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의 황금 시편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에게는 어리석은 열정과 싸워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그 열정을 굴복시키는 법을 배워라.
침착하고 근면하라. 그리고 청결하라.
모든 노여움을 피하라.
공개적이든 비밀스럽든 결코 악을 허용햐지 말라.
무엇보다도 먼저, 그대 자신을 존중하라.
그대 자신을 비추어보기 전에는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
그리고 공정하라.
명심하라. 거역할 수 없는 힘은 죽음을 운명으로 결정했다.
쉽게 얻은 부와 명예는 쉽게 잃어버릴 것이다.
운명이 수반하는 불운들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판단하라.
그것들을 견디고 이겨 내라. 그 특성들을 수정하는데 최선을 다하라.
신은 가장 잔인한 일에 현자(賢者)를 노출시키기 않는다.
진리와 마찬가지로 오류에게도 그것을 사랑하는 연인들이 있다.
각자(覺者)는 인정하거나 비판할 때나 항상 주의 깊다.
오류가 승리하면 그는 물러나 때를 기다린다.
피타고라스는 인간의 행위를 유발하는 두 가지 동기를 인식했다. 하나는 필연성으로 낮은 차원의 본질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힘으로 높은 차원의 본질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 둘다 더 함축적인 근본 법칙, 즉 도(道), 담마(dhamma), 토라(torah), 로고스(logos)에 의존한다. 동양에서 우리는 필연성의 법칙을 프라크리티(prakriti)라 부르고, 힘의 법칙을 푸루샤(purusha)라고 불러왔다.
피타고라스는 인도의 현자들과 마주 앉아 영적인 교류를 나누면서 이 두 가지 법칙을 배웠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이 두가지 법칙을 직접 경험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일별은 동양에서 스승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는 가운데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프라크리티는 낮은 본질,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본질을 의미한다. 반면에 푸루샤는 더 높은 본질, 의식과 각성을 의미한다. 프라크리티가 원(圓)의
둘레라면 푸루샤는 원의 중심이다. 피타고라스는 이것을 자기의 언어로 표현했다. 그는 프라크리티를 필연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더 낮은 차원으로 내려갈수록 필연의 법칙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더 높은 의식의 세계로 상승할수록 필연의 법칙이 약해지고 힘의 법칙, 자유의 법칙이 더 작용하게 된다.
가장 낮은 차원에서는 인과율(因果律)만이 유일한 법칙이다. 과학은 오직 인과율만을 인식한다. 따라서 그들은 신을 인식할 수 없다. 그들은 의식(consciousness)을 인식할 수 없다. 그들의 방법은 자체가 그런 인식을 가로막는다. 과학은 사다리의 가장 낮은 칸에 갇혀있다. 존재계는 여러 칸을 가진 사다리다. 이 사다리는 그대 안에도 존재한다. 모든 인간 속에 이 사다리가 축소된 형태로 존재한다.
육체는 프라크리티, 낮은 본질이다. 육체는 필연의 법칙을 따른다. 붓다의 육체도 필연의 법칙을 따른다. 그도 나이를 먹어 늙을 것이고 죽음을 맞을 것이다. 붓다에게도 자연의 이법(理法)은 다르지 않다. 이것은 아주 엄격한 법칙이다. 예외가 없다.
내가 예수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탄생은 가장 낮은 필연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여기엔 아무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예수가 순수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처녀'라는 말이 상징적인 의미로 쓰인다면 그때 이 말은 완벽하게 옳다. 이 말이 마리아의 순수함을 가리키는 시적인 표현이라면 완벽하게 옳다. 그러나 이것을 생물학적 사실로 주장한다면, 마리아가 진짜로 숫처녀였다고 주장한다면 그대는 어리석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탄생은 필연의 법칙을 따른다.
부활(復活)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예수라 할지라도 일단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연의 법칙은 어떠한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부활'이라는 말이 진정한 생명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면, 그대의 내면에 있는 영원한 그 무엇은 계속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면, 거친 육체는 죽지만 그대 내면의 미묘한 핵심은 영원하다는 의미로 이 '부활'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이 낱말이 영적인 재탄생을 뜻하는 용도로 사용된다면, 이때 이 '부활'이라는 말은 완벽하게 옳다. 그러나 역사적인 의미에서는 결코 옳지 않다.
몸은 대지의 일부다. 그러나 그대의 의식은 하늘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사실, 그대의 의식은 하늘에 속한다.
인간은 두 가지 법칙이 어울리는 만남의 장(場)이다. 필연의 법칙과 힘의 법칙, 푸루샤와 프라크리티, 속박과 자유, 하늘과 땅, 몸과 영혼,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거침과 미묘함. 인간은 만남의 장소이다. 이것이 인간의 영광이자 비극이다.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번뇌가 된다. 상반되는 두 개의 엄청난 힘이 그대 안에서 만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불안과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두 개의 힘이 양 쪽에서 그대를 잡아당기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언제나 갈등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법칙을 이해한다면, 이 두가지 법칙에 어떤 리듬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은 곳에서 그들이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을 안다면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은 항상 상호보완적이다. 삶과 죽음은 대립되지만 상호보완적이다. 남자와 여자, 선과 악도 대립되지만 상호보완적이다. 이런 상호보완성을 볼 수 있을 때 초월이 일어난다. 그대에게 잠재해 있던 영광이 드러난다. 그대는 빛나는 광채가 된다. 이것이 붓다의 경지이며 예수의 경지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의식, 붓다 의식, 크리슈나 의식이라고 불러도 좋다.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다. 의미는 똑같다. 긴장이 풀어지고 번뇌가 녹아 없어졌을 때, 육체와 영혼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육체와 의식을 아무 마찰 없이 조화롭게 운용하는 법을 배웠을 때, 이때 그대의 삶은 아름다운 음악을 창조한다. 그 음악이 명상이다. 그대의 삶은 엄청난 의미를 담은 멜로디가 된다. 그대는 하나의 축제, 축연(祝宴)의 장이 된다. 그대는 꽃처럼 활짝 피어난다.
이때 그대는 육체를 기반으로 삼고, 의식은 사원을 짓는데 사용한다. 육체는 기반이 되고 의식은 사원이 된다. 그대는 육체를 피리로 이용한다. 의식은 그 피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가 된다. 그대는 인도의 현악기인 시타르(sitar)처럼 사용하고, 그대의 의식은 시타르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
이런 현상에 주목한 적이 있는가? 하나의 물질인 악기를 통해 전혀 물질적이지 않은 음악, 철저하게 영적인 음악이 흘러나온다. 피타고라스는 이와 마찬가지로 필연의 법칙과 힘의 법칙이라는 두 가지 법칙도 하나의 근본 법칙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노자는 이 근본 법칙을 도(道)라고 부그로 예수는 로고스(logos)라 부른다.
이 근본 법칙을 붓다는 다르마(dharma)로 부르고, 모세는 토라(torah)로 부른다. 이 근본 법칙은 이원적인 모든 것을 용해시켜 하나로 통합한다. 그 하나가 신이다. 이 근본 법칙이 신이며 진리다.
진리는 육체를 갖는다. 이 육체는 필연의 법칙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진리는 영혼을 갖는다. 이 영혼은 힘의 법칙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양쪽 모두이다. 인간은 두 개의 영원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니체는 인간을 그렇게 묘사했다. 두 개의 영원 사이에 가로 놓인 밧줄, 과거와 미래, 물질과 의식 사이에 가로놓인 밧줄이 인간이다. 이 팽팽한 밧줄 위를 걷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 그대는 밧줄을 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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