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혜자는 양나라의 제상이었다. 그는 장자가 자신의 지위를 탐내 그를 몰아내고 대신 들어앉을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비밀 정보를 믿게 되었다.
장자가 양나라를 방문하러 왔을 때 혜자는 경찰을 풀어 그를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사흘 낮과 밤을 수소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장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 기간이 지난 뒤 장자는 스스로의 뜻에 따라 혜자 앞에 모습을 나타내 말했다.
"그대는 저 남쪽 나라에 사는 한 마리의 신비로운 새, 영원히 늙지 않는 불사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불멸의 불사조는 남쪽 바다에서 올라와 저 북쪽 바다로 날아가는데 신성한 나무 위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가장 고결하고 희귀한 열매가 아니며 입 대지 않으며 오로지 가장 청결한 샘에서만 물을 마신다.
한 번은 부엉이 한 마리가 이미 반쯤 죽은 쥐를 뜯어먹고 있다가 비상해 가는 이 불사조를 보았다.
부엉이는 그를 올려다보고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두려워하고 당황하며 죽은 쥐를 꽉 움켜잡았다.
재상이여, 그대는 왜 이토록 광적으로 그대의 재상직에 매달리며 나를 보고는 놀라 비명을 지르는가.
원문 이해
종교적인 마음은 근본적으로 욕망이 없는 마음이다. 조금이라도 욕망이 있다면 종교적으로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내적으로 우월한 자만이 종교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곧 그 안에 열등감을 담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라.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법칙 중 하나다. 이것을 이해하지 않아도 사원으로 갈 수 있고, 히말라야로 갈 수 있다. 기도하고 명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헛된 일이 될 것이다. 마음의 본성이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가 아닌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단순히 삶을 낭비하고 마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때 모든 탐구는 헛된 것이 된다. 욕망은 결코 신에게로 인도할 수 없다. 오직 욕망이 없는 마음만이 문이 될 수 있다.
현대 심리학도 열등감이
욕망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장자나 노자, 붓다에게 동의한다. 정치인은 인간성의 가장 나쁜 본성에서 생겨난다. 모든 정치인은 수드라, 곧 불촉천민들이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의 마음은 열등의식을 느낄 때마다 남보다 우월해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반대쪽이 태어나는 것이다. 추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대는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한다. 아름답다면, 굳이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추한 여자를 보면 정치인들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 추한 여자는 언제나 자신의 추한 면을 감추려고, 늘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한다. 어떻게든 못생긴 면을 가리고,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반대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여인은 걱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식하지 않는 아름다움만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의식하는 순간 추해진다.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낄 때,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그래서 그들이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느낄 때, 그대는 무엇을 하는가? 에고가 상처 입는다. 그대는 열등한 것이다. 그대는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게 된다.
어떻게 속이는가?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정신병자가 되는 길이다. 그대는 자신이 알렉산더라고, 히틀러라고 선언할 수 있다. 그럼년 쉽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그것에 의해 고통받지 않으니까. 전세계의 정신병원에 가보라. 그곳에서 그대는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들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길은 정치인이 되는 길이다. 정신병자가 되거나 정치인이 되라. 정치를 통해서는 갑자기 선언할 수가 없다. 다만 서서히 자신이 진짜 수상이거나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멀리 우회해서 가는 길이다. 미치는 일은 중요한 인물이 되는 지름길이고, 정치는 우회로다. 그러나 둘 다 같은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세계가 온전하고 정상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이 두 유형의 사람들, 미친 사람들과 정치인들이 다 치료되어야 한다. 둘 다 병들어있긴 마찬가지다. 한 사람은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한 것이고, 한 사람은 지름길을 택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을 기억하라. 미친 사람이 정치인보다는 덜 해롭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증명하려고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인은 그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그 증명의 대가는 매우 크다. 히틀러는 무엇을 증명하려고 했는가? 그것은 그가 가장 우월한, 지고의 아리안 족이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정신병자가 되었고 지름길을 택했다면 세상은 훨씬 더 좋아졌을 것이다. 그러면 2차 세계 대전은 없었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더욱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증거를 갖고 있는 정신병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 있는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고, 목표에 도달하고, 그것을 성취시키는 정신병자들이다.
열등하다고 느낄 때마다 인간은 자기가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단순히 그것을 믿도록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야 한다.
성 프란치스코나 장자의 미치광이 짓은 진정한 우월함으로부터, 가슴속으로부터, 그 고유한 본성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다른 미치광이들은 에고가 원인이다. 영혼은 언제나 우월하며, 에고는 언제나 열등하다.
이기주의자는 무슨 수를 써서든 정치인이 될 것이다. 그들이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그 직업을 통해 그들은 정치인이 될 것이다. 정치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에고 간의 싸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다. 나의 에고와 그대의 에고가 싸움을 하게 되면
그때 우리는 정치인이 된다. 내가 누구의 에고와도 싸우지 않을 때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다. 내가 우월해지려고 애쓰지 않을 때 나는 진정으로 우월하다. 그러나 이 우월함은 열등함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열등하다는 느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월함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기억하라. 하나는, 열등감을 숨기고 뒤로 감추는 것, 가면을 쓰는 것이다. 그 가면 뒤에는 열등감이 있다. 그 우월감은 표면적일 뿐, 깊이 들어가면 열등한 채로 남아 있다. 그리고 계속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 우월감과 아름다움의 가면을 언제나 갖고 다녀야 한다. 자신이 추하다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에 아름다워지는 것을 연구해야 한다. 거짓 얼굴을 전시하고 보여 줘야 한다. 이것이 우월감의 한 형태다. 그것은 진실하지 않다.
우월함의 다른 종류가 있다. 이 우월함은 열등감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열등감의 부재다.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비교하지 않을 때, 그때 어떻게 열등할 수 있는가? 비교할 만한 아무도 없다면, 그대가 지상에서 유일한 사람이라면, 과연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낄 것인가? 그때 그대는 열등할 수 없다. 그대 위에 아무도 없으므로,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말한다. 이것이 곧 영혼의 우월함이다. 그것은 결코 비교하지 않는다. 비교하라. 그러면 열등감이 생겨난다. 비교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단순히 존재할 뿐이다. 본래의 고유함을 지니고 존재할 뿐이다.
종교적인 사람은 그 열등감이 사라졌다는 의미에서의 우월함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사람은 그 열등감을 감춘다는 의미에서의 우월감이다. 그 반대가 여전히 내부에 숨겨져 있다. 그는 다만 우월한 사람의 복장과, 얼굴과, 가면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비교할 때 그대는 과녁에서 빗나간다. 그대는 늘 다른 사람을 지켜볼 것이다. 어떤 두 사람도 똑같을 수가 없다. 모든 개인은 고유하고, 저마다 우월하다. 그러나 이 우월성은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우월하다. 왜냐하면 그대는 다른 무엇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월성이 그대의 본성이다.
저 나무가 우월하고 저 바위 또한 우월하다. 모든 존재가 신성하다. 이곳에서 무엇이 열등할 수 있겠는가? 그것들은 신이다. 수백만가지로 넘쳐나는 신이다. 어떤 곳에서 신은 나무가 되었고, 돌이 되었다. 어느 곳에서는 새가 되었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바로 그대가 되었다. 오직 신만이 존재한다. 그곳에 비교는 있을 수 없다.
신은 우월하다. 그러나 무엇에 비교해서 우월하지는 않다. 신만이 유일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곳에 열등함은 있을 수 없다. 종교적인 사람은 자신의 고유함을 경험한다. 자신의 신성을 경험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성에 대한 경험을 통해 다른 모든 것의 신성을 경험한다. 이것은 비정치적이다. 어떤 야심도, 자신을 증명해야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미 선언되었다. 그대의 존재 자체가 그 증거다. 그대는 존재한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 근본 법칙을 기억하라. 그대가 종교 안에서 계속 비교를 한다면 그대는 곧 정치 속에 있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종교 속에 있지 않다. 이것이 곧 왜 세상의 종교들이 정치적으로 되는가 하는 이유다. 그들은 종교 용어를 쓴다. 그러나 뒤에 감춰진 것은 정치다. 무엇이 회교인가? 무엇이 힌두교이고, 무엇이 기독교인가? 그들은 모두 종교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하는 정치 집단, 정치 조직이다. 기도하러 사원에 갈 때 그대는 단지 기도하는가, 또는 비교하는가? 그곳에 다른 사람이 기도하고 있으면 마음속에 비교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가? 그가 그대보다 더 잘하고 있는지, 또는 그대가 잘하고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는가? 그때 사원은 더 이상 없다.
사원은 사라졌다. 그것은 정치가 되었다. 진정한 종교 안에서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대는 단순히 기도할 뿐이다. 그리고 기도는 그대의 내적 존재가 된다. 그것은 비교될 수 있는 외적인 무엇이 아니다. 비교할 수 없는 기도, 비교할 수 없는 명상은 모든 존재가 가진 고유한 우월함으로 그대 자신을 이끌어 갈 것이다.
붓다는 말한다. 욕망을 갖지 말라. 왜냐하면 욕망을 통해서는 언제나 열등한 채로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야망과 야심을 버리라. 그래서 그대 고유의 우월성을 되찾으라.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증명하거나 성취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이미 그것을 소유하고 있고, 그것을 타고났다. 그것은 이미 그곳에 있다. 그것은 늘 그대와 함께 있으며, 언제나 그대와 함께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대 존재가 바로 우월함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고유성을 찾는데, 그 자신이 다른 이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찾고 증명하는데 그토록 많은 노력이 드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일단 그것을 알기만 하면 그때 더 이상 문제가 없다.
그대는 이미 우월하다. 그리고 우월한 것은 그대뿐만이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이 우월하다. 모든 존재가 우월하다. 왜냐하면 신은 하나이고, 존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더 이상 열등한 것도, 우월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금세기 초에 인도의 한 탁발승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의 이름은 람티르쓰였다. 그는 자신을 황제라고 부르곤 했다. 그래서 미국의 대통령이 그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그를 보고는 놀랐다. 그는 다만 걸인에 불과할 뿐이었다. 대통령이 물었다.
"난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은 왜 자신을 황제라고 칭하는가? 당신은 걸인처럼 보인다. 당신은 <황제 람의 다섯 가지 계명>이라는 책까지 썼다. 왜인가?"
람티르쓰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의 내면을 보라. 나의 왕국은 내면 세계에 속해 있다. 나를 들여다보라. 난 황제다. 나의 왕국은 이 세상이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되었다. 그는 언제나 왕국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늘 말했다. 나는 왕이라고. 그는 오해를 받았다.
그는 이 세상의 왕국이 아닌 다른 종류의 왕국을 말한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병사들은 그를 놀렸다. 그에게 돌과 신발을 던지면서 그를 조롱했다. 유태인의 왕이라는 팻말과 함께, 그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워 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자, 이제 우리에게 그대의 왕국에 대해 말하라. 무엇인가 말해보라. 그대 유태인의 왕이여."
그는 다른 어떤 왕국, 현세의 것이 아닌 왕국을 이야기했다. 그 왕국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왕국은 내적인 것이었다. 예수와 같은 사람이 걸어갈 때는 그는 언제나 황제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가는 곳마다 야심적인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정치인들은 두려워한다. 이 자는 위험하다고. 왜냐하면 그의 얼굴, 눈, 그의 걸어가는 모습이 곧 그가 황제라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는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의 존재가 곧 그 증거다. 그는 드러낼 필요가 없다. 말로 할 필요가 없다.
비밀 경찰을 통해 장자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수상은 장자가 자신을 밀어내기 위해 수도로 들어오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오는가? 사람들은 오직 그런 이유 때문에 수도로 온다. 다른 어떤 것을 위해 델리(인도의 수도)로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언제나 욕망 때문에, 에고를 구하고 신분을 획득하기 위해 수도로 온다. 장자는 왜 오고 있는가? 탁발승, 한 사람의 걸인이? 그에게 있어 수도로 올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는 수상 자리를 쟁탈하기 위해 오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는 왕에게 이렇게 말하러 오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내가 적임자다. 나에게 수상직을 달라. 그럼 내가 모든 잘못을 시정할 것이다. 모든 시행착오를 바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주위에 빛을 갖고 있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권위를 갖고 있다. 수상은 언제나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깊은 내면, 그곳엔 열등 의식이 있었다. 마치 질병과 같이. 심장을 갉아먹는 벌레와 같이. 언제나 우월한 이들을 두려워하면서.
정치인은 다르게는 생각할 수가 없다. 첫 번째로 이해해야 할 것은 자신의 모습대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대의 욕망, 그대가 가진 욕망이 그 기준이다.
그대가 부를 추구한다면 그대른 다른 이들도 부를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도둑은 자신의 주머니를 조심한다. 그것이 곧 그가 도독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대 안의 욕망이 곧 그대가 세상을 이해하는 언어다. 정치가는 언제나 음모와 계략의 관점에서만 생각한다. '누군가 나를 축출하려 하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제거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그들이 해온 일, 그들이 전생애를 통해 해온 일이고 음모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모략꾼이다. 그것이 곧 그들의 언어다.
그대는 자신의 마음을 통해 다른 이들을 본다. 내부에 은밀히 감추어져 있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투영한다. 혜자는 생각했다. 장자가 나를 축출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장자는 어떤 신분도 갖지 않았고, 얼굴도 없었다. 매 순간마다 그는 흐름이고. 강물이다. 매 순간마다 그는 존재를 반영하고, 반응한다. 그는 고정된 거처가 없다. 집도 없고, 얼굴도 없다. 이름이 없다. 그는 과거가 아니다. 늘 현재다. 그리고 모든 사진은 과거에 속한 것이다.
이것은 아름답고 의미 있는 비유다. 비록 터무니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붓다 같은 이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대가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찍히는 순간, 붓다는 움직여 간다. 사진은 언제나 과거의 것이며, 현재의 것일 수가 없다. 붓다의 현재 얼굴은 찍을 수가 없다. 찍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로 흘러가 버린다. 붙잡는 순간, 그것은 이미 가 버린다. 붓다의 이름 중 하나는 타다가타(여래)이다. 이 이름은 진정 아름답다. 그 의미는 이렇다. '마치 바람과도 같이 그는 오고, 그는 간다. 그렇게 바람처럼 왔다가 간다.' 그대는 바람을, 산들바람을 사진 찍을 수 없다. 그것은 붙잡기도 전에, 그것은 이미 가 버린다. 더 이상 그것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장자는 발견될 수 없었다. 경찰은 그의 과거를 찾고 있었지만, 그는 현재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이 아니고, 존재다. 생각은 잡힐 수 있다. 그러나 존재는 붙잡을 수 없다. 생각은 아주 쉽게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대들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모두 사로잡혀 있다.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남자가 그대를 사로잡을 것이다. 고급 비누가, 보석이, 지위가, 그 어떤 것이든 그대를 사로잡을 것이다. 그곳에는 그물이, 수백만의 그물이 있다.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그대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언제까지나 그 그물에 걸릴 것이다.
마음은 언제나 속박되어 있다. 그것은 이미 잡혀 있다. 그 마음을 떨쳐 버릴 때 경찰은 그대를 잡을 수 없다.
장자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마음이 없는 걸인, 또는 황제였다. 그것은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잡힐 수가 없다.
여기 시간이 존재한다. 시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변한다. 그리고 영원이 있다. 영원 속에서는 마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지금 곧 그대 내면으로 들어가 보라. 그곳에 영원이 존재한다. 시간을 초월한 것이 존재한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늙지 않는다. 불사조, 남쪽나라, 인도, 영원히 그곳에 있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늙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움직임 없이 존재한다. 그 남쪽 나라는 그대 안에 있다.
장자는 말하고 있다. '나는 한 마리 불사조이고, 그대는 이미 죽은 쥐를 뜯어먹고 있는 부엉이다. 그대는 내가 그대를 밀어내기 위해 오고 있다고 놀란다. 그러나 그대의 지위와 권력은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죽은 쥐에 불과하다. 그것은 나의 먹이가 아니다. 야망은 삶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으로 가고 있는 자들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야망의 정체를 보았다. 그리고 그것의 쓸데없음을 보았다.'
붓다의 말을, 예수의 말을, 또는 조르아스터의 말을 들어 보라. 그대는 늘 들어 왔다. 욕망을 버려라. 그러면 축복이 너의 것이 되리라고.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버릴 수가 없다. 욕망을 버렸을 때 어떻게 환희가 자신의 것이 되는지 그대는 이해할 수 없다. 오직 욕망만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순수하고 정결한 샘물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고결한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욕망을 통해서만 봐 왔기 때문에 그 열매와 나무를 볼 수가 없다. 눈이 욕망으로 가득 찼을 때, 그 눈은 죽은 쥐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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