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벽마다 철새들 소리가 다양하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소리는 확실히 구분이 된다. 어떤 새는 찍찍거리는 것 같고, 어떤 새는 찌~익 소리 같고, 어떤 새는 찌직찌직 하는 것 같고, 어떤 새는 휘~익 하는 것 같고, 어떤 새는 딱딱 거리는 것 같고, 어떤 새는 뿌우뿌우 같은 소리를 낸다. 도무지 그 소리를 말이나 글로 표현할 길이 없다. 이럴 때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우주계(존재계, 자연계)의 신비스러움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우주계는 자비롭다는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어떤 필요나 조건 없이 모든 걸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필요나 조건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서로 뭔가를 필요로 한다. 그 필요를 충족 시키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필요가 채워지면 그 사랑은 식고 만다. 남녀간의 사랑을 잘 관찰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남녀간의 갈등이 없어지려면 자비로워야 한다. 

 

자비는 무조건 주는 것이다. 무엇을 원하거나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나누어 주는 행위다. 붓다, 예수, 마하비라, 크리슈나, 노자, 장자와 같은 선각자들은 인류를 위해 자비를 베푼 사람들이다. 그들은 뭔가 필요해서 우리 곁으로 오지 않았다. 자신들이 깨우친 삶을 아무 조건없이 나누어 주었다. 그 베품은 지금 이 순간도 행해지고 있고 앞으로 영원히 이루어질 것이다. 

 

자비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봐 주는 것이다. 상대를 물건 취급하지 않는다. 상대를 내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난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 사랑도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게 하려고 애쓰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이 오면 오는 것이고, 가면 가는 것으로 받아 들인다. 다만 지나갈 뿐이라는 것을.

 

우리 인간은 원래부터 자비로운 존재다. 왜냐하면 우주계에서 왔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자비로운데 자식이 자비롭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어느 순간 우주계를 무시하고 잊기 시작했다. 인간이 지식을 쌓기 시작하면서부터 우주계와 멀어지게 된 것이다. 인간이 쌓은 지식은 우주계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 지식으로 우주계와 동등해졌다고 아니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졌다. 지금도 그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비를 발견해야 한다. 우리의 내면세계로 들어가면 찾을 수 있다. 그 전에 그동안 쌓아온 모든 지식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우주계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면세계는 곧 우주계이다. 

 

비워야 할 것은 지식 뿐만 아니다. 그 지식으로 인해 습관이 된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매 순간 지식은 쌓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실을 아는 순간 바로 버려야 한다. 지식이 쌓이지 않도록 비우고 비워야 한다. 그래야만 우주계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나무가 지식이 있는가? 새가 지식이 있는가? 이 세상에서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지식이 없다. 그래도 새와 나무는 우주계와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우주계를 존경하고 무서워한다. 그리고 우주계의 흐름에 복종한다. 우주계와 대립하여 싸우지 않는다. 그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지식을 버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우주계의 숨결을 느끼고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우주계와 소통하는 법을 너무 많이 잊어 버렸다. 우주계는 계속해서 우리 인간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러나 귀가 멀고 눈이 멀고 가슴이 닫혀서 느끼지 못한다. 얼마 전 터키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 지진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새떼들이 이상한 행동을 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새들은 우주계와 한 몸이기 때문에 변화를 빠르게 감지할 수 있다. 우리 인간도 원시시대에는 대단한 감지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인간도 저 숲에서 지저귀는 새처럼 즐거워야 하지 않겠는가? 매 순간이 즐겁고 춤추는 삶!을 왜 살지 못하는가? 왜 돈 때문에 괴로워야 하는가? 왜 권력을 못잡아서 안달인가? 알고 보면 부질없는 것을! 돈도, 권력도, 명예도 죽을 때 가져갈 수 없다. 죽을 때 가져갈 수 없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살면서 매 순간 즐거움과 춤으로 가득찬 삶은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다. 왜냐하면 죽는 그 순간까지 즐거움과 춤으로 가득찬 자신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지켜본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내면으로 들어가면 본성(참나)을 찾게 된다. 그 본성은 육체도 아니고 이름도 아니고 직업도 아니다. 순진무구 그 자체인 본성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그 본성은 제 삼자의 위치에서 모든 걸 지켜볼 수 있다. 육체도 지켜보고 마음도 지켜보고 생각도 지켜보고 다른 사람도 지켜보고....... 지켜보는 자, 그것이 본성, 참나인 것이다.

이렇게 모든 걸 지켜보다 보면 삶의 마지막에 자신의 육체가 죽는 것도 지켜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붓다는 이처럼 영원히 지켜보는 자를 본성(참나, 의식) 이라고 불렀다. '영원한 죽음도 없다.' 는 붓다의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지켜보는 자는 항상 지금 여기(현재)에만 존재한다. 잠시 과거나 미래로 가기라도 하면 다시 지금 여기, 현재로 돌아온다. 지금 여기(현재)에 있지 못하게 하는 마음이나 생각이 작동하면 그 마음이나 생각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가만히 지켜본다. 다만 지켜볼 뿐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 그 발생 근원을 하나 하나 찾아 마음이나 생각 제 스르로 사라지게 한다. 지켜보는 자는 바로 거울이다. 거울은 그저 비출 뿐이다. 오면 오는 것을 비추고 가면 가는 것을 비출 뿐이다. 그 비춰지는 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지켜보는 자가 바로 붓다고, 예수고, 마하비라고, 크리슈나고, 노자고, 장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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