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궁수가 재미로 활을 쏠 때는 그의 온 기술을 다해서 쏜다. 만일 그가 청동으로 된 상패를 얻기 위해 쏜다면 그는 어느 새 신경이 예민해진다.

만일 그가 금상을 받기 위해 활을 쏜다면 그는 눈이 멀게 된다. 아니면 두 개의 과녁을 본다. 그는 그의 마음에서 이미 빗나가 있다.

그의 기술은 변함이 없으나 상이 그를 분열시킨다. 그는 근심한다. 그는 활쏘는 일보다 이기는 일을 더 많이 생각한다. 이겨야 한다는 마음이 그의 힘을 더 고갈시켜 버린다.

 

원문 이해

 

마음이 꿈으로 가득 차 있으면 올바로 볼 수 없다. 마음이 욕망으로 가득 차 있으면 올바로 느낄 수 없다. 욕망과 꿈과 희망, 미래가 그대를 혼란시키고 분열시킨다. 무엇이든 그것이 있는 자리는 지금 이 순간 속이다. 욕망은 그대를 미래로 인도하지만,         

삶은 지금 이곳에 있다. 실체는 지금 여기에 있지만, 꿈은 그대를 미래로 인도한다. 그래서 그대는 지금 이 순간 속에 없다. 바라보지만 여전히 보지 못하고, 듣지만 여전히 놓치고 있다. 그대는 느낀다. 그러나 그 느낌은 희미하다. 그 느낌은 깊이가 없고, 꿰뚫지 못한다. 그리하여 실체는 언제나 손에서 빠져 나간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묻는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신과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여기에 있다. 다른 어떤 곳에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대가 있는 이 자리에 있다. 그러나 그대는 이곳에 없다. 그대의 마음은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다. 그대의 눈은 꿈으로 빛나고 마음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대는 미래로 옮겨간다. 하지만 미래는 단지 환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는 그대는 과거로 옮겨간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죽었다. 과거는 이제 더 이상 없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둘 사이에 현재가 있다. 그 순간은 매우 짧다. 마치 원자와 같다. 그대는 그것을 나눌 수 없다. 그것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간다. 욕망이 들어오는 순간, 그대는 그것을 놓쳐 버린다. 꿈이 그곳에 있는 한, 그것을 놓쳐 버린다.               

진정한 종교는 그대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속으로 데려오기 위한 것이다. 그대가 언제나 함께 있어 온 전체 속으로 데려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머리가 아주 멀리 가버렸다. 그 머리를 제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신을 다른 곳에서 찾아선 안된다. 다른 곳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그대는 계속해서 놓치고 있는 것이다. 신은 언제나 이곳에서 그대를 기다려 왔다.

그대는 자신의 집 문을 두드리면서 그대의 집이 어디냐고 묻고 있다. 실제로 그대는 자신이 누구냐고 묻는다. 이곳이 집이다. 그대는 이곳을 떠난 적이 없다.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곳은 그대가 떠날 수 있고 가버릴 수 있는 외부의 무엇이 아니다. 이곳은 그대 내부의 것, 바로 그대 존재 그 자체다.

신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다. 신은 잃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의 내부, 그대의 가장 깊숙한 존재, 그대의 본질이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이며, 그대는 그의 안에서 호흡하고 그의 안에서 산다. 다만 그대가 매우 취해 있어서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대가 돌아오지 않는한,         

정신이 깨어나지 않는 한, 그대는 계속 찾고 탐문할 것이며, 계속 과녁에서 빗나갈 것이다.

도, 선, 요가, 수피즘, 하시디즘 이것들은 그대를 돌아오게 하기 위한, 그대를 술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한 방법들이다. 왜 그대는 그토록 취했는가? 무엇이 취하게 만드는가? 왜 그대의 눈은 그토록 졸린가? 왜 깨어 있지 못하는가? 그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의 욕망에 있다.

욕망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욕망은 술과 같다. 욕망은 가장 강력한 마약이다. 마리화나와 아편은 아무것도 아니다. 욕망은 가장 약효가 가장 강한 마약, 마약 중에서 최고의 마약이다.

욕망의 본질은 무엇인가? 욕망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때 마음속에 환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바랄 때, 그대는 이미 이곳을 떠나 있다. 이제 그대는 지금 여기에 없다. 이곳에는 부재한다. 마음이 꿈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재가 곧 술에 취함이다.

현재에 있으라. 바로 이 순간 천국의 문이 열린다. 두드릴 필요조차 없다. 그대는 천국으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깨어 있으라. 욕망이 사라진 눈으로 주위를 보라. 그러면 그대는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자신이 여태껏 행해 온 일들에 대해, 그 우스꽝스러움에 대해 웃음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밤새 꿈을 꾼 것과 같다.

그대는 하나의 공간을 만든다. 욕망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욕망이 클수록 공간은 더 많이 만들어진다. 한 개의 욕망이 한 해 동안에 채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일 년이라는 공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그 속으로 옮겨갈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 수많은 파충류들과 용들을 만나야 할 것이다.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이 공간을 그대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욕망이 없으면 시간도 없다. 단 한 순간이 존재할 뿐이다. 두 순간도 아니다. 두 번째는 오직 욕망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존재는 단 한 순간에도 완전히 충족되고, 전체가 된다. 이것을 기억하라. 시간이 외부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시간은 바깥에 있는 무엇이 아니다.

만일 인간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시간이 존재할까? 나무는 자라고, 강은 흐를 것이며,                

구름은 하늘을 조용히 떠다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그곳에 과연 시간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곳에는 순간들이, 아니 오히려 한 순간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순간이 사라지면 다른 순간이 나타나고, 계속 그렇게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더 이상 시간 같은 건 없다. 오직 원자 같은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무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무는 꽃피우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꽃들은 자동적으로 피어날 뿐이며, 꽃들이 피어나는 것은 나무가 가진 본성의 한 부분이다. 나무는 꿈꾸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고 욕망하지 않는다. 인간이 없다면 그곳에는 시간도 없고 오로지 영원한 순간들만이 있을 것이다. 시간은 욕망에 의해 창조된다. 욕망이 클수록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 물질적 욕망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인생은 단 한 번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모크샤, 절대적 자유를 갈망해 왔다. 그것은 가장 큰 욕망이다. 다른 어떤 욕망도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떻게 그대가 한 생에서 절대적 자유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한 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궁전을 얻을 수도 있고 왕국을 건설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유하고 강한 자가 될 수도 있고, 이 세상에서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절대적인 자유는 너무나 큰 욕망이어서 한 생으로는 부족하다.

시간이 왜 필요한가? 시간 없이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순 없을까? 이 순간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내 곁에 앉아서,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찰나와도 같고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은 이 순간에 그냥 존재할 수는 없을까? 그것을 붙잡는다면, 그것은 이미 과거다. 그대가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미래 속에 있다. 그대는 그 속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붙잡을 수는 없다. 그것을 붙잡을 때 그것은 가버린다. 그것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은 없다.

오직 한 가지만이 가능하다. 그대는 그것을 살아갈 수가 있다. 그것이 전부다. 그것은 너무 작아서 그대가 그 속에서 사는 것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중요해서 그대에게 삶을 준다.

기억하라. 그것은 작은 원자와 같다.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것, 아무도, 과학자조차도 아직 그것을 보지 못했다. 다만 그것의 결과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원자를 폭파시킬 수가 있었다. 히로시마나 나가사키가 그 결과였다.   

 천만 명이 죽었다. 이것이 그 결과다. 그러나 아무도 원자를 본 적이 없다. 아무도 자기 눈으로 원자를 확인하지 못했다. 아직 그것을 볼 수 있는 기구는 없다.

시간은 원자와 같다. 이 순간 역시 원자적이다.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다. 그대가 그것을 보는 순간, 그것은 이미 가버리기 때문이다. 보여지는 순간 그것은 가버린다. 강물은 흘러가 버리고 화살은 날아갔다. 아무도 시간을 본 적이 없다. 그대는 계속 시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정의하라면 어쩔 줄 몰라 한다.

시간을 정의할 수 있는가?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바라보는 순간 그것은 가버린다. 생각하면 그것은 아직 그곳에 없고, 바라보면 그것은 가버린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때, 바라보지 않을 때, 그대가 다만 존재할 때, 그것은 그곳에 있다. 그대는 다만 그 순간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신은 살 수 있지만, 볼 수는 없다. 시간 역시 그 순간을 살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다. 시간은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적이다. 신 역시 철학적이지 않다. 신은 존재적이다. 사람들은 신을 살았다. 그러나 정의 내려 보라고 고집하면 그들은 침묵할 것이며 대답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으면 그곳에 모든 신비의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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