에게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이 일흔이 넘어서도 제 손으로 수레바퀴를 깎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성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진정으로 깨친 사실을 아무에게도 전하지 못한 채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께서 지금 읽으시는 그 글이 그들이 뒤에 남기고 간 찌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원문 이해
시골길을 달리던 자동차 한 대가 엔진 고장으로 정지했다. 차에서 내린 운전수는 차의 앞뚜껑을 열고 내부를 살폈으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때 문득 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한테 물으면 고장의 원인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그는 깜짝 놀랐다. 그곳엔 자기 혼자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고 근처 밭에 서 있는 늙은 말 한 마리뿐이었다. 그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20분 쯤 뒤 한 주유소에 도착한 그는 숨을 몰아쉬며 주유소 주인에게 설명했다.
"근처엔 말 한 마리가 있을 뿐 사람이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소."
주유소 주인이 물었다.
"혹시 검은 색 털에 잔뜩 굽은 등에 안짱다리 말이 아니던가요?"
그가 대답했다.
"그렇소, 바로 맞았소."
그러자 주유소 주인이 말했다.
"그 말에 대해선 신경 쓰지 마시오. 그 말은 오래전에 죽은 철학자인데 지금도 그 장소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라오. 과거의 습관 때문에 아직도 자기에게 질문을 던져 줄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소. 그는 자동차 엔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오. 그는 말이 아니라, 단지 그 늙은 말을 영매로 사용하고 있는 철학자인 것이오. 그러니 그 말에 대해선 신경 쓰지 마시오."
삶의 모든 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늙은 유령들이 계속 쫓아다니고 있으며, 그들은 모든 해답을 안다. 그대는 질문만 하면 된다.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들은 해답을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그들은 엔진 고장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삶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로부터는 해답을 구할 수 없다. 오늘 이 순간은 어제의 이 순간과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과거로부터는 결코 해답을 구할 수 없다. 해답은 물건이 아니다. 해답은 그것을 발견한 사람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진다.
그러나 유령들은 언제나 쫓아다닌다. 그대가 읽는 베다 경전, 코란, 성경, 바가바드 기타......... 그것들은 유령들이다. 그것들은 이제 실체가 아니다. 오래전에 죽은 것들이다. 하나의 허상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먼저 이것을 이해하라. 왜 죽은 것들이 그토록 매력을 갖는가를. 왜 죽은 과거가 그토록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가를. 왜 죽은 자가 그대의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는가를.
그대는 왜 그들을 간직하는가? 왜 그들에게 귀기울이는가? 그대는 살아 있고, 새로운 인간 존재다. 그런데 왜 과거에게, 권위가에게,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는가?
첫 번째 이유는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일수록 그 전통이 위대해 보인다는 것이다. 시간은 허상을 만드는 재주꾼이다. 장자가 생존해 있을 때 그대는 그를 인정할 수 없다. 그에게 아주 너그러이 친절을 베푼다 해도 그의 설법을 한 번 들을까 말까다. 듣긴 들어도 그가 깨달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가 궁극의 앎을 깨쳤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인간 존재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피와 살을 가진 인간,
그대와 똑같이 늙고 병들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그대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똑같은 인간으로........ , 그런 사람이 궁극의 앎을, 불멸성에 이르렀다는 것을 어떻게 믿겠는가? 어려운 일이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믿으라고 자신을 강요한다 해도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마음의 깊은 곳에선 의심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25세기가 지났다. 장자는 더 이상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이 아니다. 그는 이제 병들지 않으며, 배고파 하지 않는다. 음식이 필요 없다. 약도 필요 없다. 이제 그는 죽지 않는다.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시간이 모든 허상을 연출해 낸다. 그리하여 그대는 그가 자신과 똑같은 인간 존재라는 사실을 서서히 잊는다. 죽은 이미지가 서서히 황금빛으로 변한다. 그는 그 황금빛 이미지를 갖고 점점 더 높이 올라가서 낙원 어딘가에 숭고하게 자리 잡는다. 이제 그대와 그의 귀한 존재와의 거리는 무한히 멀어진다. 이제 그대는 그를 믿고 숭배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가 끝없이 사람들을 뒤쫓고 있는 것이다. 붓다가 다시 세상에 오면 사람들은 그를 거부할 것이다. 예수가 오늘날에는 숭배받지만 살았을 적에는 십자가에 처형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살아 있으면 사람들은 그를 처형한다. 죽으면 비로소 숭배하기 시작한다.
왜 죽음이 그를 그토록 중요하고 의미있는 존재로 탈바꿈시키는가? 죽음은 그의 육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대와의 공통점이 사라진다. 그때 그대는 그에 대하여 영적인 이미지를 갖기 시작한다.
피도 없고, 뼈도 없고, 초육체적인 이미지를, 이제 그대는 자유롭게 상상을 펼칠 수 있으며, 그에게 어떤 특성을 부여하는가는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를 구세주라고 생각하든, 큰 깨달음에 이른 인물이라고 생각하든, 신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든 그것은 이제 그대 자유다. 이제 그대는 마음대로 자신의 생각을 그에게 투영할 수 있다. 그가 살았을 때는 그것이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장자는 살아 있을 때만이 그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자가 살아 있을 때, 그대는 그의 정신을 마실 수 있다. 장자가 살아 있을 때, 그때 무엇인가 전수가, 전달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그것은 더욱더 불가능해진다.
왜인가? 전달될 수 있는 그것은 언어를 통해서는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언어로 전달될 수 있다면, 거기에 경전이 있고, 장자의 연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를 통해선 전달이 불가능하다. 언어는 하나의 구실 뿐이다.
장자가 그대에게 말을 한다. 그것은 마음의 차원과 접촉하기 위한 하나의 구실 뿐이다. 그대가 열려 있으면 무엇인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언어 사이에서, 행간 사이에서 장자가 그대에게 가 닿는다. 그것은 하나의 살아 있는 체험인 것이다.
마음에는 행복과 불행에 영향받지 않는 부동의 탑이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도에 의해 그 탑은 보호받는다.
자연의 도는 인위적이지 않고 의식함이 없는 것이어서, 꾸미고 계산하고 의도적일 때는 이미 자연의 도가 아니다.
스스로를 의식해 자기를 드러내고자 할 때 그 행위는 자연의 도에 어긋나며 자기 본래의 것을 잊는다.
자기를 의식적으로 드러냄은 모두 거짓된 것이다.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면 바깥 세상의 일들이 마음을 어지럽혀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때 더 이상 자연의 도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다.
자연의 도를 잃으면 행동 하나하나가 재난을 부른다.
남의 눈에 띄는 밝은 곳에서 행하면 사람들이 벌을 내릴 것이며,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행하면 귀신이 벌할 것이다.
저마다 자연의 도를 이해하고
자기를 드러내려는 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라.
그런 이는 사람에 대해서나 귀신에 대해서나 늘 평화로울 것이며, 마음의 탑에 초연히 홀로 머물며 늘 옳게, 그러나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할 것이다.
원문 이해
오직 인간만이 고통받는다. 인간의 마음속을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도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 자연 전체가 즐겁다. 자연 전체가 두려움도 불안도 없이 언제나 생명의 기운을 즐기고 있다. 존재계 전체가 그 삶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문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인류 전체가 문제다. 만일 몇 만만이 문제를 안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병이라고, 비정상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다. 오직 몇 명만이 문제가 없다. 아주 드물게 붓다, 예수, 장자같은 사람이 나타난다. 집에 도달한 사람, 삶이 고통과 불안이 아니라 하나의 환희가 된 사람, 도의 사람, 그들을 빼고는 모두 고통과 지옥 속에서 살고 있다.
어디선가 인간은 잘못되었다. 어떤 특정한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 전체가 잘못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뿌리 깊은 것이 되었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사회는 그 아이를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바꾸기 시작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고통받는 비자연적인 모습으로.
심리학자들은 어린아이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의 문제를 놓고 많은 연구를 했다. 그들은 4살에 주목하게 되었다. 4살 정도가 되면 인간은 사회의 일부가 된다. 4살 무렵이 되면 아이는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다. 4살이 되기 전에는 아직도 나무와 꽃들과 새들과 동물들로 이루어진 큰 세상의 일부분이다. 4살 이전에는 아직 야생적이다. 그러나 4살이 지나면 아이는 길들여진다. 그때 사회가 아이를 지배하게 된다. 그때 그는 규칙과 도덕과 옳고 그름에 따라 살아간다. 그는 더 이상 전체적이지 않다. 그때 모든 것이 분리된다.
이제 그는 행동하기 전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해 결정한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해야만 한다' 가 들어서며, 그 '해야만 한다' 가 병이다. 분별하는 마음이 들어선 것이다. 이제 그 아이는 더 이상 신의 자식이 아니다.
신의 품에서 추방된 것이다. 이것이 성서에 나오는 아담 추방의 이야기이다.
지식의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기 전에는 인간은 자연스럽게 에덴 동산에서 살았다. 그 에덴 동산은 먼 옛날의 어느 장소가 아니라 지금 이곳이다. 나무들은 그대로 에덴 동산에서 살고 있다. 동물들도 여전히 에덴 동산에 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여전히 그 속에서 운행하고 있다. 지금 이곳이 에덴 동산이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그곳을 벗어나 살고 있다.
아담은 추방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모든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고 있다. 왜인가? 그들은 지식의 열매, 관념의 열매, 즉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것이 바로 이 관념의 열매다. 인위적인 구분과 차별을 버리려면 관념을 버려야 한다. 다시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그 갑옷이 부서질 수 있다.
자연은 법 없이도 존재한다. 자연은 그 자체의 고유한 법칙을 갖고 있으며 그 법칙은 인간에 의해 통과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동의 절차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법칙들이 이미 그곳에 있으며, 삶은 그 법칙들을 따른다. 그대가 간섭하지 않으며
그대는 금방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간섭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삶이 고독하고 고통스럽다면 이것을 알아야 한다. 그대가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간섭했다는 것을. 그대가 간섭하는 일을 중지하지 않고서는 어떤 해결책도 없다.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르라. 그 원초적인 법을 따르라. 장자의 전체 메시지가 이것이다. 자연을 가로막지 말고 허용하라. 그것과 함께 흘러가라. 그것을 신뢰하라.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나왔으며, 그것이 그대의 어머니, 그대의 근원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대는 그 품안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곳이 최종적인 목적지다. 도중에 그대가 왜 간섭하고 싸움을 거는가?
그대 안의 어린아이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아이였 때의 그 순간을 다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한 가지 근본적인 사실을 기억하라. 삶의 길에서 무엇인가 잘못되었을 때 지적인 이해를 통해선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 그대 안의 어린아이로 돌아가야 한다.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인간, 자연스러운 삶을 살고자 원한다면 그 길밖에 없다.
가을 홍수가 밀어닥쳤다. 수천 갈래의 노도와 같은 물길이 황하로 밀려들었다. 강둑까지 물이 불고 강폭이 넓어져서 이쪽에서 바라보면 저쪽 강둑에 서 있는 것이 소인지 말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황하의 신' 은 무척 자랑스러워하며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자시 손안에 들어온 것이라 여겼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물결을 따라 흘러내려가 마침내 바다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헤알릴 수 없는 파도가 동쪽 수평선까지 무한히 이어진 것을 보고 놀라서 그만 말을 잊었다.
그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비로서 정신을 차린 그는 '바다의 신' 을 향해 한탄했다. "속담에 '겨우 백 개의 도리를 듣고는 천하에 자기만한 자가 없는 줄 안다' 는 말이 있는데 역시 그 말이 맞도다.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이다. 이제서야 '넓다' 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구나."
바다의 신이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여름 한철에만 사는 벌레에게 얼음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철학을 논하는 자에게 삶의 도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원문 이해
삶은 경험이지 이론이 아니다. 삶에는 해석이 필요 없다. 삶은 살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 삶은 수수께끼가 아니라, 하나의 신비다. 수수께끼는 풀어야 하는 것이지만, 신비는 풀릴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신비는 그대가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 그대가 그 속으로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 자신이 신비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삶은 의문이 아니다. 그냥 그곳에 존재할 뿐이다. 아무 물음표도 없이, 삶은 하나의 '공개된 비밀' 로 그곳에 존재한다.
삶은 하나의 초대이다. 그대는 손님이 되어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삶은 그대를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삶과 싸우지 말라. 삶을 해결하려고 고뇌하지 말라. 삶은 수수께끼가 아니다. 삶과 하나가 되라. 그러면 그대는 삶을 알 것이다. 그 앎은 그대 존재로부터 나올 것이다. 그것은 지적인 추구가 아니다. 지적인 추구는 부분적인 노력일 뿐, 전체적인 것이 아니다.
삶은 그대가 존재 전체로 삶과 함께하기를, 삶과 함께 흘러가기를, 그리하여 삶과 하나가 되어 그대와 삶 사이에 아무 구분이 없고, 어디까지가 그대이고 어디부터가 삶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기를 바란다. 삶의 모든 것이 그대가 되고, 그대의 모든 것이 삶이 된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문제 해결이 아니라 구원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 첫 번째로 이해해야 할 것은 삶을 하나의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삶을 문제로 받아들이면 그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다. 이미 빗나간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 길은 막다른 골목이다. 그 길의 어느 지점, 어느 이론엔가 그대는 매달릴 것이다.
삶이란 규정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삶은 모순 속에서 진행된다. 한 번 자신을 관찰해 보라. 이 순간 그대는 성인이지만 다음 순간 죄인이다. 그것이 왜 잘못이라도 생각하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그대 자신의 심리 상태를 들여다보라. 그대 마음도 정반대 것으로 움직인다. 무척 행복했다가 갑자기 슬퍼진다. 어느 한 가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과 슬픔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 슬픔과 행복은 서로 다른 것인가? 아니면 똑같은 에너지가 행복으로 또는 슬픔으로 표현되는 것인가?
행복을 느끼던 그 사람은 누구이며, 이제 슬픔을 느끼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 그대 안에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똑같은 사람이 두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것인가? 때로는 행복했다가, 때로는 슬퍼진다. 똑같은 에너지가 그렇게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그 둘 사이에서 싸우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대의 슬픔은 행복과 똑같은 가치를 지닐 것이며, 행복 역시 슬픔과 똑같은 깊이를 지닐 것이다.
장자는 말한다. 삶을 살라! 생각에 매달리지 말라! 진정한 앎에 도달한 사람들이 언제나 하는 말이 그것이다. 삶을 살라. 생각으로 삶을 낭비하지 말라.
생각을 버리고 존재 전체로 뛰어들어 삶을 살라. 삶에는 그대의 전 존재가 필요하다. 과학에는 머리가 필요하고, 예술에는 가슴이 필요하다. 그러나 삶에는 존재 전체가 필요하다. 머리만 활동하면 메마른 이론만 늘어날 뿐이다. 가슴만 활동하면 꿈과 허구만 늘어날 뿐이다.
존재 전체, 그것이 필요하다. 존재 전체로 움직일 때 그대는 우주와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첫 번째의 것이다.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의 마음은 항상 조건 지워져 있다는 것이다. 조건 지워지지 않은 마음은 없다. 존재는 물들지 않은 순수 상태 그대로이지만, 마음은 늘 조건화되는 과정에 있다. 살고 있는 사회에 의해서, 또 통과해 온 경험에 의해서 마음은 항상 길들여진다.
진리를 알고 실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조건 지워지지 않은 사람, 어떤 이론과 사상에도 물들지 않은 사람이다.
도는 모든 경계선, 모든 조건을 초월해 있다. 그 경계선과 조건들을 버려야 한다. 진리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어야 한다. 어떤 옷도, 어떤 신발도 벗어 던져야 한다.
세 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의 마음은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자, 무가 된 자, 오직 그만이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잘난 사람' 이라는 생각이 불행을 부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항상 고달프다. 그는 늘 경쟁과 갈등에 시달린다. 그리고 늘 모든 사람과의 끝없는 긴장 속에 살아간다. 모두가 경쟁 상대이고 적이다.
진정으로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자기보다 뛰어난 자를 찾으라.
진리란 최고의 것, 최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열등한 것, 밑의 것을 찾는다면 마침내 그대는 거짓 속임수의 진리와 함께 생을 마칠 것이다.
신에게로 다가서고자 한다면 자기보다 뛰어난 자를 찾으라. 장자 같은 도의 사람을 찾으라. 도의 사람은 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항상 도의 사람을 찾으라. 그리고 그때 겸허해야 한다. 엎드려 절해야 한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 이것이 에고의 문제, 마음의 갈등이다.
물고기는 물에서 나고 사람은 도에서 난다. 물에서 난 물고기는 연못의 깊은 그늘로 찾아 들어가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채워진다.
도에서 난 사람은 행위 없음의 깊은 그늘로 침잠해 다툼과 근심을 잊는다면 그는 아무 부족함이 없고 그 삶은 평화롭다.
원문 이해
장자는 말한다. 도를. 삶을. 그리고 장자는 말한다. 삶은 불확실한 것이라고. 확실한 것을 요구하지 말라고. 죽음만이 확실할 수 있을 뿐, 살아 있다는 것은 곧 불확실하다는 뜻이라고.
장자, 그는 이상한 사람이다. 모두가 확실한 삶, 보장된 삶을 이야기 하는데, 혼자서 불확실한 삶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보장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을 말한다.
삶에 필요한 것은 채워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결코 만족을 모른다. 욕망은 필요 이상의 것,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삶에 필요한 것은 단순하다. 그것은 자연에서 비롯되며, 자연
적인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매우 복잡하며,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인간의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다. 반면에 삶에 필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과 관련된 것이다. 삶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욕망은 지금 이 순간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욕망은 언제나 미래에 존재한다.
욕망은 삶 그 자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의해 그림이 그려진다. 욕망은 마음의 그림일 뿐, 진정한 필요가 아니다.
이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깊이 이해할수록 좋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로 달려가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필요는 지금 이 순간에 관련된 것이다. 지금 배가 고픈가?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의 필요이며, 음식을 먹음으로써 당연히 채워질 수 있다. 목이 마른가?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목이 마른 것이며, 물을 찾아야만 한다. 그것은 충족되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그것은 생존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다르다. 그대는 한 국가의 대통령이 되기를 원한다. 그것은 필요가 아니라 야망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에고의 투영이다.
그대는 천국을 원한다. 그것 역시 미래에 관한 것이다. 또는 신을 원한다. 그것 역시 미래에 관한 것이다.
기억하라. 필요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관련된 것, 필요는 실존적인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결코 지금 여기에 있지 않다. 욕망은 비실존적이다. 욕망은 심리적인 것, 마음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채워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욕망의 본성 자체가 미래로 달려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멀리 있는 지평선과 같은 것이다. 대지가 하늘과 만나는 지점이 근처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너무도 분명하게 느껴진다. 걸어서라도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가고 또 걸어가도 그 거리는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대와 욕망과의 거리도 언제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어떻게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겠는가? 그대가 1억원을 원한다면 언젠가는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돈을 갖게 될 때쯤이면 욕망은 또다시 1만 배 정도 커질 것이다.
필요는 단순하다. 그것은 채워질 수 있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면 된다.
졸리면 잠자리에 들면 그만이다. 하지만 욕망은 매우 복잡하고 계산적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그대는 좌절하지만, 그것은 필요 때문이 아니다. 욕망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이 그대의 에너지를 너무 많이 빼앗는다면 그대는 필요를 충족시킬 수도 없게 될 것이다. 필요를 충족시킬 존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대는 항상 미래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늘 미래를 생각하고 있고, 마음이 꿈속에서 헤매고 있다. 그러니 그날그날의 일상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사람이 이곳에서 사라진다. 그대는 이곳에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차라리 배고픈 상태에서라도 그 지평선에 도달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모든 에너지가 욕망의 실현을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당장 필요한 것을 뒤로 미룰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대는 욕망이 실현될 수 없음을 알 것이며, 그동안 정작 삶에서 필요한 것들을 무시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망가진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번 잃어버린 시가은 되찾을 수 없다. 그대는 결코 뒤돌아갈 수 없다.
필요는 아름다운 것이고 욕망은 추한 것이다. 필요는 신체적인 것이고, 욕망은 심리적인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성자 또는 성인이라고 하는 이들을 보라. 그들은 언제나 그대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비난한다. 그리고 그대의 욕망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돕는다. 그들은 말한다. '넌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단지 먹고 자는가? 그런 것들로써 너의 삶을 낭비하고 있는가? 천국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라. 천국은 최상의 욕망이다. 낙원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넌 평범한 것들, 단지 먹고 놀면서 삶을 낭비하고 있다. 일어나서 달려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서 목적지에 도달하라! 천국의 문을 두드려라! 신을 만나라. 그냥 이곳에 머물러 있지 말라.'
그들은 언제나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하고, 그대의 욕망은 키워 준다. 세상이 이토록 추해진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모두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진정으로 삶에 필요한 것이 채워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채워질 수 있는 것은 무시당하고, 채워질 수 없는 것만 키워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불행이다.
장자는 필요를 강조한다. 필요를 충족시켜라. 그리고 욕망에 대해선 잊으라. 욕망 그 자체를 떨쳐 버려라. 미래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배고픔을 느끼면 밥을 먹는다.
거기 미래는 없다. 그리고 그대가 존재 전체로 밥을 먹을 때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낙원이다.
예수가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 그들은 걱정하지 않으며, 재산을 축저하지도 않고, 미래에 대한 계산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피어날 뿐이다. 저 들판의 백합을 보라. 내일은 또 내일이 책임져 줄 것이다.
그대는 지금 이 순간 속에 존재한다. 이 순간만으로 충분하다.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진정한 현자의 길이다. 이 순간 속에 사는 자, 그에게는 이 순간만으로 충분하다. 그는 아무 부족함이 없다. 이 순간 속에 사는 자, 그에게는 천국이 따로 있지 않다. 그 자신이 바로 천국 속에 있다. 그에게는 신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신의 에너지가 되었다.
이것을 이해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지난 수세기 동안 인류에게 가르치고 세뇌시킨 내용에 정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고픔을 느끼면 먹으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먹는 일이 하나의 축제가 되게 하라. 축제처럼 살라! 왜냐하면 다음 순간 그대가 이곳에 없을지 누가 아는가? 배고픔도 사라질 것이고, 이 맛있는 빵도 사라질 것이다. 목마름은 더 이상 이곳에 없을 것이다. 이 많은 샘물도 이곳에 없을 것이다. 그 물을 마시라!
그대 자신으로 하여금 존재 전체로 지금 여기에 있게 하라. 그래서 시간이 정지하게 하라. 움직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그대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지금 이 순간 속에 완전히 몰입해 있다면, 그리하여 그대의 존재 전체로 그것을 즐기고 있다면, 시간은 멈출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의 움직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 지평선도 없으며, 그 지평선을 향해 달려감도 없다. 그러나 여기 모든 인간이 지평선에 닿기 위해 맹렬히 달리고 있다.
그대의 목적지는 그대 내면에 있다. 그대가 가야할 다른 어느 곳에 있지 않다. 그러나 욕망은 그대를 먼 나라, 먼 시간대, 공간 속 먼 지점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더 많은 욕망을 가질수록 그대는 더 급하게 달려간다. 그럼으로써 더 많이 그대 자신을 잃는다. 넘어지고, 엉망진창이 되고, 그리하여 죽기 전에 폐인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폐인이 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욕망이 남아 있다. 그대는 평생토록 욕망만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대의 마음은 말한다. 실패한 것은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라, 다른 자들은 성공하지 않았는가? 친구들을 보라, 그들은 성공했다. 그러나 자신은 충분한 속도로 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다음번에는 제대로 해보라. 그대는 이런 정신 자세를 무의식 속에 깊이 박아 놓는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도 악순환이 다시 시작된다.
기억하라. 첫 번째 중요한 것은, 삶이 필요로 하는 것은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의 성인이나 성자들과 이 사람 장자의 차이다.
필요는 아름답고, 욕망은 추하다. 장자는 말한다.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진 말라고. 그 구분은 이렇다. 필요는 신체에서 나오며, 욕망은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다. 동물들, 새들, 나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욕망을 만들어 내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든 행복하다. 그들은 살다가 죽는다. 그러나 결코 불안해 하지 않는다. 어떤 긴장도 없다. 욕망과 필요의 구분, 가장 간단하고 분명한 구분, 이것이 그대가 기억해야 할 첫 번째의 것이다.
삶이 필요로 하는 것은 받아들이라. 그것들에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욕망은 버려라. 그것들은 전부 잘못된 것이다. 욕망은 그대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존재 방식이다. 다른 존재 방식이 있을 수 없다.
들판의 백합처럼 피어나라. 나뭇가지의 새들처럼 노래하라. 야생동물처럼 야생적이 되라. 그대에게 독을 주입하는 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 신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즐겨라. 그대가 과연 얼마나 많은 필요를 갖고 있겠는가? 음식에 대한 필요, 물에 대한 필요, 그늘에 대한 필요, 사랑하는 가슴에 대한 필요, 그것이 전부다.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옛날에 바닷새 한 마리가 노나라 수도의 교외에 날아온 적이 있었다.
왕은 그것이 상서로운 징조라 해서 성대한 환영회를 베풀라고 명령하고 바닷새에게 종묘의 술을 마시게 하는가 하면 음악가들을 불러 순임금 시절의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뿐 아니라 여러 맛있는 짐승 고기까지 대접했다. 그러나 이 소란스런 잔치에 놀라 불행한 바닷새는 슬픔 속에 죽고 말았다.
새는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 인간의 입장에 따라서? 또는 새의 입장에 따라서?
새는 깊은 숲속에 둥지를 틀고 들판과 물가를 자유롭게 날아야 하지 않을까? 강이나 호수 위를 떠다니면서 미꾸라지나 물고기를 잡아먹고 때로 다른 물새들과 줄지어 날다가 갈대 끝에 앉아 한가롭게 쉬어야 하지 않을까?
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거나 사람의 소리를 듣는 것조차 싫어하는데 어찌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지 않겠는가? 그들은 음악으로 바닷새를 죽인 것이다.
물은 물고기를 위한 것이고 공기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본래 성품이 각자 다르니 필요한 것도 다르다.
그러기에 옛 현자는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았다.
원문 이해
고정된 인간의 본성이란 없다. 인간 개개인마다 그 본성이 다르다. 모든 개개인이 그 자신 하나의 우주다. 그대는 어떤 일반적인 규칙도 만들 수 없다. 일반적인 규칙이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걷는 이 길에는 그대가 규칙에 집착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일단 규칙의 희생자가 되면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알 수가 없다.
그대는 누구인가?
오로지 완전한 자유 속에서만 자신을 알 수 있다. 규칙은 곧 감옥이다. 누구도 그대에게 맞는 규칙을 만들 수 없으므로 그것들은 감옥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그 규칙들을 통해 진리를 발견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경우다. 저마다 본성이 다르다. 그것들이 그에게 도움이 되었을지라도 그대 역시 그것에 적합하진 않다. 오히려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해가 유일한 규칙이 되게 하라. 진정한 이해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라. 단, 외부의 규칙을 따르지 말라. 규칙은 죽은 것이고, 이해는 살아 있는 경험이다. 규칙은 감옥이지만 이해는 무한한 하늘, 무한한 공간을 준다.
어떤 것을 이해하면 그것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피가 되고, 뼈가 된다. 그대 자신이 된다. 그대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 이해를 통해 행해질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규칙은 의식적인 것이고, 이해는 무의식적인 것이다. 그리고 장자는 언제나 무의식적인 것을 찬성한다. 도의 모든 전통이 무의식적인 것을 찬성한다. 규칙을 강요하지 말라. 오직 사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자신에게 규칙을 강요할 때 그대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
내면에서는 늘 무지하면서 외부적으로만 화려하게 치장할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이해이지 규칙이 아니다. 책과 경전과 규칙을 통해서는 이해가 아니라 지식을 얻을 뿐이다. 각각의 인간이 다르다. 남자는 여자와 다르고, 개개인은 또 저마다 다르다. 뿐만 아니라, 그대는 날마다 다르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내일은 또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더없이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규칙이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깨어 있을 때 어떤 규칙도 필요 없다. 규칙을 따르지만 그대는 규칙이 필요 없음을 안다. 그대는 범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초월하여 한 사람의 구도자가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한번은 장자가 푸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때 초나라 사신 두 사람이 왕의 공식 문서를 받들고 찾아왔다. "왕께서 당신을 재상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든 채 여전히 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초나라에 한 신령한 거북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거북이는 죽은 지 3천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귀한 상자에 넣어 사원의 제단에 모시고 있다고 들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거북이는 죽어서 뼈만 남아 3천 년 동안 향 연기를 맡으며 왕의 제사를 받기를 원하겠는가. 아니면 진흙 바닥을 꼬리를 끌며 돌아다닐지라도 평범한 거북이로 살아 있기를 원하겠는가?"
두 사신이 말했다. "그야 물론 거북이로서는 살아서 진흙 바닥을 꼬리를 끌며 돌아다니는 편이 낫겠지요."
장자가 말했다. "어서 돌아가라. 나 또한 진흙 바닥을 기어다니고 싶으니."
원문 이해
먼저 몇 가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야 장자의 이 이야기가 더욱 분명해지고,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자신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마음 속에서 하나의 분열을 만드는 것이다. 그 마음의 분열이 그대의 불행, 그대의 지옥이 될 것이다. 자신을 비난한다는 것은 곧 본성, 또는 자연스러움을 비난하는 것이고, 자연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대양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부분이 전체와 싸울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의 종교는 그것과 싸우라고 가르친다. 자연을 비난하고 문명을 주장한다. 자연을 비난하면서 그들은 말한다. '그것은 동물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동물처럼 살지 말라!' 동물처럼 살지 말라고 부모들은 가르친다. 왜인가? 동물에게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 동물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속에서 동물은 비난받아 마땅한 그 무엇이다. 더없이 나쁘고, 악하고, 무가치한 것이다. 그대는 생각한다. 나는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나는 동물이 아니며, 천사로 태어났다고......... , 그리고 동물은 이용되고 착취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나무와 새들과 똑 같이 자연적이다. 나무와 새와 동물들에게는 정신 질환이 없다. 그들은 미치는 법이 없다.
문제는 아무도 그대에게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자신의 본성을 인정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그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하라! 존재계 전체에 감사하라. 그대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이든 의미가 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잘라내고 바꿀 수는 없다. 그렇게 하려고 시도한다면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지금 그대는 문제에 부딪쳐 있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 존재가 문제를 안고 있다.
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가? 왜 자연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에고는 비난을 통해 강해지기 때문이다. 에고를 강하게 만들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에고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투쟁해야만 한다. 무엇인가를 나쁘다고 비난하거나, 좋다고 칭찬해야만 한다. 에고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신과 악마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악마와는 싸우고, 신에게는 다가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에고에게는 갈등이 필요하다.
갈등 없이는 에고가 존재할 수 없다. 생각해 보라. 마음 속에 아무 갈등이 없다면, 자기 자신을 본질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있는 모습 그대로 행복하고 더없이 만족하고 전혀 불만이 없다면, 그때 에고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나는 누구다' 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더 많이 싸울수록 더 많은 '나' 가 만들어진다.
'나' 라는 것을 갖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것을 죽여야만 한다. 자연에는 에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들이 있지만 그들에겐 '나' 라는 것이 없다. 동물들이 있지만 그들은 에고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무의식 상태에서 살아간다. 투쟁도 갈등도 없이 살아간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고, 만족스러우면 잠을 잔다. 사랑을 하고, 먹고, 잠자면서 그냥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는 무엇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삶이라는 거대한 바다의 파도들이다. 그들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왔다가 간다. 그들에게는 역사도 없고, 자서전도 없다.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왔다가 갈 뿐이다.
장자와 노자를 이해하기 위해선, 도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들이 어떤 종류의 싸움도 찬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들은 말한다. 싸우지 말라.
살라! 삶에 자신을 맡겨라. 그래서 자연이 그대 속으로 흐르고, 그대가 자연 속으로 흐르게 하라. 그들은 말한다. 평범해져라. 특별하려고 하지 말라. 중요한 인물이 되려고 하지 말라.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라. 그러면 더 많은 삶을 즐기게 될 것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남기 때문이다. 그대는 에너지로 충만해질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도의 근본이다. 도는 어떤 '해야만 한다' 도 만들지 않는다. 장자는 말한다. '누구에게도 너는 이렇게 해야한 한다든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든가, 이렇게 되어선 안 된다고 말하지 말라.' 장자는 말한다. 그런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그대는 독을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유일하게 따라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대 안의 자연성이다. 그것이 어느 곳으로 그대를 인도하든지 신뢰하라.
그러나 우리는 자연을 따르기를 두려워한다. 자연이 나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인 교사들, 삶의 원천을 파괴하는 독을 전파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이 그대에게 너무 많은 것들, 너무 많은 '해야만 한다' 를 가르치기 때문에 그대는 있는 그대로 순수한 존재 상태를 볼 수 없다.
언제나 '해야만 한다' 의 관점에서 본다. 여기 장미 한 송이가 있다. 장미를 바라볼 때도 그대는 즉각적으로 이 장미를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한다. 더 붉게, 더 크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화학 약품을 주입하면 더 커질 것이고, 물감을 칠하면 더 붉은색이 될 것이다. 장미의 있는 그대로를, 장미의 순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크든 작든, 붉은 색이든 그렇지 않든 장미가 그곳에 있다. 왜 지금 이 순간 그것을 즐기지 못하는가? 먼저 그것을 더 붉게, 더 크게 만든 다음에야 그것을 즐길 수 있는가?
그대는 삶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뒤로 미루고 있다. 미래의 언젠가 삶을 살 것이라고. 이 뒤로 미룸 때문에 그대는 천국과 지옥을 만들었다. 천국은 모든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그대의 최종적인 '뒤로 미룸' 이다. 천국에는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그대는 말한다. 영원한 아름다움은 천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그대는 말한다. 천국에는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 사랑은 지금 여기에서만 순수하고 영원할 수 있다. 천국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사랑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순수하고 영원한 것이다. 사랑에게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시간의 연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원은 시간적이지 않은 것, 시간이 존재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단 한순간의 사랑이라도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그 순간은 무한히 깊기 때문에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정지한다. 그 순간 속에는 미래도 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순간 그대는 존재 전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계에 두루 연결된다. 존재계 전체가 그대와 연결되고, 그대의 전 존재가 존재계 전체와 연결된다. 그 순간은 그 자체로 영원하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영원이 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기도의 가능성이 있다.
진리가 집 앞에 와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대는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다. 단지 진실되라. 내가 진실되라고 말할 때 그것은 '자연스러워지라' 는 뜻이다.
자연스러움이 곧 진리다. 자연스러움 외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메시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메시지다.
오나라 왕이 강에 배를 띄우고 놀다가 강변의 원숭이 동산에 이르렀다. 원숭이들은 왕의 일행을 보자 모두 겁에 질려 나무 꼭대기로 도망쳤다.
그런데 한 마리 원숭이만은 완전히 무관심한 듯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나뭇가지 사이로 이동하며 자기의 재주를 왕에게 자랑했다.
왕이 활을 들어 그 원숭이를 향해 화살 하나를 쏘았다. 그러자 원숭이는 날아오르는 화살을 능숙하게 손으로 잡는 것이었다.
이에 왕은 신하들에게 일제히 원숭이를 향해 활을 쏘라고 명령했다. 한순에 원숭이는 온몸에 집중적으로 화살을 맞고 그 자리에 떨어져 죽었다.
그러자 왕은 친구인 안불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방금 일어난 일을 보았는가? 이 원숭이는 자기의 영리함을 자랑하고 자기의 재주를 너무 믿었다. 그는 아무도 자기를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기억하라. 사람들과 상대할 때 자신을 돋보이지 말고 재능에 의존하지 말라!"
집에 돌아오자 안불의는 그 길로 한 현자의 제자가 되었다.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쾌락을 버렸으며, 어떤 것이든 자신의 뛰어남을 감추는 법을 배웠다.
머지않아 나라 안의 누구도 그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모두가 그를 경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원문 이해
도의 비밀 열쇠가 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도는 그대가 아름다운 것을 갖고 있으면 감추라고 말한다. 절대로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말라고. 그대가 어떤 진리,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이 무엇이든 숨겨라. 진리를 그대 가슴 안에 숨기라. 그러면 그것은 땅속에 심은 씨앗처럼 자라날 것이다. 그것을 밖으로 꺼내지 말라. 씨앗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길 위에 꺼내 놓으면 그 씨앗은 죽을 것이다. 헛되이 죽고 말 것이다. 그곳에 재생의 기회마저 없다. 그냥 썩어 버리고 만다.
아름답고 좋고 진실한 것을 갖고 있는가? 그럼 그것을 씨앗처럼 다루라. 그것을 흙으로 덮어 가슴의 감춰진 장소에 묻어 두라.
절대로 그것을 과시하지 말라.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정반대 행위를 하고 있다. 뭔가 나쁜 걸 갖고 있으면 그것을 숨긴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는다. 추한 것이면 무엇이든 감추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갖고 있으면, 비록 그것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광고하고, 과장하고, 과시한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 불행이다. 추한 것은 자라나고, 아름다운 것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진실하지 않은 것은 하나의 씨앗처럼 자라나고 진실한 것은 바깥으로 내던져진다. 귀중한 것은 내던져지고, 쓰레기만 자란다. 그리하여 결국 그대는 잡초더미가 되고 만다. 그대의 삶에서 어떤 꽃도 피어나지 않는다. 그대는 한 번도 옳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꽃의 씨앗을 내면에 묻어 두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의 길이다. 나는 말한다. 이것이 곧 도의 비밀 열쇠라고.
도의 사람은 평범한 존재로, 지극히 평범한 존재로 남아 있다. 아무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아무도 그가 내면에 무엇을, 어떤 보물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는 결코 광고하지 않는다. 결코 자랑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럼 우리는 왜 광고하는가? 에고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오직 남들이 그대를 평가해 줄 때만 만족한다. 나는 말한다. 그대는 이미 독특하고 특별한 존재다. 따라서 굳이 독특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지 말라.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하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대가 돌아서면 모두가 비웃을 뿐이다. 그대가 자신의 독특함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누가 그것을 확신하겠는가? 확신은 증명을 초월한다. 그리고 확신은 어떻게 찾아 오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을 통해서다.
따라서 여기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앎의 길이다.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자기 자신을 아는 일, 이것이 옳은 길이다. 그리고 두 번째 길, 그른 길은 남을 통해, 남이 말하는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그대를 알겠는가? 그들은 매우 먼 곳에 있다. 그대 자신을 아는 데는 그대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스스로 자신의 실체를 모른다면 남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따라서 자신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자, 도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평범한 존재로 비칠 것이다.
그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숨긴다. 그는 자기 과시를 하지 않는다. 자신을 전시하지 않는다. 그는 무대 공연을 하지 않는다. 그는 침묵한다. 침묵의 삶을 살고, 침묵의 삶을 즐긴다. 그는 아무도 자신에 대해 관심 갖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왜인가? 누군가 그대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대를 생각할 때 일이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때 자신에 대한 앎이 더욱 힘들어진다.
홀로 길을 가야만 한다. 군중을 향해 시선을 돌리거나 군중이 자신을 따라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자기 전시에 매달리면 하나의 상품, 하나의 물건으로 전락한다. 그대는 결코 사람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 은 존재의 깊숙한 심연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의 거대한 심연이다. 누구도 함께 그곳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대 홀로 가야만 한다. 타인에 대해, 타인의 말과 생각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쓸 때 그대는 주변에서만 맴돌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문제다.
두 번째 문제는, 자기 과시에 매달릴 때는 추하다고 생각들을 감추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옷으로, 언어로, 몸짓으로, 가면으로, 행동으로 그대는 추하고 잘못된 것들을 감추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해서 어떤 결과가 찾아오는가? 이 잘못된 것들이 내면에서 하나의 씨앗이 되어 자라난다. 그것을 더 깊숙히 밀어 넣을수록 그것은 모든 에너지의 근원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 그 결과 더 강해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그대는 바깥으로 내던진다. 그것은 결코 하나의 씨앗이 될 수 없다.
정반대로 행동하라. 어떤 추한 것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남에게 보여주라. 그러면 그것은 분산된다. 그대가 화난 사람일 때 모두에게 말하라. '난 화난 사람이다. 날 사랑하지 말라. 내 친구가 되려고 하지 말라. 난 아주 나쁜 사람이다. 난 추하고 부도덕하며 탐욕스럽고 성적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추한 것들을 말하라. 말로 표현할 뿐 아니라 행동으로 그것을 진실되게 표현하라. 스스로도 놀랄 것이다. 어떤 것이 바깥으로 드러날 때 그것은 분산되어 버린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숨기라. 그것이 더욱 깊이 들어가서 그대 존재의 근원과 만나게 하라. 그럼 그것은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지금까지 정반대로 행동해 왔다.
기성자는 왕을 위해 싸움닭을 훈련시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훌륭한 닭 한 마리를 골라 훈련 시켰다. 열흘이 지나자 왕은 닭이 싸움할 준비가 되었는가를 물었다.
조련사는 대답했다. "아직 안 됐습니다. 아직 불같은 기운이 넘치고 어떤 닭과도 싸울 자세입니다. 공연히 뽐내기만 하고 자신의 기운을 너무 믿고 있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 왕이 묻자, 조련사는 대답했다. "아직 안 됐습니다. 아직도 다른 닭의 울음 소리가 들리면 불끈 성을 냅니다."
또다시 열흘이 지났으나 왕의 물음에 그는 여전히 대답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아직도 상대를 보기만 하면 노려보고 깃털을 곤두세웁니다."
또 열흘이 지나 왕이 묻자, 기성자는 마침내 대답했다. "이제 거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다른 닭이 울어도 움직이는 빛이 안 보이고 먼 곳에서 바라보면 마치 나무로 조각한 닭과도 같습니다. 이제 성숙한 싸움닭이 되었습니다. 어떤 닭도 감히 덤비지 못할 것이며, 아마 바라보기만 해도 도망칠 것입니다.
원문 이해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에고로 귀결된다. 가장 최종적인 결론이 에고다. 그러므로 먼저 인간의 마음이 에고로 발전하는 과정을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에고가 걸림돌이다. 그대가 더 많이 존재할수록 그대 안의 신은 그만큼 작아진다. 그대가 적게 존재할수록 그대는 더 많이 신을 향해 열린다. 만일 그대가 완전한 빈 배가 된다면, 그때 신이 그대의 손님이 될 수 있다. 그대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어느 한 구석에도 '나' 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오직 그때만이 신은 손님이 된다. 그때 그대는 신을 맞이할 수 있다.
그대가 그곳에 존재할 때, 그대의 모든 기도가 공허하다. 그대의 모든 영접이 거짓이다. 그대가 그곳에 존재할 때 그대는 아직 정식으로 신을 초대한 것이 아니다. 그대가 존재하지 않을 때만이 그 초대가 진실하다. 기도는 텅 빈 존재의 고요한 갈망이다. 기도의 끝은 침묵이다. 언어마저 사라진 고요한 기도, 사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에고는 녹아서 사라진다.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자신을 비우는 것에 반대한다. 그래서 머리가 더욱 우세해지고, 모든 차원에서 자기를 겸허히 비우는 일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이 시대는 신뢰 속에 자신을 내맡길 수 없기 때문에 고통받는다. 그것이 문제다. 그것이 현대인들의 생각의 근본이고 함정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계속해서 묻는다. '사랑이 무엇인가?' 인간의 머리는 사랑할 수 없다. 전쟁을 할 수는 있다. 그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인간의 머리는 사랑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전쟁의 상황에서 인간의 머리는 존재할 수 있고, 훌륭하게 기능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 속에서는 머리는 자신을 내맡겨야만 한다.
만일 단 하루만이라도 에고가 사라진 삶을 산다면 그대 자신도 놀랄 것이다. 신비에 사로잡힐 것이다. 수많은 생 동안 간직해 온 그 에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것은 단 24시간 만에도 쉽게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끊임없이 연료 재충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그 속에는 지속적인 에너지가 없다.
육체를 위해서는 연료가 필요하다.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면 그대는 죽을 것이다.
마시지 않으면 3주일 만에 죽을 것이다. 숨쉬지 않으면 3분 만에 죽을 것이다. 육체에는 끊임없는 연료 재충전이 필요하다. 육체는 영속적인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에게는 연료가 필요 없다. 이 육체가 죽으면 그대의 의식은 다른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 의식은 영속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끝이 없는 에너지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출발도 없고 도착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가 의식과 하나가 되었을 때 그곳에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영원한 근원에, 불멸하는 것에, 죽지 않는 것에 이르렀을 때만이 두려움은 사라진다. 죽음을 모르는 것에 접촉했을 때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