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의 황금 시편4

무엇을 했고 무엇을 빠뜨렸는지 스스로 자문하기 전에는 잠이 그대의 피곤한 눈을 덮지 못하게 하라.

그것이 악이면 삼가고, 그것이 선이면 계속 행하라.

나의 조언에 대해 명상하라. 그것을 사랑하고 따르라.

그 조언은 그대를 신성한 덕으로 인도하는 법을 알고 있다.

무한함과 순수함의 상징인 '신성한 네 번째', 자연의 근원이고 신들의 원형(源形)인 '신성한 네 번째'를 우리의 가슴 속에 심어준 자의 이름으로 나는 맹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그대의 영혼에 주어진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함으로써 이 신들을 강하게 자극하라.

일을 시작하는 것은 그대지만 그들의 도움을 받은 일만이 완성될 수 있다.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후에는 아무것도 그대를 속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다양한 존재들의 핵심을 알아낼 것이며 만물의 목적과 원리를 알

 

될 것이다.

하늘이 뜻한다면, 그대는 본질이 만물 안에서, 모든 곳에서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러므로 그대의 진정한 권리를 깨닫기만 하면 그대의 가슴은 더 이상 헛된 욕망을 먹고 살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악마에게 먹힌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그런 열매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피타고라스는 서양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는 서양에 최초로 채식주의를 도입했다. 이 채식주의라는 개념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채식주의는 생명에 대한 존경에 기초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이것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생명체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인간은 홀로 동떨어진 섬이 아니다. 인간은 거미줄처럼 얽힌 무한한 생명체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 연결된 그물망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것은 추하고 비인간적인 행위일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비과학적인 것이다. 다른 동물들을 죽일 때 우리는 우리의 기반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의 유기적 단일체로 존재한다. 인간은 이 조화로운 오케스트라의 일부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새도 동물도 물고기도 없고 오로지 인간만 있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그런 삶은 매우 지겨운 삶이 될 것이다. 세상이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잃어버릴 것이다. 숲이 텅 비게 될 것이다. 뻐꾸기도 울지 않고 새들이 날아오르지 않을 것이다. 물고기가 없는 물은 매우 슬프게 보일 것이다.

다양한 생명체 안에 있는 삶은 하나의 유기적 단일체로 존재한다. 우리는 그 유기체의 일부다. 부분은 마땅히 전체를 존중해야한다. 이것이 채식주의의 기본 사상이다. 채식주의는 생명체를 파괴하지 말라고 말한다. 삶이 곧 신이라고 말한다. 삶을 파괴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이 생태계 자체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여기엔 매우 과학적인 요소가 숨어 있다. 인도에서 태어난 모든 종교가 기본적으로 채식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인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탄생한 종교들은 모두 육식을 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의식의 최고 정점은 인도에서 발현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채식주의는 정화 작용을 한다. 고기를 먹으면 필연성의 법칙에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대는 더 무거워지고 땅 쪽으로 더 끌리게 된다. 그러나 채식을 하면 그대는 더 가벼워진다. 은총의 법칙, 힘의 법칙 아래 놓이게 되고, 하늘을 향해 상승하기 시작한다.

음식은 단순히 음식에 그치지 않는다. 음식은 곧 그대이다. 무엇을 먹든 간에 그 음식은 그대가 된다. 근본적으로 살육과 폭력에 기초한 것을 먹으면 그대는 필연의 법칙을 초월하여 상승할 수 없다. 그대는 어느 정도 동물적인 차원에 머물 것이다. 동물적 차원을 초월하여 나아가기 시작할 때, 어떠한 동물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인간이 태어난다.

채식주의는 의식적이고 사려 깊은 노력이다. 지상에 그대를 묶어두고 있는 무거움을 벗어던져야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그래야 그대 홀로 날아오르는 것이 가능해진다. 채식주의는 이를 위한 노력이다.

음식이 가벼울수록 명상이 더 깊어진다. 반대로 음식이 거칠고 무거우면 명상이 더 어려워진다.              

나는 육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명상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불필요한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이것은 돌멩이를 잔뜩 짊어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돌멩이를 짊어지고도 정상에 오를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쓸데없는 문제를 떠안는 것이다. 애초부터 돌멩이를 던져버리고 몸을 가볍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등산이 한결 쉽고 즐거웠을 것이다.

지성적인 사람은 산을 오를 때 돌을 짊어지고 가지 않는다. 그는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그는 짐을 더 가볍게 만든다. 설령 무엇인가 짊어지고 있다 해도 그는 그것을 던져버릴 것이다.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와 텐징(Tenzing)은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그들은 산을 오르는 도중 모든 것을 던져버려야 했다. 높이 올라갈수록 짐을 갖고 가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필수적인 물건들까지 던져버렸다. 자기 몸 하나 끌고 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채식주의는 엄청난 도움을 준다. 채식주의는 그대 몸의 화학적 성질을 변화시킨다. 그대가 동물을 먹을 때,                  

동물은 살해당할 때 자연히 분노와 두려움에 차게 된다. 그대가 동물을 죽일 때, 그대가 그런 입장에 놓였다고 생각해 보라. 그대의 의식이 어떤 상태에 놓이겠는가? 그대의 심리 상태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대의 몸 안에서 온갖 종류의 독이 방출될 것이다.

그대가 분노할 때 어떤 종류의 독이 피 속에 흘러나온다. 두려움에 차 있을 때에는 다른 종류의 독이 피 속에 방출된다. 살해당할 때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극에 달하게 된다. 따라서 신체의 모든 분비선에서 온갖 독이 방출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독이 퍼져있는 고기를 먹는다. 어떻게 독이 퍼져있는 고기가 그대를 분노와 폭력성으로 물들이고 공격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살상에 의존해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존중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대는 삶에 적대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삶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기도란 삶에 대한 존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의 피조물을 적대시하는 사람은 신에 대해서도 우호적일 수 없다. 피카소의 그림을 찢어버리는 사람이 피카소를 존중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피조물은 신에게 속한다. 신이 그들 안에 살고 있다. 그들 안에 신이 숨 쉬고 있다. 그대가 신의 현현(顯現)이듯이 모든 피조물 또한 신의 현현이다. 모든 피조물이 형제자매다.

동물을 보면서 형제애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대는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대는 기도가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단지 먹기 위해, 단지 맛보기 위해 생명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추한 생각이다. 인간이 어떻게 이런 짓을 계속하는지 믿기 힘들 정도다.

피타고라스는 서양에 채식주의를 최초로 도입했다. 자연과 친구로 지내는 것, 모든 피조물과 친하게 지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이런 기초가 있어야만 기도와 명상의 토대가 마련된다. 그대 자신을 관찰해 보라. 고기를 먹으면 명상이 더 어려워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붓다는 육식을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사 계급인 크샤트리야 출신이었다. 그러나 명상의 체험이 서서히 그를 채식주의로 변화시켰다. 이것은 그의 내적인 이해에 따른 결과였다. 그는 고기를 먹었을 때마다 명상이 더 어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명상이 더 쉬워졌다. 이것은 간단한 관찰의 결과였다.

채식주의는 종교와 아무 상관도 없다. 채식주의는 기본적으로 과학적인 것이다. 채식주의는 도덕성과 무관하다. 그러나 미적 차원과는 상당한 관계가 있다.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 각성과 이해의 인간이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고기를 먹는 사람은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함축된 의미가 무엇인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피타고라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조롱하고 핍박했다. 피타고라스는 동양으로부터 가장 훌륭한 보물 중의 하나를 가져다가 서양에 안겨 주었다. 그는 위대한 시도를 했다. 그의 말을 들었더라면 서양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문제는 결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피타고라스가 서양적 의식의 기반이 되었더라면 세계 대전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역사 전체를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그는 열심히 노력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사람들이 눈이 멀고 귀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듣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습관을 바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사람들은 습관에 따라 기계적으로 살아간다. 피타고라스는 의식의 각성이라는 메시지를 가져왔다. 이 메시지에 귀 기울였다면 서양에 엄청난 명사의 에너지가 발산되었을 것이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스탈린 같은 인물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습관이 되풀이되고 있다.

인간의 신체를 바꾸기 전에는 의식을 변화시킬 수 없다. 고기를 먹을 때 그대는 동물을 흡수한다. 그런데 동물은 초월되어야 하는 것이다. 피하라! 진정으로 더 높이 올라가기를 원한다면, 진정으로 의식의 정상에 오르고 싶다면, 진실로 신을 알고 싶다면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대 자신의 삶을 둘러보고 아주 작은 습관 하나까지 자세하게 관찰해야 한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것이 삶 전체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때로는 아주 간단한 것이 그대의 삶 전체를 믿을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도 있다.

채식을 해보라. 그러면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명상이 더 쉬워진다. 사랑이 더 미묘해지고 거친 면이 없어진다. 사랑의 감성이 발달하고 관능적인 면은 줄어든다. 성적인 면이 줄어들고 더 기도와 가깝게 된다. 신체 또한 다른 분위기를 갖기 시작한다. 그대는 더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여성적이 된다. 공격성은 줄어들고 수용적인 면이 증가한다.

채식은 그대 안에 연금술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채식은 그대 안에 비금속이 황금으로 변형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

두 번째로 피타고라스가 서양에 도입한 것은 환생이라는 개념이었다. 이것 또한 어느 정도 채식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그대는 다시 한 번 놀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채식주의 종교는 환생을 믿는다. 육식을 하는 모든 종교는 삶이 단 한번 밖에 없다고 믿는다. 이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인도에는 브라만교, 자이나교, 불교가 있다. 이들은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르다. 세상 어디에서도 이렇게 다른 사상들을 찾아볼 수 업을 정도다. 힌두교는 신을 믿고 영혼을 믿는다. 그러나 자이나교는 신을 믿지 않는다. 자이나교는 기본적으로 신이 없는 종교다. 불교는 영혼조차 믿지 않는다. 신도 없고 영혼도 없다. 그대는 신도 없고 영혼도 없는 종교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차이점은 이렇게 크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 관해서는 그들 모두가 동의한다. 그 한 가지가 바로 환생이라는 개념이다. 영혼을 믿지 않았던 붓다조차 이에 동의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혼이 없는데 어떻게 환생이 있을 수 있는가? 붓다는 영혼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떤 연속성이 있다고 믿었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저녁 때 촛불을 켜놓고 다음 날 아침 그 촛불을 불어 끌 때, 그대는 그 불꽃이 전날 저녁에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과 똑같은 불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똑같은 불꽃이 아니다. 하진 어떤 면에서 연관성이 있다. 불꽃은 밤새도록 변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불꽃이 사라지고 있었다. 매순간마다 하나의 불꽃이 연기 속에 사라지고 새로운 불꽃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틈을 보지 못한다. 어떤 연속성이 있다. 계속적이면서도 매우 신속한 변화가 있다. 밤새도록 하나의 불꽃이 다른 불꽃으로 대치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침에 촛불을 불어 끌 때의 그 불꽃은 그대가 전날 저녁에 밝혀놓은 그 불꽃과 같은 불꽃이 아니다. 하지만 거의 같아 보인다. 첫 번째 불꽃과 마지막 불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의 연속성, 하나의 과정에 속해 있다. 그러나 하나의 불꽃, 하나의 영혼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환생의 개념이다. 연속성은 이어지지만 개체는 사라진다. 개별적인 영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환생을 믿었다. 자이나교는 환생을 믿고 브라만교도 환생을 믿는다.

그러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환생을 믿지 않는다. 이 세 종교는 인도 밖에서 탄생했다. 그렇다면 인도에서 태어난 세 종교는 어떻게 해서 모두 환생이라는 개념을 발견하게 된 것일까?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왜 그들은 환생이라는 한 가지 점에 모두 동의하는 것일까? 그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생이라는 이 경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놀랍게도 그 해답은 채식주의에 있다. 철저한 채식주의자는 쉽게 전생(前生)을 기억할 수 있다. 그는 전생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밝은 통찰력을 갖는다. 그는 둔하지 않다. 그의 에너지는 막힘없이 쉽게 움직인다. 그의 내면에 흐르는 의식의 강은 가장 오랜 고대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다. 그가 원하는 만큼 아득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육식을 하는 사람의 의식은 여러 방면에서 막혀 있다. 그는 자기 안에 거친 물질을 채워 넣는다. 이 거친 물질이 장애물로 작용한다. 인도 밖에서 태어난 세 종교, 육식을 하는 그들 모두가 환생이라는 개념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환생을 경험하지 못했다.

피타고라스는 인도에 살았다. 그는 채식을 하면서 깊이 명상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전생을 자각하게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붓다가 '한때 나는 코끼리였다. 한때는 물고기였고, 한때는 나무였다.'라고 말한 뜻을 이해했다.

진화라는 개념은 동양에서 훨씬 전부터 있었다. 서양에서 다윈이 주장한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한 진화론이었다. 다윈의 생각은 매우 조잡하다. 그는 원숭이가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윈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고 있다. 여기에 문제가 제기된다. 왜 일부의 원숭이들만 인간이 되었는가? 다른 원숭이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원숭이는 기본적으로 모방에 능하다. 일부의 원숭이들이 인간이 되었다면 다른 모든 원숭이들이 이를 모방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원숭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ㄲ? 그들은 모방에 능하다. 그런데 왜 일부만 인간이 되었는가?

원숭이는 아직도 존재한다. 수십만 년이 지났어도 원숭이는 여전히 원숭이다. 그대는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이 된 원숭이를 보았는가? 화창한 아침, 잠에서 깨어나 보니 문득 인간이 되어 있는 원숭이를 보았는가? 아직까지 이런 기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연결 고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원숭이와 인간의 차이는 실로 크다.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다.

서양 진화의 개념인 다윈의 진화론은 매우 조잡하다. 동양의 진화론은 이보다 훨씬 더 정교하다. 진화는 원숭이의 몸이 인간의 몸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 물고기의 몸이 인간의 몸으로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물고기의 내면은 계속 성장한다. 그 내면은 이 몸에서 저 몸으로 계속 옷을 바꾸어 입는다.

몸에서 몸으로 가는 진화, 그런 성장은 일어난 적이 없다. 성장은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원숭이가 특정한 의식에 도달하면 다음 생에 그는 원숭이가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는 원숭이로 죽어서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진화는 원숭이의 몸 자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 몸은 영혼에 의해 충분히 사용되었다. 또는 이 영혼을 '연속성'이라고 불러도 좋다. 원숭이의 몸은 충분히 사용되었으며, 이제 영혼은 더 나은 몸을 가질 준비가 되었다. 성장의 가능성이 더 높은 몸을 가질 준비가 되었다.

영혼이 이 동물에서 저 동물로 옮겨간다. 진화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다. 양초는 진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꽃은 이곳저곳 옮겨 붙는다. 불꽃은 더 높이 올라간다. 의식이 진화하는 것이지, 물질적인 육체, 생물학적인 육체가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다윈이 놓친 핵심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최소한 1만 년 전부터 이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명상을 통해 이런 자각이 일어났으며, 이 자각은 채식주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전생을 기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붓다와 마하비라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테크닉이었다. 제자가 와서 입문할 때마다 붓다와 마하비라가 첫 번째로 요구한 것은 전생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훌륭한 방법들이 개발되었다.

일단 전생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삶이 완전히 변형될 것이다. 왜 그럴까? 수많은 생 동안 해온 짓을 지금도 되풀이하고 있다는 어리석음을 알게 되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대는 똑같은 일을 수도 없이 되풀이해왔지만 매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가령 그대가 돈에 미쳐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대는 과거에도 돈에 미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과거에 그대는 성공을 거두어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죽었다. 모든 재산이 아무 소용도 없었다. 죽음이 모든 것을 빼앗아갔고, 그대는 빈손으로 죽었다. 예전처럼 가난하게 죽었다. 그대는 그 이전의 전생까지도 기억해낸다. 그대는 거대한 왕국을 거느린 왕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절망과 불행 속에 살다가 슬픔 속에 죽었다.

이런 것을 기억해내고도 여전히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겠는가? 여전히 더 많은 돈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열망은 한 순간에 땅바닥에 추락하고 말 것이다. 전생을 기억해낸다면 그대가 똑같이 어리석은 짓을 얼마나 되풀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면 똑같이 어리석은 짓을 얼마든지 되풀이할 수 있다.

환생은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다. 환생은 하나의 경험이며 철저하게 과학적인 사실이다. 전생을 기억해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대는 인간으로 살았던 전생만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서서히 그대는 동물로 살았던 전생을 기억할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나무와 바위로 존재했던 전생까지 기억해낼 것이다. 그대는 다양한 형상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긴 삶을 살았다. 한때 물고기였다는 것을 기억해낸다면 다시는 물고기를 먹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채식주의는 그대를 전생의 기억으로 인도한다. 전생을 앎으로써 그대는 더욱 더 채식주의자가 된다. 모든 생명체, 존재하는 모든 것이 형제자매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동물들을 죽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스스로 그렇게 결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세 번째로, 그는 삶이 하나의 수레바퀴, 탄생과 죽음의 수레바퀴라는 사상을 서양에 도입한 첫 번째 인물이다. 바퀴가 계속 굴러가고, 우리는 이 바퀴에 매달려있다. 바퀴는 반복해서 움직인다. 똑같은 궤도를 되풀이한다. 새로운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태어나고, 젊은이가 되고, 섹스와 욕망에 가득 차고, 그러다가 힘이 빠지면 늙고 병들고 절망하고 지쳐서 죽는다. 그런 다음 다시 태어나고.......... 이런 일이 되풀이된다.

탄생은 죽음을 가져오고, 죽음은 탄생을 가져온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바퀴가 계속 굴러간다. 인도에서는 세사을 '삼사라(samsara)'라는 말로 부른다. 삼사라는 바퀴를 의미한다. 유년기와 청년기, 노년기는 바퀴의 살에 불과하다. 우리는 바퀴에 매달려 있고, 세상의 모든 것이 움직이듯이 이 바퀴 또한 계속 움직인다. 지구는 태양 주변을 돌고, 태양은 알려지지 않은 다른 태양의 주변을 돈다. 달이 지구 주변을 돌고, 달과 지구는 태양주변을 돌고, 태양은 다시 다른 태양의 주변을 돈다.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모든 별이 움직이고 있다. 모든 것이 순환 속에서 움직인다. 계절도 순환하며 움직인다.

삶은 하나의 바퀴이며, 이 바퀴는 반복해서 움직인다. 이 바퀴에 매달려있다면 그대는 아무 곳에도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이 바퀴에서 벗어나야만 자유로워진다. 이것은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탄생과 죽음의 이 수레바퀴에서 해방되는 것이 자유다. 그때 그대는 그저 존재할 뿐 움직이지 않는다. 이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오직 현재가 있을 뿐이다. 지금이 유일한 시간이고, 여기가 유일한 공간이다.

이것이 열반과 해탈의 경지다. 이것이 진정한 신의 왕국이다. 그대는 단지 존재한다. 모든 혼란이 사라지고 태풍이 잠잠해졌다. 절대적인 침묵이 감돈다. 그 침묵 속에 노래가 있다. 그 침묵 속에 음악이 있다. 귀로 들리지 않는 음악, 연주되지 않는 음악이 있다. 그 침묵 속에 기쁨이 있고 지복이 있다. 이 지복은 영원하다. 결코 변하지 않는다.

모든 변화는 그대가 바퀴에 매달려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바퀴에서 벗어나면 모든 변화가 사라진다. 이때 그대는 여기에 존재한다. 항상 여기에 존재한다.

이것이 모든 구도자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상태다. 어떻게 하면 이 탄생과 죽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까, 어떻게 하면 탄생도 죽음도 없는 영원의 차원,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모든 것이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영원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가, 이것이 진실한 모든 구도자가 추구하는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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