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줄 모르게 핀 홍매화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아침이다. 그 색과 모습이 꼭 새악시 같다. 흰매화는 어둠이 완전히 가지 않은 새벽에도 눈에 잘 띄지만 홍매화는 그냥 지나치기 쉽다. 가까이 가서 보니 며칠 전부터 피고 있었던 것 같다. 순식간에 저렇게 많은 수의 꽃을 피우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깨어있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하고 어딘가 멀리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깨어있기가 쉽지 않고,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이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봄이 오면 이산 저산에는 딱다구리 나무 뚫는 소리로 요란하다. '따르르륵' 하기도 하고, '또르르륵' 하기도 하며, "뚜르르륵' 하기도 한다. 그렇게 들릴 뿐이다. 그 소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길이 없다. 다만 내 귀에는 그렇게 들린다. 겨울내내 새벽 산책길에서 유일하게 나를 반겨주던 딱새는 지금 짝을 부르느라 바쁘다. 평소에는 꼬리를 위 아래로 흔들면서 딱딱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 맘때가 되면 제비와 매우 닮은 소리를 내면서 짝을 부른다. 이것도 내가 그동안 몇 년 동안 산책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내가 사는 오두막 담벼락에 서 있는 전봇대에는 까치 부부가 집짓기에 바쁘다. 깍깍 거리면서 나뭇가지를 물어다 얼기설기 집을 짓는다. 많고 많은 나무를 두고 왜 전봇대에 집을 짓는지 안타깝다. 왜냐하면 집이 곧 뜯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전에서 보면 그냥 두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훠이훠이 쫓아내 보지만 그 집착을 쉽게 접지 않는다. 뭐 어쩌겠는가? 다 자연이 하는 일을.
요즘 아이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아이들 개개인의 삶은 없는 것 같다. 오로지 부모와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강요 받기 때문이다. 학교 교실 안에도, 학원 강당 안에도, 길거리에도 아이들의 웃음은 없다. 좋아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삶을 살아야하는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질 뿐이다. 어떤 아이들은 부모와 사회의 강요에 못이겨 죽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부모들은 깨달아야 한다. 아이들은 소유물이 아니다. 물건이 아니다. '내 것' 이 아니다. 아이는 또 다른 하나의 존재이다. 어떤 누구나 아이들의 삶을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없다. 아이는 아이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다만 아이가 자신의 삶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잠재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도 구속해서는 안 된다. '내 자식' 이라는 소유의 개념을 버려야 한다.
아이가 즐겁고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허용해야 한다. 그 일이 무슨 일인가는 상관없다. 그림 그리는 일이든, 시를 짓는 일이든, 청소를 하는 일이든, 게임을 하는 일이든, 농일을 하는 일이든 즐거워 하고 사랑하면 된다. 그것이 아이가 행복하게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 또한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 우주계(존재계, 자연계)는 항상 변한다. 조금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계절이 그렇고, 하늘이 그렇고, 산이 그렇고, 구름이 그렇고, 강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미움이 그렇고, 행복이 그렇고, 불행이 그렇고, 부가 그렇고, 가난이 그렇고, 권력이 그렇고, 만물이 변한다. 사람 또한 변한다.
어느 아이가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때리고 괴롭혔다. 혈기 왕성한 시기라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대부분 달라진다. 한 때의 잘못을 뉘우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한 때의 잘못이 평생의 잘못으로 낙인 찍어서는 안 된다. 그 잘못을 뉘우친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두구 예수는 부활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붓다는 이런 교훈을 남겼다.
한 번은 붓다가 길을 가는데 어떤 한 남자가 다가와 붓다의 얼굴에 침을 뱉고 달아났다. 그 남자는 집에 돌아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뉘우쳤다. 다음 날 그 남자는 붓다의 발 아래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어제 침을 뱉은 사람은 지금 여기에 없다. 그리고 나 역시 어제의 나가 아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모든 만물이 변한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제와 똑 같아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하룻밤 새에 붓다가 되지 않았다고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고정된 시각, 고정된 관념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시로 변한다. 순간 순간을 후회하고 뉘우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중요한 것은 다시는 똑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진실로 뉘우치면 그것이 바로 새로운 탄생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 아닐까?
지금부터는 친구를 대할 때나, 이웃을 대할 때나, 자식을 대할 때나, 부모를 대할 때나, 아내를 대할 때나, 남편을 대할 때나 늘 과거의 고정된 시각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 만물은 늘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 또한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가 그 기준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지금 여기, 현재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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