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의 황금 시편5

이 불행한 사람들은 내면에 신성의 근원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신성을 찾아다닌다.

행복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사람들은 그저 격정의 노리개일 뿐이다.

그들은 출렁이는 물결에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리고 사나운 비바람에 저항하지도 복종하지도 못하면서 눈이 먼 채로 해변도 없는 바다로 휩쓸려 들어간다.

신이여, 당신은 저들의 눈을 열어줌으로써 저들을 구원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릇된 것을 가려내고 진리를 아는 것은 신성한 인간의 몫입니다.

자연은 그들을 돕는다.

그대, 그것을 이해하는 자.

오, 지혜롭고 행복한 자는 천국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나의 법칙들에 주목하라.           

영혼이 두려워하는 것들을 삼가고, 그것들을 잘 구분하고, 지성으로 하여금 그대의 몸을 다스리게 하는 그 법칙들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빛나는 에테르 속으로 올라가, 불멸의 존재들 사이에서 그대 스스로 신이 되어라.

 

지금까지 깨달은 사람 중에 목적을 지향한 사람은 없다. 그럴 수가 없다. 목적을 지향하는 것은 마음의 길이다. 마음은 목적을 통해 존재한다. 마음은 미래와 야망을 통해 존재한다. 마음은 항상 무엇인가 성취하고자 한다.

깨달은 사람은 무심(無心)안에 산다. 무심이 곧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은 목적 지향적일 수 없다. 그에게는 미래가 없다. 모든 것이 현재에 존재한다. 그가 계속해서 오해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는 현재에 대해 말하는데 사람들은 마음을 통해 듣는다. 마음은 즉각 그 말을 왜곡시킨다. 마음은 즉시 그 말을 하나의 목표, 미래에 성취해야 하는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완전은 목적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것은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현재에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대는 완전하다. 그대가 완전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되어야만 한다.'라는 의미는 없다. 그대는 이미 그것이다! 다만 그것을 인식하고 자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대는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완전은 이미 현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것을 목적으로 만든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완전해져야 한다. 우리는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열반을 성취해야 한다. 우리는 낙원에 들어가야 한다."

그들은 먼 곳에 아름다운 목적을 만들어 놓는다. 이때 마음이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마음은 미래를 필요로 한다. 어떤 종류의 미래든 상관없다.

"너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권력자가 되어야 한다. 아름다워져야 한다. 지혜로워져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어떤 미래를 꿈꾸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있는 한 마음은 지속될 것이다. 이 마음의 지속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다. 마음은 그대를 긴장시킨다. 

마음은 그대를 불안과 번민에 시달리게 하고, 목적을 잃을까봐 끊임없이 두려워하게 만든다. 마음은 그대를 탐욕스럽게 만든다. 목적을 달성하려는 끊임없는 욕망을 갖게 만든다. 그 목적이 무엇이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목적이 돈이건 신이건, 출세든 삼매든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목적이 있는 곳이면 항상 마음이 존재한다. 이것을 가슴 깊이 새겨라. 미래가 있는 곳에는 항상 마음이 존재한다. '내일'은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 내일은 마음을 제외한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의존한다. 내일을 버리면 마음은 간단하게 증발해 버린다.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마음은 현재 시제가 없다. 마음은 지금여기(herenow)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대에게 계속 새로운 관념을 준다. 그대가 이 세상에 지치면 마음은 '다른 세상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대가 이 삶에 지치면 마음은 '걱정하지 마라. 사후(死後)에 또 다른 삶이 있다. 다른 삶이 계속된다.'

19세기 말엽의 미국 시인이었던 스티븐 크레인(Stephen Crane)은 아름다운 시를 썼다.            

지평선을 쫓아다니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지구를 돌고 또 돌면서 달리고 있었다.

내가 어이가 없어 그에게 말을 건넸다.

"부질없는 일이오. 당신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마시오!"

그가 외치고는 계속 달려갔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지평선, 환상에 지나지 않는 지평선을 쫓아 이렇게 계속 달려간다. 지평선은 마치 거기에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도 가까이에서 그대를 유혹한다. 자석처럼 강하게 끌어당긴다. 조금만 더 가면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불과 몇 마일 앞에 있다.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저기에 있기 때문에 유혹당하지 않을 수 없다. 금방 닿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달이고 달려도 그대는 결코 닿지 못할 것이다. 그대와 지평선 사이의 거리는 항상 일정하게 유지될 것이다. 지평선은 그대의 마음을 제외한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착각이고 환상이다.                   

이처럼 모든 목적이 환상이다. 이 세상의 것이든 저 세상의 것이든 모든 목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여기에 존재하라. 이것이 진리 안에, 실재 안에 존재하는 길이다.

이것을 첫 번째로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피타고라스를 오해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피타고라스를 왜곡시킬 것이다. 그대는 '어떻게 하면 완전해지는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완전은 성취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대는 이미 완전하다. 완전은 그대의 존재 자체이다. '되어감(becoming)'이 목적을 쫓아 달리는 것이라면 존재(being)는 그대의 본성 안에서 이완하는 것이다. 지금여기에서 이완하고 이 순간 속에서 휴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돌연 불가능했던 것이 가능해진다. 그대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돌연 그대는 그것을 자각한다. 완전은 하나의 자각이다.

피타고라스는 마음속에 사는 사람들, 되어감 속에 사는 사람들, 미래 속에 사는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말한다. 미래 안에 살 때 그대는 또한 자동적으로 과거 안에 살게 된다. 미래와 과거는 붙어다닌다. 그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대는 이 두 허구 사이에 끼어 꼼짝 못하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어제는 영원히 가버렸고, 미래는 결코 오지 않는다. 이 둘 사이에 현재 순간이 있다.

예수는 말한다.

"저 들에 핀 백합꽃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들은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언제나 지금여기에 살고 있다. 솔로몬의 영광도 이처럼 아름답지 못하리라."

지금여기에 사는 것이 곧 신성한 영광 속에 사는 길이다. 지금여기에 사는 것이 존재계의 영광을 얻는 길이다. 지금여기에 사는 것이 지복과 낙원에 존재하는 길이다.

자연은 미래를 모른다. 자연은 항상 여기에 존재한다. 자연은 항상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 나무는 이 순간에 자라고, 강은 이 순간에 흐른다. 그대의 마음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이 순간에 일어난다. 그대의 육체도 이 순간에 성장한다. 피가 흐르는 것도 이 순간이고, 심장이 고동치는 것도 이 순간이다. 마음을 제외한 모든 것이 지금여기에 존재한다. 마음만 멀리 떨어져 있다.

그대가 고통 받는 원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대에게 있다.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라.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종교적인 인간이 되는 첫 단계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 '내 고통의 원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라. 물론, 이런 사실을 인정하면 다소 비애를 느낄 것이다. 자신이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내가 고통의 원인이라면 왜 나는 계속해서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나는 고통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 말이다."

처음에는 다소 슬프고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질 것이다.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곧 그대는 커다란 자유를 느끼게 된다. 불행의 원인이 그대 자신이라면, 환희와 지복의 원인 또한 그대 자신이 될 수 있다. 이때 커다란 자유를 얻는다. 자기 스스로 책임질 때 그대는 자유로워진다. 그대는 과거의 카르마로부터 해방되고 운명으로부터 해방된다. 역사에서 해방되고 심리학에서도 해방된다. 그대는 모든 핑계로부터 해방된다. 일단 진짜 원인을 간파하면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LIST

피타고라스의 황금 시편4

무엇을 했고 무엇을 빠뜨렸는지 스스로 자문하기 전에는 잠이 그대의 피곤한 눈을 덮지 못하게 하라.

그것이 악이면 삼가고, 그것이 선이면 계속 행하라.

나의 조언에 대해 명상하라. 그것을 사랑하고 따르라.

그 조언은 그대를 신성한 덕으로 인도하는 법을 알고 있다.

무한함과 순수함의 상징인 '신성한 네 번째', 자연의 근원이고 신들의 원형(源形)인 '신성한 네 번째'를 우리의 가슴 속에 심어준 자의 이름으로 나는 맹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그대의 영혼에 주어진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함으로써 이 신들을 강하게 자극하라.

일을 시작하는 것은 그대지만 그들의 도움을 받은 일만이 완성될 수 있다.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후에는 아무것도 그대를 속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다양한 존재들의 핵심을 알아낼 것이며 만물의 목적과 원리를 알

 

될 것이다.

하늘이 뜻한다면, 그대는 본질이 만물 안에서, 모든 곳에서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러므로 그대의 진정한 권리를 깨닫기만 하면 그대의 가슴은 더 이상 헛된 욕망을 먹고 살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악마에게 먹힌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그런 열매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피타고라스는 서양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는 서양에 최초로 채식주의를 도입했다. 이 채식주의라는 개념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채식주의는 생명에 대한 존경에 기초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이것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생명체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인간은 홀로 동떨어진 섬이 아니다. 인간은 거미줄처럼 얽힌 무한한 생명체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 연결된 그물망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것은 추하고 비인간적인 행위일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비과학적인 것이다. 다른 동물들을 죽일 때 우리는 우리의 기반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의 유기적 단일체로 존재한다. 인간은 이 조화로운 오케스트라의 일부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새도 동물도 물고기도 없고 오로지 인간만 있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그런 삶은 매우 지겨운 삶이 될 것이다. 세상이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잃어버릴 것이다. 숲이 텅 비게 될 것이다. 뻐꾸기도 울지 않고 새들이 날아오르지 않을 것이다. 물고기가 없는 물은 매우 슬프게 보일 것이다.

다양한 생명체 안에 있는 삶은 하나의 유기적 단일체로 존재한다. 우리는 그 유기체의 일부다. 부분은 마땅히 전체를 존중해야한다. 이것이 채식주의의 기본 사상이다. 채식주의는 생명체를 파괴하지 말라고 말한다. 삶이 곧 신이라고 말한다. 삶을 파괴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이 생태계 자체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여기엔 매우 과학적인 요소가 숨어 있다. 인도에서 태어난 모든 종교가 기본적으로 채식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인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탄생한 종교들은 모두 육식을 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의식의 최고 정점은 인도에서 발현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채식주의는 정화 작용을 한다. 고기를 먹으면 필연성의 법칙에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대는 더 무거워지고 땅 쪽으로 더 끌리게 된다. 그러나 채식을 하면 그대는 더 가벼워진다. 은총의 법칙, 힘의 법칙 아래 놓이게 되고, 하늘을 향해 상승하기 시작한다.

음식은 단순히 음식에 그치지 않는다. 음식은 곧 그대이다. 무엇을 먹든 간에 그 음식은 그대가 된다. 근본적으로 살육과 폭력에 기초한 것을 먹으면 그대는 필연의 법칙을 초월하여 상승할 수 없다. 그대는 어느 정도 동물적인 차원에 머물 것이다. 동물적 차원을 초월하여 나아가기 시작할 때, 어떠한 동물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인간이 태어난다.

채식주의는 의식적이고 사려 깊은 노력이다. 지상에 그대를 묶어두고 있는 무거움을 벗어던져야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그래야 그대 홀로 날아오르는 것이 가능해진다. 채식주의는 이를 위한 노력이다.

음식이 가벼울수록 명상이 더 깊어진다. 반대로 음식이 거칠고 무거우면 명상이 더 어려워진다.              

나는 육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명상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불필요한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이것은 돌멩이를 잔뜩 짊어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돌멩이를 짊어지고도 정상에 오를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쓸데없는 문제를 떠안는 것이다. 애초부터 돌멩이를 던져버리고 몸을 가볍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등산이 한결 쉽고 즐거웠을 것이다.

지성적인 사람은 산을 오를 때 돌을 짊어지고 가지 않는다. 그는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그는 짐을 더 가볍게 만든다. 설령 무엇인가 짊어지고 있다 해도 그는 그것을 던져버릴 것이다.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와 텐징(Tenzing)은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그들은 산을 오르는 도중 모든 것을 던져버려야 했다. 높이 올라갈수록 짐을 갖고 가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필수적인 물건들까지 던져버렸다. 자기 몸 하나 끌고 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채식주의는 엄청난 도움을 준다. 채식주의는 그대 몸의 화학적 성질을 변화시킨다. 그대가 동물을 먹을 때,                  

동물은 살해당할 때 자연히 분노와 두려움에 차게 된다. 그대가 동물을 죽일 때, 그대가 그런 입장에 놓였다고 생각해 보라. 그대의 의식이 어떤 상태에 놓이겠는가? 그대의 심리 상태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대의 몸 안에서 온갖 종류의 독이 방출될 것이다.

그대가 분노할 때 어떤 종류의 독이 피 속에 흘러나온다. 두려움에 차 있을 때에는 다른 종류의 독이 피 속에 방출된다. 살해당할 때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극에 달하게 된다. 따라서 신체의 모든 분비선에서 온갖 독이 방출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독이 퍼져있는 고기를 먹는다. 어떻게 독이 퍼져있는 고기가 그대를 분노와 폭력성으로 물들이고 공격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살상에 의존해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존중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대는 삶에 적대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삶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기도란 삶에 대한 존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의 피조물을 적대시하는 사람은 신에 대해서도 우호적일 수 없다. 피카소의 그림을 찢어버리는 사람이 피카소를 존중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피조물은 신에게 속한다. 신이 그들 안에 살고 있다. 그들 안에 신이 숨 쉬고 있다. 그대가 신의 현현(顯現)이듯이 모든 피조물 또한 신의 현현이다. 모든 피조물이 형제자매다.

동물을 보면서 형제애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대는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대는 기도가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단지 먹기 위해, 단지 맛보기 위해 생명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추한 생각이다. 인간이 어떻게 이런 짓을 계속하는지 믿기 힘들 정도다.

피타고라스는 서양에 채식주의를 최초로 도입했다. 자연과 친구로 지내는 것, 모든 피조물과 친하게 지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이런 기초가 있어야만 기도와 명상의 토대가 마련된다. 그대 자신을 관찰해 보라. 고기를 먹으면 명상이 더 어려워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붓다는 육식을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사 계급인 크샤트리야 출신이었다. 그러나 명상의 체험이 서서히 그를 채식주의로 변화시켰다. 이것은 그의 내적인 이해에 따른 결과였다. 그는 고기를 먹었을 때마다 명상이 더 어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명상이 더 쉬워졌다. 이것은 간단한 관찰의 결과였다.

채식주의는 종교와 아무 상관도 없다. 채식주의는 기본적으로 과학적인 것이다. 채식주의는 도덕성과 무관하다. 그러나 미적 차원과는 상당한 관계가 있다.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 각성과 이해의 인간이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고기를 먹는 사람은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함축된 의미가 무엇인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피타고라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조롱하고 핍박했다. 피타고라스는 동양으로부터 가장 훌륭한 보물 중의 하나를 가져다가 서양에 안겨 주었다. 그는 위대한 시도를 했다. 그의 말을 들었더라면 서양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문제는 결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피타고라스가 서양적 의식의 기반이 되었더라면 세계 대전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역사 전체를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그는 열심히 노력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사람들이 눈이 멀고 귀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듣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습관을 바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사람들은 습관에 따라 기계적으로 살아간다. 피타고라스는 의식의 각성이라는 메시지를 가져왔다. 이 메시지에 귀 기울였다면 서양에 엄청난 명사의 에너지가 발산되었을 것이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스탈린 같은 인물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습관이 되풀이되고 있다.

인간의 신체를 바꾸기 전에는 의식을 변화시킬 수 없다. 고기를 먹을 때 그대는 동물을 흡수한다. 그런데 동물은 초월되어야 하는 것이다. 피하라! 진정으로 더 높이 올라가기를 원한다면, 진정으로 의식의 정상에 오르고 싶다면, 진실로 신을 알고 싶다면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대 자신의 삶을 둘러보고 아주 작은 습관 하나까지 자세하게 관찰해야 한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것이 삶 전체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때로는 아주 간단한 것이 그대의 삶 전체를 믿을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도 있다.

채식을 해보라. 그러면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명상이 더 쉬워진다. 사랑이 더 미묘해지고 거친 면이 없어진다. 사랑의 감성이 발달하고 관능적인 면은 줄어든다. 성적인 면이 줄어들고 더 기도와 가깝게 된다. 신체 또한 다른 분위기를 갖기 시작한다. 그대는 더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여성적이 된다. 공격성은 줄어들고 수용적인 면이 증가한다.

채식은 그대 안에 연금술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채식은 그대 안에 비금속이 황금으로 변형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

두 번째로 피타고라스가 서양에 도입한 것은 환생이라는 개념이었다. 이것 또한 어느 정도 채식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그대는 다시 한 번 놀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채식주의 종교는 환생을 믿는다. 육식을 하는 모든 종교는 삶이 단 한번 밖에 없다고 믿는다. 이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인도에는 브라만교, 자이나교, 불교가 있다. 이들은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르다. 세상 어디에서도 이렇게 다른 사상들을 찾아볼 수 업을 정도다. 힌두교는 신을 믿고 영혼을 믿는다. 그러나 자이나교는 신을 믿지 않는다. 자이나교는 기본적으로 신이 없는 종교다. 불교는 영혼조차 믿지 않는다. 신도 없고 영혼도 없다. 그대는 신도 없고 영혼도 없는 종교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차이점은 이렇게 크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 관해서는 그들 모두가 동의한다. 그 한 가지가 바로 환생이라는 개념이다. 영혼을 믿지 않았던 붓다조차 이에 동의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혼이 없는데 어떻게 환생이 있을 수 있는가? 붓다는 영혼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떤 연속성이 있다고 믿었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저녁 때 촛불을 켜놓고 다음 날 아침 그 촛불을 불어 끌 때, 그대는 그 불꽃이 전날 저녁에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과 똑같은 불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똑같은 불꽃이 아니다. 하진 어떤 면에서 연관성이 있다. 불꽃은 밤새도록 변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불꽃이 사라지고 있었다. 매순간마다 하나의 불꽃이 연기 속에 사라지고 새로운 불꽃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틈을 보지 못한다. 어떤 연속성이 있다. 계속적이면서도 매우 신속한 변화가 있다. 밤새도록 하나의 불꽃이 다른 불꽃으로 대치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침에 촛불을 불어 끌 때의 그 불꽃은 그대가 전날 저녁에 밝혀놓은 그 불꽃과 같은 불꽃이 아니다. 하지만 거의 같아 보인다. 첫 번째 불꽃과 마지막 불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의 연속성, 하나의 과정에 속해 있다. 그러나 하나의 불꽃, 하나의 영혼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환생의 개념이다. 연속성은 이어지지만 개체는 사라진다. 개별적인 영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환생을 믿었다. 자이나교는 환생을 믿고 브라만교도 환생을 믿는다.

그러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환생을 믿지 않는다. 이 세 종교는 인도 밖에서 탄생했다. 그렇다면 인도에서 태어난 세 종교는 어떻게 해서 모두 환생이라는 개념을 발견하게 된 것일까?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왜 그들은 환생이라는 한 가지 점에 모두 동의하는 것일까? 그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생이라는 이 경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놀랍게도 그 해답은 채식주의에 있다. 철저한 채식주의자는 쉽게 전생(前生)을 기억할 수 있다. 그는 전생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밝은 통찰력을 갖는다. 그는 둔하지 않다. 그의 에너지는 막힘없이 쉽게 움직인다. 그의 내면에 흐르는 의식의 강은 가장 오랜 고대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다. 그가 원하는 만큼 아득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육식을 하는 사람의 의식은 여러 방면에서 막혀 있다. 그는 자기 안에 거친 물질을 채워 넣는다. 이 거친 물질이 장애물로 작용한다. 인도 밖에서 태어난 세 종교, 육식을 하는 그들 모두가 환생이라는 개념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환생을 경험하지 못했다.

피타고라스는 인도에 살았다. 그는 채식을 하면서 깊이 명상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전생을 자각하게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붓다가 '한때 나는 코끼리였다. 한때는 물고기였고, 한때는 나무였다.'라고 말한 뜻을 이해했다.

진화라는 개념은 동양에서 훨씬 전부터 있었다. 서양에서 다윈이 주장한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한 진화론이었다. 다윈의 생각은 매우 조잡하다. 그는 원숭이가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윈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고 있다. 여기에 문제가 제기된다. 왜 일부의 원숭이들만 인간이 되었는가? 다른 원숭이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원숭이는 기본적으로 모방에 능하다. 일부의 원숭이들이 인간이 되었다면 다른 모든 원숭이들이 이를 모방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원숭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ㄲ? 그들은 모방에 능하다. 그런데 왜 일부만 인간이 되었는가?

원숭이는 아직도 존재한다. 수십만 년이 지났어도 원숭이는 여전히 원숭이다. 그대는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이 된 원숭이를 보았는가? 화창한 아침, 잠에서 깨어나 보니 문득 인간이 되어 있는 원숭이를 보았는가? 아직까지 이런 기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연결 고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원숭이와 인간의 차이는 실로 크다.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다.

서양 진화의 개념인 다윈의 진화론은 매우 조잡하다. 동양의 진화론은 이보다 훨씬 더 정교하다. 진화는 원숭이의 몸이 인간의 몸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 물고기의 몸이 인간의 몸으로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물고기의 내면은 계속 성장한다. 그 내면은 이 몸에서 저 몸으로 계속 옷을 바꾸어 입는다.

몸에서 몸으로 가는 진화, 그런 성장은 일어난 적이 없다. 성장은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원숭이가 특정한 의식에 도달하면 다음 생에 그는 원숭이가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는 원숭이로 죽어서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진화는 원숭이의 몸 자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 몸은 영혼에 의해 충분히 사용되었다. 또는 이 영혼을 '연속성'이라고 불러도 좋다. 원숭이의 몸은 충분히 사용되었으며, 이제 영혼은 더 나은 몸을 가질 준비가 되었다. 성장의 가능성이 더 높은 몸을 가질 준비가 되었다.

영혼이 이 동물에서 저 동물로 옮겨간다. 진화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다. 양초는 진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꽃은 이곳저곳 옮겨 붙는다. 불꽃은 더 높이 올라간다. 의식이 진화하는 것이지, 물질적인 육체, 생물학적인 육체가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다윈이 놓친 핵심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최소한 1만 년 전부터 이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명상을 통해 이런 자각이 일어났으며, 이 자각은 채식주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전생을 기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붓다와 마하비라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테크닉이었다. 제자가 와서 입문할 때마다 붓다와 마하비라가 첫 번째로 요구한 것은 전생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훌륭한 방법들이 개발되었다.

일단 전생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삶이 완전히 변형될 것이다. 왜 그럴까? 수많은 생 동안 해온 짓을 지금도 되풀이하고 있다는 어리석음을 알게 되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대는 똑같은 일을 수도 없이 되풀이해왔지만 매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가령 그대가 돈에 미쳐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대는 과거에도 돈에 미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과거에 그대는 성공을 거두어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죽었다. 모든 재산이 아무 소용도 없었다. 죽음이 모든 것을 빼앗아갔고, 그대는 빈손으로 죽었다. 예전처럼 가난하게 죽었다. 그대는 그 이전의 전생까지도 기억해낸다. 그대는 거대한 왕국을 거느린 왕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절망과 불행 속에 살다가 슬픔 속에 죽었다.

이런 것을 기억해내고도 여전히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겠는가? 여전히 더 많은 돈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열망은 한 순간에 땅바닥에 추락하고 말 것이다. 전생을 기억해낸다면 그대가 똑같이 어리석은 짓을 얼마나 되풀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면 똑같이 어리석은 짓을 얼마든지 되풀이할 수 있다.

환생은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다. 환생은 하나의 경험이며 철저하게 과학적인 사실이다. 전생을 기억해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대는 인간으로 살았던 전생만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서서히 그대는 동물로 살았던 전생을 기억할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나무와 바위로 존재했던 전생까지 기억해낼 것이다. 그대는 다양한 형상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긴 삶을 살았다. 한때 물고기였다는 것을 기억해낸다면 다시는 물고기를 먹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채식주의는 그대를 전생의 기억으로 인도한다. 전생을 앎으로써 그대는 더욱 더 채식주의자가 된다. 모든 생명체, 존재하는 모든 것이 형제자매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동물들을 죽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스스로 그렇게 결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세 번째로, 그는 삶이 하나의 수레바퀴, 탄생과 죽음의 수레바퀴라는 사상을 서양에 도입한 첫 번째 인물이다. 바퀴가 계속 굴러가고, 우리는 이 바퀴에 매달려있다. 바퀴는 반복해서 움직인다. 똑같은 궤도를 되풀이한다. 새로운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태어나고, 젊은이가 되고, 섹스와 욕망에 가득 차고, 그러다가 힘이 빠지면 늙고 병들고 절망하고 지쳐서 죽는다. 그런 다음 다시 태어나고.......... 이런 일이 되풀이된다.

탄생은 죽음을 가져오고, 죽음은 탄생을 가져온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바퀴가 계속 굴러간다. 인도에서는 세사을 '삼사라(samsara)'라는 말로 부른다. 삼사라는 바퀴를 의미한다. 유년기와 청년기, 노년기는 바퀴의 살에 불과하다. 우리는 바퀴에 매달려 있고, 세상의 모든 것이 움직이듯이 이 바퀴 또한 계속 움직인다. 지구는 태양 주변을 돌고, 태양은 알려지지 않은 다른 태양의 주변을 돈다. 달이 지구 주변을 돌고, 달과 지구는 태양주변을 돌고, 태양은 다시 다른 태양의 주변을 돈다.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모든 별이 움직이고 있다. 모든 것이 순환 속에서 움직인다. 계절도 순환하며 움직인다.

삶은 하나의 바퀴이며, 이 바퀴는 반복해서 움직인다. 이 바퀴에 매달려있다면 그대는 아무 곳에도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이 바퀴에서 벗어나야만 자유로워진다. 이것은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탄생과 죽음의 이 수레바퀴에서 해방되는 것이 자유다. 그때 그대는 그저 존재할 뿐 움직이지 않는다. 이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오직 현재가 있을 뿐이다. 지금이 유일한 시간이고, 여기가 유일한 공간이다.

이것이 열반과 해탈의 경지다. 이것이 진정한 신의 왕국이다. 그대는 단지 존재한다. 모든 혼란이 사라지고 태풍이 잠잠해졌다. 절대적인 침묵이 감돈다. 그 침묵 속에 노래가 있다. 그 침묵 속에 음악이 있다. 귀로 들리지 않는 음악, 연주되지 않는 음악이 있다. 그 침묵 속에 기쁨이 있고 지복이 있다. 이 지복은 영원하다. 결코 변하지 않는다.

모든 변화는 그대가 바퀴에 매달려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바퀴에서 벗어나면 모든 변화가 사라진다. 이때 그대는 여기에 존재한다. 항상 여기에 존재한다.

이것이 모든 구도자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상태다. 어떻게 하면 이 탄생과 죽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까, 어떻게 하면 탄생도 죽음도 없는 영원의 차원,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모든 것이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영원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가, 이것이 진실한 모든 구도자가 추구하는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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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의 황금 시편3

경청하라. 그대의 가슴 속에 내 말을 깊이 새겨라.

편견에 대해 눈과 귀를 닫아라. 다른 사람들의 선례를 경계하라.

그대 스스로 생각하라.

상의하고 심사숙고하라. 그리고 자유로이 선택하라.

바보들은 아무 목적 없이, 아무 이유도 없이 행동하도록 놔두고, 그대는 현재 안에서 미래를 숙고해야 한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아는 체하지 말라.

그대 자신을 가르쳐라.

시간과 인내가 모든 것을 보살펴 준다.

건강을 무시하지 말라.

육체에는 음식을, 마음에는 휴식을 적절히 분배하라.

지나친 관심 또는 지나친 회피, 어느 쪽이든 지나친 것은 집착하는 것과 같다.

사치와 탐욕은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

모든 일에 공정하고 선한 방법을 택하라.   

피타고라스는 코스모스(cosmos)라는 용어를 최초로 도입했다. 코스모스는 질서, 리듬, 조화를 의미한다. 존재계는 카오스(chaos)가 아니라 코스모스다. 그는 인류의 사상과 진보에 큰 공헌을 했다. 코스모스에 대한 그의 관점은 모든 과학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

과학이 존재하려면 존재계가 코스모스 상태여야 한다. 존재계가 카오스 상태라면 과학은 존재할 수 없다. 자연의 법칙이 날마다 매 순간 바뀐다면 어떻게 과학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물이 어떤 날은 섭씨 100도씨 끓고 어떤 날은 섭씨 500도씨 끓어서 어떤 질서를 따르지 않을 경우처럼 말이다.

과학은 존재계가 일관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존재계는 미치지 않았다. 존재계를 깊이 파고들면 우리는 틀림없이 어떤 법칙을 발견할 것이며, 그 법칙들은 모든 신비를 푸는 열쇠다. 과학은 이런 전제하에 성립된다.

이것은 과학뿐만 아니라 종교에도 적용되는 진리다. 종교는 내면의 과학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의 과학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내면의 과학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둘다 코스모스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내면의 세계에도 특정한 법칙이 있다. 과학적 법칙이 발견되었듯이 내면의 법칙 또한 발견된 것이다. 과학적 법칙과 종교적 법칙은 발명된 것이 아니다. 진리는 이미 존재한다. 그것을 발명할 필요는 없다. 그대가 발명한 모든 것은 진리와 어긋난다. 모든 발명은 거짓이다.

진리는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어떤 법칙을 발견했듯이 파탄잘리 또한 어떤 법칙을 발견했다. 뉴턴이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듯이 크리슈나는 은총의 법칙을 발견했다. 둘 다 항구불변의 법칙이다. 하나는 대지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속한다. 전자가 필연의 세계에 속한다면, 후자는 힘의 세계에 속하는 법칙이다. 전자는 가시적인 세계에 속하고, 후자는 비가시적인 세계에 속한다.

피타고라스가 과학적 개념의 원조가 된 것은 코스모스라는 관점 때문이다. 그는 과학의 토대를 제공한 최초의 과학자였다. 그가 말한 코스모스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 이해가 없으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힘들 것이다.

내면의 세계, 영혼의 세계는 특정한 법칙을 따른다. 그 법칙들은 항구불변하다. 그 법칙들은 영원하다. 내가 이 강의를 필로소피아 페레니스, 즉 영원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그것이다. 그 법칙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시간을 초월해 있다. 시간 자체가 그 법칙들 안에서 작용한다.

외부 세계에서 무엇인가 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그대의 실패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자연이 그대에게 순응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대가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 그대 자신을 자연에 순응시켜야만 비로소 자연을 이길 수 있다. 그대는 자연의 정복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정복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연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그대는 내면의 왕국에서 주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내면의 법칙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들에 순응해야 한다. 세상은 우연적이거나 무정부 상태가 아니다. 절대적인 조화와 질서가 있다. 피타고라스가 구도자들을 위해 많은 발견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신비한 관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발견한 것 중 하나는, 음악이 명상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서양에 이런 생각을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동양인들은 음악이 명상에 가장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음악이 명상에 도움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음악은 그대 주변에 조화를 만들어낸다. 그 조화는 그대의 내면에 영향을 미쳐 내적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다. 외부가 조화로우면 내면 또한 그에 일치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이런 현상을 여러 차례 경험했을 것이다. 시장에 있을 때 그대는 내면에 큰 혼란을 느낀다. 군중들 틈에 있을 때는 결코 편하지 않다. 시장의 분위기 전체는 반음악적이다. 그기엔 조화가 없다. 카오스 상태다. 이 외부의 카오스가 내면에도 카오스를 만들어낸다.

정신병원에 가서 미친 사람들과 몇 시간만 있어 보라. 그대는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인가 미쳐 가는 것을 느낄 것이다. 병원에 가서 아픈 사람들과 몇 시간 동안 있어 보라. 그대는 병이 그대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 일종의 아픔이 전염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사실 그대는 아무 병에도 걸리지 않았다. 병원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대를 둘러싼 질병의 파장이 그대의 내면에 영향을 미쳐 공명하기 시작한다. 외부와 내면은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의 전체에 속한다. 내면은 외부의 내면이고, 외부는 내면의 외부다. 그들은 따로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서로 영향을 미친다.

명상을 깊이 알게 되면 시장 한복판에 앉아 있어도 아무것도 그대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디. 그대의 내면에 강력한 음악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음악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시장의 소음이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그대 주변의 사람들이 고요한 분위기와 평온함을 느낄 것이다.

진정한 붓다는 시장에 앉아서도 붓다필드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붓다와 함께 하는 사트상의 비밀이다. 그 비밀은 이렇다. 스승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스승의 파장이 그대 내면의 조화를 일깨우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의 내면에 깊이 잠들어 있던 조화, 그대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던 조화가 스승의 진동에 의해 깨어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대는 시장에 나갔다 들어오면 다소 지치고 무엇인가 잃어버린 느낌을 받는다. 그대는 휴식이 필요하다. 푹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해야만 다시 시장에 나갈 수 있다.

음악은 소리와 침묵 사이의 하모니다. 소리는 땅에 속하고 침묵은 저 너머에 속한다. 피타고라스가 그렇게 믿고 그렇게 불렀듯이, 음악은 거룩하다. '거룩하다'는 뜻의 영어단어인 'numinous'는 라틴어 '누멘(numen)'에서 왔다. 누멘은 매우 의미심장한 단어다. 누멘은 '초월의 세계로부터 오는 긍정, 저 너머의 세계에서 오는 긍정'을 뜻한다.

음악은 신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할 정도로 위대한 조화를 만들어낸다. 음악은 거룩하다. 돌연 하늘이 그대를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그대는 저 너머의 세계에 압도당한다. 저 너머로부터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그대 안의 무엇인가 그에 감응하여 점점 응집되기 시작한다.

피타고라스의 신비학파에서 음악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이곳에 있는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명상적인 상태가 가능해질 만큼 위대한 음악을 창조해야 한다. 음악은 외적인 명상이며, 명상은 내면의 음악이다. 이 둘은 함께 움직인다. 서로 손을 잡고 포옹한 상태다. 음악이 그대를 포위하고 압도하면서 홍수처럼 밀려들고 그대 안에 명상이 자라나기 시작할 때, 명상과 음악, 세상과 신, 물질과 의식이 하나로 만날 때, 이것은 삶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 중 하나다. 이것이 이른바 '유니오 미스티카(unio mystica)', 즉 '신비의 합일'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음악, 노래, 춤, 축제의 학파였다. 

사람들은 음악이 그대를 아래로 끌어내릴 수도 있고 위로 끌어올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잊었다. 현대음악은 그대를 아래로 끌어내린다. 현대음악은 그대 존재의 가장 낮은 센터인 섹스 센터와 연관된다. 그것은 성욕을 자극한다. 그것은 포르노와 같은 음란물이다.

현대음악은 고차원적인 모든 것을 상실했다. 현대음악은 추하다. 재즈나 팝뮤직은 소음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소음들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으로 착각할 만큼 귀를 멍하게 한다. 그러나 그대는 땅 밑으로 추락할 뿐이다. 그대는 동물적인 세계로 더 추락한다. 그것이 전부다.

고대음악과 고전음악은 전혀 다른 영향을 미친다. 고전음악은 그대를 위로 끌어올린다. 그대를 중력의 법칙 너머로 이끈다. 이것은 일종의 부양(浮揚)이다. 그대는 점점 더 위로 상승하기 시작한다.

고전음악은 명상적인 특성이 매우 강하다. 그대를 더 높은 센터로 끌어올린다. 음악이라고 불릴 가치가 있는 진정한 음악은 일곱 번째 센터인 사하스라르 차크라와 연관된다. 하지만 거기에 도달할 정도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천재는 극히 드물다. 가슴의 센터만 도달해도 대단한 일이다. 가슴의 센터가 열리고 춤추기 시작하면 그대는 명상의 세계에 더 가깝게 다가간 것이다.

음악이 소리와 침묵의 만남이듯이, 피타고라스에 있어서 철학은 종교와 과학의 만남이다. 그가 의미하는 철학의 개념은 위대한 통합이다. 그는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통합을 이룬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서로 반대되는 극단을 한데 모아 상호보완적인 적으로 만든다. 대립을 파괴하는 데 있어서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한다. 대립을 발견할 때마다 그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그 다리는 매우 중요하다. 종교와 철학은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왔다. 그들은 피타고라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분열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이 분열은 가장 치명적인 재앙 중 하나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종교와 과학은 지금도 서로 적이 되어 싸우고 있다. 오랫동안 교회는 과학의 발전과 성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케플러와 같은 사람들은 처벌을 받아야 했다.

종교는 과학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과학은 종료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절대로 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은 내면의 과학을 위해 기반을 마련해 줄 수 있다. 그런데 교회 사람들과 교황들은 과학에 반대했다. 그것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진리는 파괴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진리를 십자가에 매달 수 없다. 과학은 서서히 기반을 확립하고 힘을 얻게 되었다. 과학이 힘을 얻은 것은 잘된 일이다. 그런데 과학은 예전에 종교가 범했던 것과 똑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기 시작했다. 과학이 종교를 파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일조의 복수였다. 3백 년 동안 과학적 사상가들의 주된 흐름은 가능한 종교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신의 사망을 선언했다. 그들은 영혼도 없고 사후의 삶도 없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인간 안에 내적인 존재는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간을 기계로 전락시켰다.

인간은 모든 존엄성을 상실했다. 인간은 더 이상 아무 의미도 느끼지 못한다. 세상에서 모든 의미가 사라진 것은 과학의 어리석은 접근방식, 복수심에 불타는 이 어리석은 태도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저 질질 끌리듯이 살아간다. 시가 사라졌다. 시가 존재할 가능성이 없다. 

신이 없으면 세상은 코스모스가 될 수 없다. 그때는 모든 것이 기계적인 현상이 된다. 그 뒤에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없다면 세상이 세상이 그대를 돌볼 수 없다. 세상이 그대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 이때 세상은 중립적이 되어야 한다. 그대가 죽건 말건 자연은 아무 관심도 없다.

과학은 자연이 인간에게 무관심하다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인간은 너무 작고 자연은 광대하다. 이 광대한 존재계가 그대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면 그대가 어떻게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겠는가? 그대는 자신을 그저 이방인이고 아웃사이더이며 우연적인 존재로 느낄 것이다.

과학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자 철학자들마저 편견에 치우친 과학적 사고방식을 따르기 시작했다. 철학자들마저 합일과 하나됨, '존재계가 우리의 집'이라는 위대한 비전을 잃어버렸다.

현대철학자들에게는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붓다, 소크라테스, 노자, 차라투스트라에 견줄 만한 아름다움이 없다. 현대철학자들의 철학에는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없다. 그것은 노래도 아니고 음악도 아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언어 분석이 전부다. 추한 현상이다. 그들에게는 삶의 철학이 없다. 기껏해야 끊임없이 논리를 갈고 닦으려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가? 부질없는 짓이다.

현대철학은 과학의 그림자이자 과학의 시녀로 전락했다. 존엄성을 상실했다. 현대철학은 더 이상 학문 중의 학문이 아니다. 더 이상 문학의 제왕이 아니다.

피타고라스가 살던 시대의 철학은 이해의 최고 정상에 있었다. 진리를 향해 가장 높이 날아오르는 학문이었다. 과학과 종교가 양 날개가 되어야 한다. 그 당시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시대였다. 세상은 진정으로 위대한 철학자들을 알고 있었다.

중국에는 공자, 노자, 장자, 맹자, 열자 등의 철학자가 있었다. 그들 모두가 차라투르트라와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었다. 인도에는 고탐 붓다. 마하비라. 프라쿠다 카티야야나, 산제이 빌레티풋타, 마크흐리 고샬, 푸르나 마샤파 등이 있었다. 이란에는 차라투스트라가 있었다. 2천5백 년 전인 그 당시의 철학이 가장 높이 비상하는 시대였다. 그런데 이제 그대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허울만 번지르르한 박제품들, 철학 교수들밖에 없다.

 그대 안에는 육체와 영혼이 함께 존재한다. 그렇게 육체와 영혼이 공존할 수 있다면 물질주의와 정신주의가 공존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공존해야 마땅하다!

인간은 물질주의자인 동시에 정신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치명적인 파멸을 초래한다. 선택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양쪽 세계 모두를 가질 수 있다. 당연히 그래야 마땅하다. 이것은 그대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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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의 황금 시편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에게는 어리석은 열정과 싸워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그 열정을 굴복시키는 법을 배워라.

침착하고 근면하라. 그리고 청결하라.

모든 노여움을 피하라.

공개적이든 비밀스럽든 결코 악을 허용햐지 말라.

무엇보다도 먼저, 그대 자신을 존중하라.

그대 자신을 비추어보기 전에는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

그리고 공정하라.

명심하라. 거역할 수 없는 힘은 죽음을 운명으로 결정했다.

쉽게 얻은 부와 명예는 쉽게 잃어버릴 것이다.

운명이 수반하는 불운들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판단하라.

그것들을 견디고 이겨 내라. 그 특성들을 수정하는데 최선을 다하라.

신은 가장 잔인한 일에 현자(賢者)를 노출시키기 않는다.          

진리와 마찬가지로 오류에게도 그것을 사랑하는 연인들이 있다.

각자(覺者)는 인정하거나 비판할 때나 항상 주의 깊다.

오류가 승리하면 그는 물러나 때를 기다린다.

 

피타고라스는 인간의 행위를 유발하는 두 가지 동기를 인식했다. 하나는 필연성으로 낮은 차원의 본질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힘으로 높은 차원의 본질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 둘다 더 함축적인 근본 법칙, 즉 도(道), 담마(dhamma), 토라(torah), 로고스(logos)에 의존한다. 동양에서 우리는 필연성의 법칙을 프라크리티(prakriti)라 부르고, 힘의 법칙을 푸루샤(purusha)라고 불러왔다.

피타고라스는 인도의 현자들과 마주 앉아 영적인 교류를 나누면서 이 두 가지 법칙을 배웠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이 두가지 법칙을 직접 경험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일별은 동양에서 스승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는 가운데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프라크리티는 낮은 본질,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본질을 의미한다. 반면에 푸루샤는 더 높은 본질, 의식과 각성을 의미한다. 프라크리티가 원(圓)의

둘레라면 푸루샤는 원의 중심이다. 피타고라스는 이것을 자기의 언어로 표현했다. 그는 프라크리티를 필연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더 낮은 차원으로 내려갈수록 필연의 법칙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더 높은 의식의 세계로 상승할수록 필연의 법칙이 약해지고 힘의 법칙, 자유의 법칙이 더 작용하게 된다.

가장 낮은 차원에서는 인과율(因果律)만이 유일한 법칙이다. 과학은 오직 인과율만을 인식한다. 따라서 그들은 신을 인식할 수 없다. 그들은 의식(consciousness)을 인식할 수 없다. 그들의 방법은 자체가 그런 인식을 가로막는다. 과학은 사다리의 가장 낮은 칸에 갇혀있다. 존재계는 여러 칸을 가진 사다리다. 이 사다리는 그대 안에도 존재한다. 모든 인간 속에 이 사다리가 축소된 형태로 존재한다.

육체는 프라크리티, 낮은 본질이다. 육체는 필연의 법칙을 따른다. 붓다의 육체도 필연의 법칙을 따른다. 그도 나이를 먹어 늙을 것이고 죽음을 맞을 것이다. 붓다에게도 자연의 이법(理法)은 다르지 않다. 이것은 아주 엄격한 법칙이다. 예외가 없다.

내가 예수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탄생은 가장 낮은 필연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여기엔 아무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예수가 순수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처녀'라는 말이 상징적인 의미로 쓰인다면 그때 이 말은 완벽하게 옳다. 이 말이 마리아의 순수함을 가리키는 시적인 표현이라면 완벽하게 옳다. 그러나 이것을 생물학적 사실로 주장한다면, 마리아가 진짜로 숫처녀였다고 주장한다면 그대는 어리석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탄생은 필연의 법칙을 따른다.

부활(復活)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예수라 할지라도 일단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연의 법칙은 어떠한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부활'이라는 말이 진정한 생명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면, 그대의 내면에 있는 영원한 그 무엇은 계속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면, 거친 육체는 죽지만 그대 내면의 미묘한 핵심은 영원하다는 의미로 이 '부활'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이 낱말이 영적인 재탄생을 뜻하는 용도로 사용된다면, 이때 이 '부활'이라는 말은 완벽하게 옳다. 그러나 역사적인 의미에서는 결코 옳지 않다.

몸은 대지의 일부다. 그러나 그대의 의식은 하늘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사실, 그대의 의식은 하늘에 속한다.

인간은 두 가지 법칙이 어울리는 만남의 장(場)이다. 필연의 법칙과 힘의 법칙, 푸루샤와 프라크리티, 속박과 자유, 하늘과 땅, 몸과 영혼,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거침과 미묘함. 인간은 만남의 장소이다. 이것이 인간의 영광이자 비극이다.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번뇌가 된다. 상반되는 두 개의 엄청난 힘이 그대 안에서 만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불안과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두 개의 힘이 양 쪽에서 그대를 잡아당기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언제나 갈등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법칙을 이해한다면, 이 두가지 법칙에 어떤 리듬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은 곳에서 그들이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을 안다면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은 항상 상호보완적이다. 삶과 죽음은 대립되지만 상호보완적이다. 남자와 여자, 선과 악도 대립되지만 상호보완적이다. 이런 상호보완성을 볼 수 있을 때 초월이 일어난다. 그대에게 잠재해 있던 영광이 드러난다. 그대는 빛나는 광채가 된다. 이것이 붓다의 경지이며 예수의 경지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의식, 붓다 의식, 크리슈나 의식이라고 불러도 좋다.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다. 의미는 똑같다. 긴장이 풀어지고 번뇌가 녹아 없어졌을 때, 육체와 영혼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육체와 의식을 아무 마찰 없이 조화롭게 운용하는 법을 배웠을 때, 이때 그대의 삶은 아름다운 음악을 창조한다. 그 음악이 명상이다. 그대의 삶은 엄청난 의미를 담은 멜로디가 된다. 그대는 하나의 축제, 축연(祝宴)의 장이 된다. 그대는 꽃처럼 활짝 피어난다.

이때 그대는 육체를 기반으로 삼고, 의식은 사원을 짓는데 사용한다. 육체는 기반이 되고 의식은 사원이 된다. 그대는 육체를 피리로 이용한다. 의식은 그 피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가 된다. 그대는 인도의 현악기인 시타르(sitar)처럼 사용하고, 그대의 의식은 시타르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

이런 현상에 주목한 적이 있는가? 하나의 물질인 악기를 통해 전혀 물질적이지 않은 음악, 철저하게 영적인 음악이 흘러나온다. 피타고라스는 이와 마찬가지로 필연의 법칙과 힘의 법칙이라는 두 가지 법칙도 하나의 근본 법칙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노자는 이 근본 법칙을 도(道)라고 부그로 예수는 로고스(logos)라 부른다.       

이 근본 법칙을 붓다는 다르마(dharma)로 부르고, 모세는 토라(torah)로 부른다. 이 근본 법칙은 이원적인 모든 것을 용해시켜 하나로 통합한다. 그 하나가 신이다. 이 근본 법칙이 신이며 진리다.

진리는 육체를 갖는다. 이 육체는 필연의 법칙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진리는 영혼을 갖는다. 이 영혼은 힘의 법칙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양쪽 모두이다. 인간은 두 개의 영원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니체는 인간을 그렇게 묘사했다. 두 개의 영원 사이에 가로 놓인 밧줄, 과거와 미래, 물질과 의식 사이에 가로놓인 밧줄이 인간이다. 이 팽팽한 밧줄 위를 걷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 그대는 밧줄을 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LIST

피타고라스의 황금 시편1

불멸의 신들에게 신성한 경배를 바쳐라.

그대의 신앙을 간직하라.

위대한 영웅들, 영혼들, 신인(神人)들을 추모하라.

 

좋은 아들, 공정한 형제, 다정한 배우자,

훌륭한 아버지가 되어라.

 

친구를 선택하되 덕이 있는 친구를 택하라.

그의 자상한 충고에 귀 기울이고,

그의 삶을 통해 배움을 얻어라.

사소한 불만으로 그를 버리지 말라.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라.

가장 엄격한 법칙이

힘과 필연을 한데 묶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는 '영원한 삶의 철학', 즉 필로소피아 페레니스(philosophia perennis)를 구하는 영원한 순례자를 대표한다. 그는 진리를 구하는 탁월한 구도자다. 그는 이 구도의 길에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여러 스승들과 신비학파, 비의적인 단체를 찾아 넓은 지역을 여행했다. 그는 당시에 알려진 거의 모든 지역이 포함될 정도로 광범위한 곳을 여행했다.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의 신비를 찾아 그리스에서 이집트까지 여행했다.

그 당시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도서관에는 과거의 모든 비밀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 도서관은 지금까지 지상에 존재했던 어떤 도서관보다도 거대한 규모였다. 나중에 이슬람교의 광신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도서관이 모두 전소되기까지 6개월 동안이나 불길이 치솟았다고 한다.

거대한 대륙 아틀란티스는 피타고라스가 세상에 태어나기 2천5백년 전에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지금의 '대서양(atlantic)' 이라는 이름은 아틀란티스 대륙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아틀란티스는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대륙이었으며,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문명도 극에 달하면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극에 달한 문명은 분열과 자멸의 위험을 맞이한다.

지금 인류는 이와 똑같은 위험에 직면해 있다. 인류는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을 때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할 지 모른다. 힘은 막강한데 이해가 그에 미치지 못하면 위험이 뒤따른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것은 자연 재앙 때문이 아니다. 바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과 똑같은 이유에 의한 것이었다. 자연을 정복하려고 한 인간의 힘이 자멸을 초래한 것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침몰은 원자 에너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였다. 인간 스스로 자멸한 것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가 살아있을 당시만 해도 아틀란티스 대륙의 모든 경전과 비밀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대홍수에 관한 전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이 대홍수의 이야기들은 아틀란티스 대륙의 침몰에서 유래했다.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등에서는 과거에 한때 대홍수가 닥쳐 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야기에서는 소수의 선각자들만이 살아 남았다. 노아(Noah)는 선각자이며 위대한 스승이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는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소수의 사람들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로 인해 당시의 문명이 이루어놓은 모든 비밀이 보존될 수 있었고, 이 비밀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몇 년간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다. 그는 이집트의 신비학파, 특히 헤르메스 신비주의에 입문하여 공부했다. 그 다음에 그는 유서 깊은 이 대륙, 인도로 와서 교양 높은 지식인들이 발견한 모든 것들, 인간의 내면에 관해 인도가 알고 있던 모든 내용을 탐구했다.

그는 수년 간 인도에 있다가 티베트로 넘어갔으며, 그 다음에는 중국까지 들어갔다. 그는 평생 동안 진실한 구도자이자 순례자로 살았다. 그는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을 추구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미에서의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이라는 단어의 어원적 의미에 어울리는 철학자였다.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사람이었다. 사랑이 넘치는 사람은 진리에 대해 단순히 머리로 생각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래서 그 역시 위험에 찬 모험을 감행했다.

진리는 가장 소중한 연인(The Beloved) 이다. 그러니 어떻게 연인에 대해 생각만 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가슴 전체로 연인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사랑의 탐구는 단순히 지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당연히 직관적인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아마 처음에는 지적인 탐구로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에만 그렇다. 처음에는 지적인 탐구로 시작하겠지만, 결국 자신의 내면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가야 한다.

그는 지극히 자유롭고 포옹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 편견도 없이 활짝 열린 가슴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전 세계로부터 존경받았다. 그리스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다. 그가 찾아간 모든 신비학파에서 그를 받아들였다. 그의 이름은 온 세상에 알려졌으며 가는 곳마다 큰 기쁨으로 그를 환대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새로운 단체들을 찾아다니는 일을 계속했다. 여전히 새로운 학파에 입문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위대한 통합을 시도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방편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면, 모든 차원에 걸쳐 진리를 알고자 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른 스승들 앞에 무릎을 꿇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일단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탐구가 중단된다. 구도 행각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결코 다른 스승을 찾아가지 않았다. 예수도 깨달은 후에는 다른 스승을 찾아가지 않았다. 노자도 그랬고, 차라투스트라와 모세도 그랬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는 매우 특이한 경우다. 이에 비교될 만한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경우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피타고라스는 진리의 일면을 밝혀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의 제자라도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탐구열은 어느 누구를 통해서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제자도를 갖춘 사람이었다. 존재계 전체를 통해 배울 준비다 되어 있었다. 항상 열려 있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배우는 자로 남았다.

그 당시에 그리스에서 중국까지 여행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위험하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오늘날에는 뉴욕에서 아침을 먹고 런던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인도의 푸나에서 소화불량으로 고생할 수도 있다. 그만큼 쉽고 간단하다. 그러나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데 몇 년씩이나 걸렸다.              

모국으로 돌아왔을 때 피타고라스는 매우 늙어 있었다. 그러나 구도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학파가 탄생했다. 항상 그렇듯이 사회는 그와 그의 학파, 제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 동안 영원한 철학을 추구했으며 마침내 구하던 바를 발견했다. 전 세계에서 수집한 단편들을 모아서 최고로 조화로운 통합을 이루었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들을 낱낱이 밝혀내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사회는 그가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평생 동안 수많은 구도의 길을 시도했으며, 그가 수집한 모든 것을 가르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가 모은 보물은 그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처럼 많은 보물을 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사회는 그를 탄압했다. 어리석은 인류는 항상 이런 식이다.

피타고라스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서양과 동양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이다. 그가 첫 번째 다리였다. 그는 서양적인 마음뿐만 아니라 동양적인 마음까지 깊이 꿰뚫었다.

그는 그리스인이었다. 그는 논리와 과학적인 접근방식이 지배하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그는 동양으로 들어가 직관의 길을 배웠다. 어떻게 신비주의자가 되는지를 배웠다. 그는 천부적인 수학자였다. 그런데 수학자가 신비주의자로 되는 것은 일대 혁명이다. 수학자와 신비주의자는 대립되는 양극과 같기 때문이다.

서양은 남성적인 마음과 공격적인 지성을 대표한다. 반면 동양은 여성적인 마음과 수용적인 직관을 대표한다. 서양과 동양이라는 구분은 단순히 임의적인 구분이 아니다. 이 구분은 아주 심오하고, 의미심장하다.

키플링의 말을 잊지 마라. 그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서양과 동양이 결코 만날 수 없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동양과 서양의 방식은 변증법적으로 정반대다. 그러므로 만남은 불가능해 보인다.

서양은 공격적이고 과학적이다. 자연을 정복할 태세가 되어 있다. 그러나 동양은 비공격적이고 수용적이다. 동양은 자연에 정복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서양은 앎을 얻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하지만 동양은 묵묵히 기다린다.

서양은 삶과 존재계의 신비를 파헤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들은 비빌의 문을 열려고 애쓴다. 그러나 동양은 깊은 신뢰속에서 묵묵히   

기다린다. '내가 준비되면 진리가 저절로 드러나리라' 라는 신뢰를 갖고 기다린다.

서양이 집중의 길을 걷는다면 동양은 명상의 길을 걷는다. 서양은 사념을 택했지만 동양은 무념이다. 서양이 마음이라면 동양은 무심(無心)이다. 그러므로 키플링의 말은 논리적으로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은 절대 불가능한 것 같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말은 지역적인 구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대의 마음과 두뇌를 상징한다. 그대의 두뇌 역시 지구처럼 둘로 나누어져 있다. 두뇌 안에는 동양과 서양이 들어있다. 왼쪽 뇌는 서양이다. 이 부분은 오른 손과 연결되어 있다. 오른쪽 뇌는 동양이다. 이 오른쪽 뇌는 왼손과 연결되어 있다.

서양은 우익이고, 동양은 좌익이다. 이 양자의 방식은 너무나 다르다. 마음의 우반구는 논리적으로 계산하고 사유한다. 모든 과학이 이로부터 나온다. 반면 마음의 좌반구는 시인이며 신비주의자다. 이 마음은 직관하고 느낀다. 이 마음은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불분명하고 막연하다.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다. 모든 것이 일종의 카오스 상태에 있다. 

그러나 이 카오스 상태는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 안에는 위대한 시와 노래가 깃들어 있다. 참으로 풍요롭다. 계산적인 마음은 황량한 사막과 같다. 그러나 계산적이지 않은 마음은 아름다운 정원이다. 거기엔 새들이 노래하고 꽃이 만발하다.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피타고란스는 불가능한 것을 시도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공했다! 그를 통해 동양과 서양이 하나가 되었다. 그의 안에서 음과 양이 하나가 되고, 남성과 여성이 하나가 되었다. 그는 정반대되는 양극의 완벽한 통합, 즉 아르드하나리쉬와르(Ardhanarishwar)였다.

시바와 샤크티가 합쳐지고, 최고의 지성과 가장 심오한 직관일 하나로 만났다. 피타고라스는 햇빛 찬란한 최고의 정상인 동시에 어둡고 깊은 계곡이다. 이것은 매우 드문 통합이다.

그러나 평생에 걸친 그의 노력은 어리석은 사람들, 천박한 대중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여기 몇 개의 시 구절만 남아있다. 이 시구는 우편엽서 한 장에 쓸 정도의 분량밖에 안 된다. 이 위대한 인간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한 것들 중에 겨우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 이 시구 또한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다. 그가 썼던 것은 완전히 없어진 것 같다.

피타고라스가 죽던 날, 수천 명에 달하는 그의 제자들 또한 잔인하게 살해되고 화형에 처해졌다. 단 한명의 제자만이 학원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라이시스(Lysis)였다. 그가 탈출한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보존하기 위해 탈출한 것이다. 이 <피타고라스의 황금 시편(The Golden Verses of Pythagoras)>은 우일한 생존자인 피타고라스의 제자 라이시스가 쓴 것이다.

학교 전체가 불타고 수천 명의 제자들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피타고라스가 오랜 여행을 통해 수집한 모든 것들, 중국, 인도, 티베트, 이집드 등지에서 가져온 소중한 경정과 가르침들이 모두 불에 타 버렸다.

피타고라스는 거대한 통합을 이루어낸 첫 번째 인물이다. 그 후로 2천5백 년이 지났지만 그런 통합을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이런 시도를 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동시에 신비적인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아주 희귀한 일이다.

 붓다, 노자, 차라투스트라 같은 신비주의자들이 있었다. 뉴턴, 에디슨,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아무 마찰 없이 동시에 받아들이는 사람, 이 양쪽 세계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찾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피타고라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와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시도했던 통합은 특히 그 당시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다시 똑같은 시대를 맞고 있다. 세상은 수레바퀴 안에서 움직인다. 산스크리트어에서는 세상을 '삼사(samsara)'라고 한다. 삼사라는 수레바퀴라는 뜻이다. 이 수레바퀴는 거대하기 그지없다. 한 바퀴를 도는데 2천5백 년이 걸린다. 피타고라스가 출현하기 2천5백 년 전에 아틀란티스 대륙은 자멸하고 말았다. 인간 스스로의 과학적 성장에 따른 결과였다 지혜가 없는 과학적 성장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손에 칼을 쥐어주는 것과 같다.

피타고라스 이후 2천5백 년이 흐르고 다시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수레바퀴가 다시 똑같은 지점으로 돌아왔다. 수레바바퀴는 항상 똑같은 지점으로 돌아온다. 이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2천5백 년이 걸린다. 2천5백 년마다 거대한 혼란 상태를 맞는다.

이제 인간은 뿌리 없이 떠다니는 느낌, 삶에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 공허감을 느끼고 있다. 삶이 덧없이 느껴진다. 거대한 암흑에 휩싸인 것처럼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 모든 일이 그저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다. 아무 목적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다. 삶이 그저 우연한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존재계는 그대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죽음 후에는 아무 삶도 없는 것 같다. 무슨 일을 하건 모든 것이 공허하고 형식적이며, 판에 박힌 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인다.

이런 혼란과 무질서의 시대는 아틀란티스 대륙의 경우처럼 무서운 저주가 될 수도 있고,.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어떻게 이용하느야에 달렸다. 거대한 별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전 카오스의 시대가 필요하다.

그 당시에 피타고라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스에는 피타고라스와 헤라클레이토스가 있었다. 인도에는 붓다와 마하비라 등의 많은 인물이 있었으며, 중국에는 노자, 장자, 공자, 맹자, 열자 등의 인물이 있었다. 이란에는 차라투스트라가 있었다. 인도의 전통에는 우파니샤드의 많은 구도자들이 있었고, 유대의 전통에는 모세 등의 인물이 있었다. 이 모든 사람들, 이 위대한 스승들 모두가 2천5백 년 전이라는 특정한 시기에 태어났다.  

이제 우리는 다시 거대한 카오스 시대를 맞고 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렸다. 우리는 아틀란티스 대륙의 문명이 붕괴되었듯이 스스로 멸망할 수 있다. 온 세상이 히로시마처럼 될 수도 있다. 지식의 함정에 빠져 익사하거나 과학의 힘에 의해 집단적인 자살을 초래할 수소 있다. 노아와 같은 선각자와 그를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를 도약의 발판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인류는 자멸할 수도 있도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두 개의 문이 다 열려 있다.

이 대혼란의 시대가 헤라클레이토스, 노자, 차라투스트라, 피타고라스, 붓다, 공자 같은 인물들을 낳을 수 있다면 모든 인류가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기회를 놓치고 있다.

일반 대중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그들은 깜깜한 무의식 속에 산다. 그들은 눈이 멀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명상을 위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면, 내면의 여행, 침묵, 사랑, 신을 위한 발판을 만들 수 있다면, 다가오는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내면에 신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면, 이렇게 된다면 인류는 새로운 탄생을 맞을 것이다. 부활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인간이 탄생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시기를 놓치면 앞으로 2천5백 년 동안 다시 똑같은 상태로 남아있어야 한다. 몇몇 사람은 깨달음을 얻겠지만 극소수에 국한될 것이다. 여기저기서 이따금씩 산발적으로 의식의 각성을 이루고 신성(神性)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출현하겠지만 대다수의 군중은 칠흑 같은 어둠과 불행에 빠져 뒤쳐질 것이다.

대부분의 인류는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과거의 뿌리를 잃어버리고 단절되는 이 순간들은 훌륭한 기회가 될수도 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배울 점이 많다.

피타고라스의 경우를 보라. 사람들은 피타고라스와 그의 이해를 활용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피타고라스가 이룬 위대한 통합을 활용하지 못했다. 피타고라스가 열어놓은 문도 그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단 한 명의 인물이 그토록 엄청난 일, 거의 불가능한 일을 이루어 놓았지만 그것은 전혀 활용되지 못했다.

이 경문들은 아주 적은 분량이다. 피타고라스의 이 경문들은 '예비(preparation), 정화(purification), 완성(perfection)'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흔히 이것을 피타고라스의 '3P' 라고 한다.

'예비(豫備)'는 준비를 갖추는 것, 수용적인 자세로 열려있는 것을 뜻한다. '예비'란 진리에 대한 열망과 갈증을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지적인 관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탐구의 길에 투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외부에 서서 구경하는 방관자가 아니라 직접 뛰어들어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예비'란 그대 안에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도입 단계다. 그대가 스승을 찾아갔을 때 스승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대 안에 불같은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스승은 그대 안에 거대한 열망을 심어준다. 그대 안에 주체할 수 없는 갈망의 씨앗을 뿌려놓는다. 사실, 스승은 그대를 커다란 불만에 시달리게 만든다.

그대는 어떤 만족이다 위안을 얻기 위해 스승을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승은 오히려 그대가 꿈도 꾸지 못했던 새로운 욕망, 전혀 자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욕망에 불을 지펴 활활 타오르게 만든다. 이 욕망은 그대 안의 어두운 구석에 잠복해 있었다. 아주 후미진 곳에 숨어 있었다.

스승은 그 욕망을 밝은 곳으로 끌어내어 불타오르게 만든다. 그는 그대에게 갈증과 불만을 심어주려고 온 힘을 기울인다. 그래야 그대가 탐구를 시작하고 모든 위험을 감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은 그대의 모든 욕망이 오직 하나의 흐름 속에 응집되도록, 낮이나 밤이나 진리, 신, 열반, 즉 니르바나에 대한 단 하나의 욕망이 불타오르도록 그대를 준비시킨다. 이 진리, 신, 열반은 똑같은 것을 일컫는 다른 이름일 뿐이다.

'예비'란 제자가 자신의 상황을 자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나는 어둠 속에 갇혀 있다. 그러므로 나는 빛을 밝혀야 한다. 지금까지 나는 삶을 쓸모없이 낭비해 왔다. 이것은 올바른 삶의 길이 아니다.'

이런 자각이 있어야 한다. 신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한 삶은 공허하고 무기력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제자가 돈, 정치권력, 특권 등의 꿈에서 벗어나도록 강한 충격이 가해져야 한다. 그에게 궁극적인 꿈, 지금까지의 모든 꿈을 태워버리는 궁극적인 꿈이 주어져야 한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것, 만물의 여여(如如)한 실상을 아는 것, 우리가 온 근원은 무엇이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아는 것. 이런 것들이 궁극적인 꿈이다.

두 번째 단계는 '정화(淨化)'다. 구도의 열망이 일어난 다음에는 정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무게, 그대가 항상 짊어지고 있는 짐들을 덜어내야 한다. 그대는 그 짐들을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고 계속 짊어지고 다닌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흡수한 모든 독소들을 정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많은 종류의 독을 마시며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힌두교라는 독을 마시고, 어떤 사람은 이슬람교도라는 독을 마신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독교라는 독을 마신다. 이 모두가 그대에게 편견을 심어주는 독극물이다. 이 독극물들이 그대를 사회에 얽어매고 세뇌시켰다.

정화는 모든 세뇌작용, 이데올로기, 편견, 모든 관념과 철학 등 남들에게서 배운 모든 것들을 버리는 것이다. 타불라 라라(tabula rasa),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칠판, 완벽한 백지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완벽한 백지상태가 되어야만 신이그 위에 무엇인가 쓸수 있다. 사회로부터 주어진 모든 말들이 사라지고 완벽하게 침묵해야만 한다. 그래야 신이 그대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 진리가 그대의 귀에 신비를 속삭일 수 있으려면 그대가 완전히 텅 비어야 한다. 이렇게 텅 비는 것이 정화다.

정화는 깨끗하게 정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사실,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대는 자신의 주변에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놓고 있다. 그대 자신을 여러 겹의 껍데기, 여러 개의 인성으로 포장하고 있다.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본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 그 모든 가면을 벗어던져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 진실한 그대 자신이어야 한다. 완전히 벌거벗어야 한다. 감추지 말라. 거짓을 말하지 말라. 가식을 버려라! 이것이 정화의 의미다.

세 번째는 '완성(完成)'이다. 가식을 버렸을 때,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독극물을 제거했을 때, 거울에 묻은 먼지를 깨끗이 닦아냈을 때 저절로 완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완성'은 '유니오 미스티카(uniomystica)', 즉 '통합'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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