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만일 어떤 이가 시장에서 낯선 사람의 발을 밟으면 공손하게 사과를 하고 설명을 덧붙인다. '이곳이 너무 혼잡하군요.'
만일 형이 동생의 발을 밟으면 형은 간단히 '미안하다' 고 말할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만일 부모가 자식의 발을 밟으면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다.
가장 훌륭한 예의는 모든 형식으로부터 자유롭다.
완전한 행위는 관계로부터 자유롭다.
완전한 지혜는 계획함이 없다.
완전한 사랑은 증명함이 없다.
완전한 진실성은 보증함이 없다.
원문 이해
위대한 모든 것, 아름다운 모든 것,
진실하고 참된 모든 것은 언제나 자연발생적이다. 계획적으로는 그것들을 할 수 없다. 계획을 짜는 순간, 그때 모든 것은 가짜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그렇게 해왔다. 그대의 사랑, 진실성, 진리,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그대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행해 왔기 때문이다. 자연발생적으로 하면 안 된다고 배워 왔기 때문이다. 계산하고, 통제하고, 자신을 잘 관리하라고 절대적으로 자연적인 흐름에 따라서는 안 된다고 그대는 배웠다. 그리하여 굳어지고, 얼어붙고, 죽어버렸다.
삶은 계획을 모른다. 삶은 삶 자체로 충분하다. 나무가 어떻게 자라고, 성장하고, 어떻게 꽃피울 것인가를 계획하는가? 나무는 그냥 자랄 뿐이다. 그 자라남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거기 스스로를 의심함이 없다. 나무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 때, 그대는 자신을 나누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둘이 된다. 통제하는 하나와, 통제당하는 다른 하나로, 그때 갈등이 일어나고, 결코 평화로울 수 없다. 자신을 통제하는 데 성공할지는 모르지만, 그곳에 평화는 없을 것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결국 그대는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이 철저히 실패했음을, 실패도 실패로 끝나고, 성공도 실패가 될 것이다.
무엇을 하든, 그대의 삶은 불행해질 것이다. 분리는 추함을 만들어낸다. 그대는 하나가 아닌 것이다. 아름다움은 하나인 것에 속한다. 아름다움은 조화로운 전체에 속한다. 모든 문화, 문명, 모든 사회가 그대를 추하게 만든다. 모든 도덕이 그대를 추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분리 위에, 통제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사치다. '그것은 필요가 아니다. 어떤 나무도 반드시 꽃을 피울 필요는 없다. 뿌리만으로도 충분하다. 꽃을 피우는 것은 사실 사치스런 일이다. 꽃이 피어남은 오직 나무가 가진 것이 너무 많을 때만 일어난다. 그것에게는 줄 필요가, 나눠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대가 넘치도록 많이 가졌을 때, 삶은 춤이 되고 축제가 된다. 그러나 사회는 춤과 축제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회는 그대가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갖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그대는 오로지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아갈 수 있다. 넘쳐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일단 넘쳐나면, 사회는 그대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대를 통제하길 원한다. 그것은 교묘한 지배다.
모든 아이들은 넘쳐나는 에너지를 갖고 태어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에너지의 원천을 잘라 내야만 한다. 아이의 여기저기를 가지쳐야만 한다. 아이를 통제하기 위해서다. 모든 통제의 기본은 아이의 내면을 둘로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아이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이 스스로 자신의 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아이에게 주입시킨다. 이렇게 하는 건 잘못이고, 저렇게 해선 안 된다고. 갑자기 아이는 둘로 나누어진다. 이제 아이는 무엇이 잘못인가를 안다. 자기 존재의 어떤 부분이 잘못인가를 알기 때문에 머리가 그 부분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분리를 통해 머리가 지배자, 주인이 된다. 분리되어 있지 않으면 그대는 머리를 갖지 않게 될 것이다. 머리가 없어지거나 바닥에 떨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머리에 의존하는 사람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대 전 존재가 그대 자신이 될 것이다.
오직 그대가 춤출때, 환희에 젖어 있을 때, 비난하지 않을 때, 그대가 흘러넘칠 때, 아무도 곁에 앉아 통제하지 않고 아무도 관리하지 않을 때, 그때 비로소 삶은 하나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된다. 그 삶은 형식적이지 않다. 그 삶은 더없이 자연스럽다. 그때 그대는 들어간다. 그때 어디에나 문이 있다.
그대는 어느 곳에서나 신의 사원에 들어갈 수 있다.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도의 기본 원리 중 하나는, 자연스럽게 된다면 그것이 최상의 기도라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신을 잃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신에에 가 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신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언어는 부적절한 것이다. 그것은 필요가 없다. 장자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그대 안의 전체성을 드러낼 것인가에 대해서만 말했다. 전체로 될 때 그대는 성스러워진다. 그대의 조각들이 하나로 녹아들 때, 그때 삶은 기도가 된다. 노자와 장자는 결코 기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삶, 하나의 전체로서 사는 삶......., 전체로서 살기를 바란다면 그대는 계획할 수 없다. 누가 계획을 할 것인가? 그대는 내일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속에서만 살 수 있다.
사과는 그곳에 관계가 없기 때문에, 상대방이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하다. 사랑이 있다면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그때 상대방은 설명 없이도 이해할 것이다. 사랑이 있으면 굳이 사과할 필요가 없다. 상대방은 이해할 테니까. 사랑은 언제나 이해한다. 사랑보다 높은 도덕률은 없다. 사랑보다 높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사랑은 최고의 법률이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그것을 대신할 것이 필요하다. 시장에서 낯선 이의 발을 밟으면 사과할 필요가 있다.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완전함들은 한 가지 사실이 필요하다. 자연스런 깨어 있음이 그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가짜 동전을 가질 것이다. 언제나 가짜 얼굴을 할 것이다. 그대는 진실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 진실성은 다만 형식적인 것이다.
그대는 사랑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데일 카네기가 <친구를 이기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법> 이란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그런 형태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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