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어느 날 백장이 마조를 시봉하여 산보를 나갔다. 그때 돌연, 머리 위로 들오리 떼가 날아 올랐다. 마조가 물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갔는가?"
"그냥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조가 느닷없이 백장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백장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마조가 말했다.
"날아가 버렸다고? 그들은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다!"
그 순간 백장이 문득 깨달았다.
이튿날 마조가 법당에 올라 법좌에 앉았다. 이윽고 대중이 다 모이자 백장이 돌연 몸을 일으켜 자리를 걷어 버렸다. 그러자 마조는 곧 방장으로 돌아갔다. 백장이 그를 따라 들어갔다.
마조가 물었다.
"아까 내가 미처 설법을 시작하기도 전에 왜 자리를 걷어 버렸는가?
백장이 말했다.
"어제는 스님께 코를 비틀려서 아파 혼났습니다."
"어제 너는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었는가?"
"오늘은 이제 코가 아프지 않습니다."
"어제의 일을 잘 알고 있구나."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좌선 의자에 올라 앉은 마조는 그날도 어김없이 '퉤'하고 침을 뱉었다.
시자(侍者)가 물었다.
"왜 침을 뱉으십니까?"
"산하대지 삼라만상이 모두 내 눈 안에 들어오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
"볼 만한 구경거리를 왜 싫어하십니까?"
"너에겐 그럴지 모르지만 나는 싫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경계(境界)입니까?"
"보살의 경계다."
원문 이해
마조는 오리가 날아갔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오리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도 안다. 그는 지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처음에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물었을 때 백장이 놓쳤던 응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마조는 오리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러니 마조의 질문은 객관적인 대상에 대해 묻는 것이 아이라는 점을 명심하라. 바로 이 점에서 백장은 표적을 놓쳤다. 그의 응답은 생각을 통해 나온 것이었다. 백장은 말했다.
"들오리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라도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것은 가슴의 빈 공간에서 나온 응답이 아니다. 그것은 무(無)의 거울에서 나온 응답이 아니다.
여기서 그는 과녁을 빗맞췄다.
"어디로 갔는가?"
"그냥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조가 느닷없이 백장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백장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마조가 말했다.
"날아가 버렸다고? 그들은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다!"
그들이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그들은 항상 여기에 있었으며 앞으로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여기>는 광대하다. 그들은 어디에 있든 항상 <여기>에 있다. 그들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마조가 백장에게 기대했던 대답이다. 마조는 백장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그것은 백장이 마음을 통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마음은 오직 고통만을 가져온다. 마음은 곧 고통이다.
스승이 말한 의미는 '모든 것은 항상 <여기>에 있다'는 것이었다. 들오리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백장에게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으며 아무 것도 딴데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은 순간은 대단히 중요한 순간이다. 여기가 유일한 공간이며, 지금이 유일한 시간이다.
침묵으로 지켜보는 것.
마조가 대중들 앞에서 설법을 하려고 하는데 백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보통의 경우 수제자는 선사가 설법을 끝낸 후 자리를 걷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백장은 스승이 설법을 시작하기도 전에 자리를 걷어 버렸다. 그것은 마조를 법좌에서 끌어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자 백장은 스승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백장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백장은 이제 깨달은 스승이 되었다. 어제의 경험..... 이제 그는 스승과 똑같은 방식으로 응하고 있다. 그는 자리를 걷어 치움에 의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저는 설법이 필요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어제 모두 얻었습니다. 저는 위로가 필요 없습니다. 오늘은 코가 아프지 않으니 어떤 설법도 필요 없습니다."
마조가 좌선의자에서 침을 뱉는 것은 진짜로 산하대지가 싫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제자가 무분별(無分別)의 침묵을 유지하는지, 아니면 분별에 휩쓸리는지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선의 모든 태도는 무분별이다. 분별하지 마라.
적어도 제자는 스승의 행동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시자는 주시자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는 마조가 침을 뱉는 모습을 그저 보고 있어야 했다. 마조는 시자를 자극하고 있다. 그는 제자의 분별심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자는 분별하지 말라는 스승의 가름침을 까맣게 잊었다.
그저 지켜보라. 특히 스승의 행동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좌선의자에 앉아 침을 뱉는 것이 메스꺼운 짓이라는 것을 마조가 몰랐겠는가? 마조는 그대가 분별 없는 부동의 상태에 머물기를 바란다. 그저 거울처럼 지켜보기를 원한다.
좌선의자 앞에는 산하대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자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스승의 설명은 단지 제자를 시험하기 위함이다.
그는 제자가 이렇게 말하길 원한다.
"스승님의 무분별심에 무슨 이상이 생겼습니까?"
"내 뺨을 갈겨라. 판단하는 나를 갈겨라."
이것이 붓다의 경지이다. 이젠 더 이상 말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 마조는 자신의 방편이 실패했음을 알고 말문을 닫았다. 아무 말이 필요 없다. 주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모든 환상이 사라진다. 거짓된 모든 것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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