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이면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그 요란함이 기분 좋게 한다. 하늘은 어제 보다 더 파래지고 바람은 선선하다. 아내가 출근하고 나면 오두막이 정적에 휩싸인다. 말없는 강아지 빈이와 나 뿐이다. 툇마루 장지문을 통해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풀벌레 소리가 정적을 깬다.
요 며칠새 더 주의 깊고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려고 한다. 그래서 아무 것도 나의 비어 있는 공간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나의 비어 있음이 오염되지 않도록, 여기 이 세상에 살면서도 더럽혀지지 않도록, 세상 안에 있을 수는 있지만 세상이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깨어 있으려 한다.
좀 더 많이 보고, 좀 더 많이 듣고, 좀 더 많이 존재할 수 있도록 더욱더 깨어 있으려 한다.
'나'가 사라진 나, 자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나, 아무 것에도 갇히지 않는 나,......., 순수하게 비어 있는 공간, 그 무한함, 한정 없는 비어 있음.....' 의 상태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명상할 때만 비어 있는 상태가 되었다가 끝나자 마자 바로 온갖 생각들로 가득찬다. 직장걱정, 건강걱정, 자식걱정,...., 들로 지금 여기 순수한 상태로 있지 못한다.
'나' 라는 존재는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부처님은 큰 일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고 깨어 있는 것처럼 사소한 일에도 똑같은 주의를 쏟고 깨어 있었다고 한다. 붓다에게는 사소한 일도 없고 큰 일도 없다고 한다. 모든 일이 한 가지라고 한다.
그는 밥그릇을 들 때에도 신을 대하듯이 정중하게 대했다. 가사를 걸치거나 옷을 입을 때에도 그는 매우 주의 깊고 깨어 있다. 그는 전적으로 깨어 있다. 그는 기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옷을 입을 때 기계적으로 입는다. 옷 입는 방법을 기계적으로 터득했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고 깨어 있을 필요가 없다. 내 마음은 계속해서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달음박질 친다. 목욕을 할 때도 무례하게 한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음식을 무례하게 대한다. 그때 나는 그기에 없다. 다만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넣고 있을 뿐이다. 모든 일을 습관적이고 기계적으로 행한다. 그러나 붓다는 일을 할 때 전적으로 거기에 있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
붓다는 매순간 각성된 의식으로 산다. 무슨 일을 하든 관계없다. 무슨 일을 하든 그는 매순간 그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깨어 있다. 어떤 몸짓을 할 때, 그는 그 몸짓 자체가 된다. 미소 지을 때, 그는 전체적으로 미소짓는다. 말할 때, 그는 그 말 자체가 된다. 그리고 침묵할 때에는 완벽하게 침묵한다.
붓다는 어떤 일을 할 때 - 예를 들어, 옷을 입을 때에도 그 행동에 주의를 기울인다. 걸을 때, 그는 걸음에 주의를 쏟는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에는 들숨과 날숨에 주의를 집중하고 깨어 있는다. 그는 언제나 주의 깊다. 심지어 잠자는 동안에도 주의 깊다.
붓다는 호흡도 느리다. 그의 호흡이 느린 것은 그에게 서두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호흡 수련을 쌓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호흡이 느린 것은 그가 아무데로도 가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욕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아침 산책을 즐기듯이 살아간다. 그는 아무데로도 가지 않는다. 그에게는 미래도 없고 걱정도 없다.
나의 불행이 모두 허구라는 것을 안다. 다만 악몽에 있을 뿐이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불행은 실재가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새끼줄을 뱀으로 생각하며 벌벌 떨고 있었다.
우리 인간은 더 존경받는 인물이 되고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어한다. 그것을 자신의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름과 명성은 자신이 아니다. 은행 잔고가 자신이 아니다. 이름도명성도 돈도 죽을 때 가져가지 못한다. 죽을 때 가져가지 못하는 것은 허구다. 실재가 아니다.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실재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서 지켜보는 자이다. 자신의 죽는 그 순간까지 지켜보는 영원한 삶이 실재다.
붓다와 같이 깨달은 이는 두 순간 사이를 산다고 한다. 두 순간 사이에는 틈이 있다. 붓다는 그 틈 안에서 사라진다. 그는 한 단어를 말하고 사라진다. 그 다음에 다른 단어를 말할 때 존재한다. 그러다가 다시 사라진다. 응답하고 그 다음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응답하고 사라진다. 그 간격, 공(空)의 순간이 붓다를 철저히 새롭게 지켜준다. 왜냐하면 죽음만이 완전히 살아있도록 지켜주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대략 70년을 살다가 죽는다. 당연히 70년 동안의 쓰레기가 쌓일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매순간 죽는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붓다가 어떤 특징을 소유하는 것은 곧 사기꾼이 되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유는 과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아무 특징도 지니지 않는 것이 곧 붓다가 되는 길이다.
호흡처럼 순간마다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들숨과 날숨을 반복한다. 들숨 안에 삶이 있고 날숨 안에 죽음이 있다. 들숨을 쉴 때마다 태어나고 날숨을 쉴 때마다 죽는다. 매순간을 탄생과 죽음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과거의 기억은 '나'라고 하는 관념 즉 에고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나'라고 하는 가짜 실체는 끊임없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존재에는 공포가 없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에고이다. 에고는 죽음에 대해 매우 심한 두려움을 갖기 때문이다. 에고는 인위적이고 임의적인 허구의 실체이다. 에고는 여러 복잡한 요소들의 집합체이다. 그러므로 에고는 어느 순간이라도 산산이 쪼개질 수 있다. 에고는 과거의 기억일 뿐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과거의 기억이 곧 나는 아니다. 나는 기억이 아니라 의식이다. 기억을 지켜보는, 들여다보는 자이다.
매 순간 순간을 죽었다 살아나야 과거가 쌓이지 않고 미래가 생기지 않는다.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에는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자.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호흡에 모든 것을 걸자. 그래야만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생각과 고민들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삶을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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