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스승께서 이렇게 물으셨다. "수부티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흐름을 이긴 자>에게 '나는 흐름을 이겼다.'는 생각이 일어나겠느냐?"

수부티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스승님이시여. 실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 법(法)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를 <흐름을 이긴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얻은 것도 아니며, 소리도, 향기도, 맛도, 감촉도, 마음의 대상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흐름을 이긴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만약 <흐름을 이긴 자>에게 '나는 흐름을 이겼다.' 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의 안에는 자아에 대한 집착, 존재에 대한 집착, 영혼에 대한 집착, 개아에 대한 집착이 일어날 것입니다."

 

스승께서 물으셨다. "수부티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라한(阿羅漢)에게 '나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했다.' 는 생각이 일어나겠는가?"

수부티가 대답했다.

"스승이시여, 실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이라고 불리는 어떠한 법(法)도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를 아라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여래께서는 저를 두고 <평화 속에 거주하는 자 가운데 으뜸가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승이시여, 저는 욕망을 떠난 아라한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나는 아라한이며 욕망을 떠난 자이다.'라는 생각이 일지 않습니다. 

스승이시여, 만일 제가 '나는 아라한과를 성취했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있다면 여래께서는 저를 두고 '훌륭한 집안의 자손인 수부티는 평화 속에 거주하는 자들 가운데 으뜸이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그를 <평화 속에 거주하는 자>라고 부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원문 이해

 

붓다는 구도자의 네 단계에 대해 말한다. 첫 번째 단계를 그는 <흐름을 이긴 자>라고 부른다. <흐름을 이긴 자>는 깨달음의 마당에 들어선 사람을 뜻한다.

왜 그를 <흐름을 이긴 자>라고 부르는가? 그는 더 이상 기슭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정체되어 있지 않다. 그는 삶의 흐름과 더불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강물과 싸우지 않는다. 강물과 싸우는 데 사용되던 에고, 흐름을 거스르는 데 사용되던 에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터무니없는 말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흐름이 그를 이긴 것이다. 그런데 왜 그를 <흐름을 이긴 자>라고 부르는가? 그는 모든 투쟁을 포기했다. 그는 완전히 내맡기고 굴복했다. 그래서 그는 승리자가 되었다. 이것이 그를 <흐름을 이긴 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참으로 이상한 말이다.

 

 

먼저, 그는 흐름을 이기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세상 사람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이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욕망과 계획에 부합되는 삶을 원한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꿈과 욕망을 삶에 덮어씌운다. 그리고 자기들의 의지대로 삶을 이끌려고 한다. 모든 인간이 흐름을 거슬러 가려고 한다. 세상 사람 모두가 삶과 자연, 신에 대항하여 싸우려 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란 곧 투쟁의 삶이다.

그러나 그대는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그대는 그대 자신의 근원과 싸우는 것이다. 그대는 누구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가? 그대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 싸움은 결국 그대를 더 깊은 절망으로 몰고 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싸움을 통해서는 이길 수 없다. 그것은 이기는 방법이 아니다. 그대는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그대는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존재계는 광막하고 끝이 없다. 그 존재계에 대항해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존재계와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만 이길 수 있다.

대항해서는 이길 수 없다. 오직 동참함으로써 이길 수 있다. 만일 존재계가 그대를 지원한다면 그대는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존재계가 그대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계속 이길 수 있다고 믿을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패배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곧 그대는 지치고 절망할 것이다.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싸움을 포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감으로 인한 포기이다. 그 패배감 안에는 아무 기쁨도 없다. 어떻게 패배가 즐거울 수 있겠는가?

삶을 이해하는 사람은 안다. 패배가 닥치기 전에 완전히 내 맡기고 항복하면 기쁨이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이 삶이란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러니 붓다가 역설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달리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삶 자체가 역설적인 것을. 모든 것을 내던지고 완전히 항복한 사람들은 자신이 승리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싸우는 사람들은 어느 날엔가 싸움에 모든 에너지를 소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승리의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존재계에 완전히 내맡기고 항복하는 것을 붓다는 <흐름을 이긴 자의 열매>라고 부른다.   

두 번째 단계는 <한 번 더 돌아오는 자>이며, 세 번째 단계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아르하트(Arhat)>이다.

 

<흐름을 이긴 자>는 세 가지 족쇄를 벗어 버린다.

첫 번째 족쇄는 에고이다. 자기가 남들과 나누어진 개체라는 관념, 분리된 자아로서의 관념이 첫 번째 족쇄이다. 당연히 이것이 모든 싸움의 근본 원인이다.

두 번째는 단순히 교리와 의식(儀式)에 따라 사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인이 있지만 그들은 오로지 교리와 의식에 따라 살아간다. 그들은 종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의식(儀式)이 종교는 아니다. 교리가 종교는 아니다. 종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말한다. 깨어 있는 삶,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삶이 곧 종교이다. 그러나 세상을 보라. 교회, 사원, 모스크, 구르드와라에 나가서 기도하고 이런 저런 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儀式)일 뿐이다. 거기엔 종교가 없다.

세 번째는 의심과 혼란이다. 의심하는 마음은 편히 쉴 수 없다. 의심하는 마음은 모든 것을 내맡기고 복종하지 못한다.

 

의심하는 마음은 결코 전체적일 수가 없다. 어떤 부분은 계속해서 싸우고 어떤 부분은 계속해서 '아니오'라고 말한다. 의심하는 마음은 완벽하게 '예, 그렇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이 <흐름을 이긴 자>가 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다. 삶에 대해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무조건 긍정하는 것, 온 가슴을 다해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흐름을 이긴 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도이다.

만일 그대가 "나는 완전히 내맡겼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아직 내맡긴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대'가 내맡길 수 있겠는가? '그대'를 내맡겨야 한다. 그 '나'를 내맡겨야 한다. 그대는 "나는 완전히 내맡기고 항복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만일 그대가 행위의 주체로 남아있다면 그것은 내맡긴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귀의한 사람은 "나는 귀의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다만 귀의가 저절로 일어났습니다."는 말뿐이다.       

 

'나'가 사라졌을 때, 더 이상 거주자가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평화가 얻어진다. "수부티여, 이제 그대는 평화 속에 거주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수부티여, 이제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무(無)가 붓다의 가름침이 전해주는 맛이다. 더 이상 그대가 존재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오직 텅빈 공간으로 충만한 경지, 그것을 선언하고 자랑할 자가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붓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아(無我)의 경지를 조금이라도 엿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앉아 보라. 그대를 자극하는 만트라도 외우지 말라. 신의 이름도 중얼거리지 말라. 특별한 요가 자세를 취하지도 말라. 생각을 집중하지도 말고 명상하지도 말라. 그냥 방 안에, 또는 나무 곁이나 강가에 고요히 앉아 있으라. 풀밭에 누워 밤 하늘의 별을 쳐다보라. 아니면 눈을 감은 채 그냥 누워 있으라.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하라. 에너지를 다른 데로 보내지 말라. 고요한 연못이 되라. 그러면 순간적으로 어떤 경험이 그대를 향해 밀려오기 시작할 것이다.        

잠깐 동안 그대는 거기에 있으면서도 없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대는 거기 존재한다. 그대는 존재하지 않음과 동시에 난생 처음으로 존재한다. 그때에 그대는 붓다가 왜 그토록 역설적으로 말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오직 존재하지 않을 때에만 존재한다. 모든 것이 부재(不在)할 때 거기에 커다란 현존이 있다. 에고가 완벽하게 사라졌을 때 그대는 우주 전체가 된다. 그대는 존재계 전체이다. 이슬방울로서의 그대가 사라진다. 그대는 바다가 된다. 한편으로 그대는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난생 처음으로 나타났다.

깨달음은 죽음인 동시에 부활이다. 죽음과 부활은 동시에 일어난다. 여기 이 자리에서 죽음이 일어나는 즉시 부활이 뒤따른다. 그러나 그대는 직접 그런 경험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론이나 철학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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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수부티여, 여래는

<깨달은 사람들의 특별한 진리는

깨달은 사람들의 특별한 진리가 아니다.>

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원문 이해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말이다. 깨달은 이들에게 있는 진리는 무엇인가? 붓다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의 특징은 아무 특징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평범하다. 그러므로 만일 우연히 마주친다 해도 그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붓다의 특징이다.

그는 연기자가 아니다. 그는 정치인이 아니며 배우도 아니다. 그는 남에게 드러내보일 에고가 없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중요성을 확인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완전히 부재(不在)한다. 그것이 그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렇게 터무니없는 말이 생기는 것이다.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산다. 이것이 그의 특징이다. 그는 걷지만 그의 안에는 아무도 걷지 않는다. 그는 말하지만 그의 안에는 말하는 자가 없다..... 거기에는 철저한 침묵이 있을 뿐이다. 절대로 깨지지 않는 침묵이 있다.

 

붓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 태도도 갖고 있지 않으며 정의가 불가능하다. 그대가 그를 어떻게 정의를 내리든 간에 그것은 타당한 정의가 아닐 것이다. 붓다는 아무 틀에도 갇히지 않는데 그대의 정의 자체가 그를 틀 안에 가둬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붓다의 기본적인 특성이며 독특한 면이다. 이것이 붓다가 깨달은 진리의 성격이다. 그는 완전히 텅 비어 있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 그것이 붓다의 주된 특성이다. 그러나 없는 것처럼 있는 것을 붓다의 주된 특성으로 말한다면, 사실 그는 아무 특성도 갖고 있지 않은 셈이다.

붓다의 비범함은 그의 철저한 평범함에 있다. 그의 평범함이 곧 비범함이다. 평범해진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범한 일이다.

그는 반드시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즉흥적으로 반응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그냥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붓다의 특성이다. 그는 순간에 충실한 삶을 산다. 이것이 붓다의 진실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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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스승께서 물으셨다.

"수부티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가장 옳고 완벽한 깨달음으로 온전히 알고 있는, 그 어떤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또는 여래가 설한 법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부티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스스의 말씀을 제가 이해한 바로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깨우치시고 가르치셨다고 하는 법은 붙잡을 수도 없고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법도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세계가 성스러운 분들을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원문 이해

 

자칫하면 붓다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지기가 쉬웠다. 이것은 까다로운 질문이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습니다."하고 말하기 쉽게 만드는 그런 질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스승님은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붓다이신 스승님이 아니라면 세상의 어느 누가 깨달음을 얻었겠습니까?"

그러나 얻는다는 생각 자체가 영적이지 않다. 붓다는 얻을 것도 없으며 얻는 자도 없다고 말한다.

수부티는 이렇게 말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스승님, 당신은 아무도 가르치지 않은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당신은 아무도 설한 적이 없는 진리를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설할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얻을 것도 없고, 얻는 자도 없다면 누가 그것을 설할 것인가? 그리고 설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수부티는 붓다의 질문에 속지 않았다. 그러므로 먼저 수부티는 이렇게 말한다.

"아닙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얻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을 옳게 이해했다면, 거기에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저러한 것' 이라든가 '아무 것도 아닌 것' 이라는 두 경계를 초월한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할 방법도 말할 방법도 없습니다."

언어는 오직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이해한다. 긍정과 부정을 넘어선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나서 수부티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절대적인 세계는 저 너머의 세계, 초월의 세계를 의미한다. 사랑과 미움, 삶과 죽음,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천당과 지옥, 이 모든 이원성(二元性)을 넘어선 세계가 절대적인 세계다. 그리고 절대적인 세계는 성스러운 사람들을 찬양한다. 절대적인 것, 초월적인 것이 그들을 찬양한다.

붓다는 텅빈 거울이다. 그는 다만 존재를 있는 그대로 비춘다. 거울은 말할 게 아무 것도 없다. 거울은 앞에 비치고 있는 물건에 대해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비출 뿐이다. 붓다 안에 존재계가 비친다. 절대의 세계가 그를 찬양한다. 그 세계가 붓다 안에 반영된다. 그리고 붓다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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