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매화가 피고 있다. 날씨는 추웠다 따뜻했다를 반복하지만 매화는 제 갈 길을 멈추지 않는다. 매화는 우주계(존재계, 자연계)의 흐름에 따를 뿐이다. 동장군과 춘장군이 싸우든 말든 반드시 봄은 올 것이라는 신뢰를 갖고 있다. 매화는 우주계(존재계, 자연계)의 계획에 의문을 제기 하거나 반항하지 않는다. 꽃을 피우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할 필요가 없다. 우주계(존재계, 자연계)가 꽃을 피우는 것이지 자신이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만물은 우주계(존재계, 자연계)와 하나되어 존재한다. 오직 인간만이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저 산에 있는 나무는 우주계(존재계, 자연계)의 계획(흐름)에 따른다. 저 산에서 지저귀는 새들 또한 마찬가지다. 호수도, 강도, 바다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주계(존재계, 자연계)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우주계(존재계, 자연계)를 두려워하고 존경한다. 우주계(존재계, 자연계)의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에 침묵한다. 그 어떤 말이나 글로써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만 우주계(존재계, 자연계)를 우습게 보고 있다. 시시하고 보잘것 없는 지식이 모두 다인양 거들먹거린다. 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인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시점에서 보면 결코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은 인간의 오만함과 거만함의 결과물임이 드러나고 있다. 지금도 그래왔고 앞으로 영원히 과학은 우주계(존재계, 자연계)를 따라갈 수 없다. 하루라도 빨리 겸손하게 우주계(존재계, 자연계)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자세로 돌아와야 한다.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신비스럽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저 작은 몸짓에서 나오는 다양한 소리들을 내 입으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는 휘파람 소리가 전부다. 바람소리 또한 마찬가지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 글이나 말로써 나타낼 수 없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 계곡물 흐르는 소리, 개구리 소리,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흉내 내거나 글이나 말로써 나타낼 수 없다. 이 하나만으로도 우주계(존재계, 자연계)는 얼마나 위대하고 신비스러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우주계(존재계, 자연계)를 알려고 하면 할수록 더 미궁에 빠진다. 너무나 깊고 넓고 커서 현기증이 난다. 알려고 노력하는 자체가 헛수고임을 깨닫는다. 알려고 하는 그 노력을 내려 놓고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우주계(존재계, 자연계)의 진동을 잘 느낄 수 있도록 가만히 있는 수 밖에 없다. 그 이상 더 할 일이 없다.
이 세상을 보면 참으로 웃음을 참을 수 없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뭔가에 홀린 사람 처럼 멍한 사람들이 오고 간다. 뭘 하는지도 모르고 왔다 갔다 한다고 바쁘다. 알량한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고 떠들어대고 있는 소위 전문가들이 판을 친다. 자기자신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 어느 누구 하나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는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의 가장 쓸모있는 도구가 되는지를 교육하는 사람 밖에 없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웃고 울고 떠들어 댄다. 단 한 번이라도 자기 자신과의 만남을 시도해 보지도 않는다. 단 일 분도 눈을 감지 못한다. 단 십 초도 말을 멈추지 않는다. 단 십 초도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혼이 빠진 사람, 얼이 나간 사람, 지금 여기 있지 못한 사람, 눈 뜨고 잠자는 사람. 깨어있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고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돌아와야 한다.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지금 여기로 돌아와야 한다. 지금 여기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침에 출근할 때 제대로 몸을 씻고, 제대로 밥을 먹고, 제대로 옷을 입고, 제대로 신을 신고, 제대로 운전을 해야 한다. 어제 일을 기억하거나 출근 후의 일을 상상한다고 몸을 씻는건지, 밥을 먹는 건지, 옷을 입는 건지, 신을 신는 건지 운전을 하는 건지 모르면 그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몸을 씻을 때는 몸을 씻는 것에만 집중하고,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행위에만 집중하고, 신을 신을 때는 신 신는 것에 집중하고, 운전할 때는 운전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그 순간 순간이 알차고 즐겁고 행복하지 않겠는가? 왜 지금 여기,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이미 지나 갔거나 아직 오지도 않는 것에 삶을 허비하는가? 이 삶을 즐길 수 있는 순간은 오직 지금 여기 밖에 없다.
할 게 없으면 호흡에라도 집중하는 것이 낫다. 들숨에 삶이 있고 날숨에 죽음이 있다. 들숨에 참 삶을 얻고 날숨에 거짓된 삶을 뱉어 낸다. 예수가 말한 부활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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