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비다운 봄비가 내린다. 이맘 때 내리는 비를 약비라 불렀다고 한다. 얼마나 좋으면 약비라고 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온 산천초목이 약비를 먹고 활기에 넘친다. 먼저 온 매화잎은 하나 둘 떨어져 약비 내린 개천물을 따라 흐른다. 하얀 꽃잎배들이 줄지어 떠나는 것 같다. 바람도 잠잠하고 비의 양도 많지 않은 고요한 비 내림이다. 

 

엇그제는 춘분이었다. 

[24절기의 네 번째 절기. 춘분(春分)은 경칩(驚蟄)과 청명(淸明)의 중간에 드는 절기로 양력 3월 21일 전후, 음력 2월 무렵에 든다. 이날 태양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적도를 통과하는 점, 곧 황도(黃道)와 적도(赤道)가 교차하는 점인 춘분점(春分點)에 이르렀을 때, 태양의 중심이 적도(赤道) 위를 똑바로 비추어, 양(陽)이 정동(正東)에 음(陰)이 정서(正西)에 있으므로 춘분이라 한다. 이날은 음양이 서로 반인만큼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추위와 더위가 같다. 이 절기를 전후하여 농가에서는 봄보리를 갈고 춘경(春耕)을 하며 담도 고치고 들나물을 캐어먹는다.]

 

춘분 날과 그 다음날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가로 삼미터 세로 일미터 정도의 모판을 만들어 오이씨, 호박씨, 봄상추씨, 여름상추씨, 강남콩씨를 심었다. 보름 정도 지나고 나면 싹이 난다. 어느 정도 자라면 밭에 옮겨 심어야 한다. 땅속에서 겨울을 잘 지낸 도라지와 더덕 뿌리는 자리를 옮겨 심었다. 오두막 담 주변에는 목련나무 일곱 그루와 꽃양귀비씨, 과꽃씨, 나팔꽃씨, 접시꽃씨를 심었다. 연꽃씨는 물에 불려 놓았다. 싹이 나면 밭에 옮겨 심고 뿌리가 나오면 다시 물논에 옮겨 심어야 한다. 

 

이렇게 밭일을 하다 보면 무상삼매(無相三昧)에 빠지게 된다. 완전한 침묵 안에서 자연계(우주계, 존재계)와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마음이 사라진 상태가 된다. 그 어떤 사념이나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 시간 만큼은 오로지 자연과 하나가 된다. 그 일이 끝나는 순간 다시 마음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 마음이라는 것은 참 대단하다. '마음' 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수많은 생을 통해 쌓아 올린 욕망의 집합체' 라고 한다. 인간이 만들어 낸 욕망의 역사라는 말로 이해된다. 하루에도 수많은 마음들이 오고 가기를 반복한다. 그 마음을 통해 지나간 과거를 여행하기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마음은 늘 미련과 후회를 가져오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허황된 것을 가져온다. 그래서 마음은 덧없음을 가져올 뿐이다. 우리가 인생이 허무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인간은 마음이 본래 자신인양 착각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인생이 무상하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은 실재하지 않은 것, 형태가 없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것은 지금 여기, 현재 밖에 없다. 오직 지금 여기, 현재를 주시하는 자가 바로 본래 자신이다. 

 

마음이 끼어들지 않는, 사념이나 잡념이 나타나지 않는 이 순간을 주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최고의 삶이다. 순간 순간을 자연계(우주계, 존재계)에 감사하고 존경하고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마음을 옆으로 밀어놓고 텅 빈 상태가 되는 것, 자연계(우주계, 존재계)처럼 순수한 상태가 되는 것, 자연계(우주계, 존재계)처럼 그 어떤 질문도 대답도 없는 완전 침묵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봄비가 내린다. 봄비 소리가 좋다. 봄비 내리는 모습이 너무 좋다. 그저 좋다. 그 소리와 그 모습 외에는 아무도 없다. 지금  여기 밖에는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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