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달마가 죽기 전 네 명의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달마가 첫번째 제자에게 물었다.

"내 가름침의 정수(精髓)가 무엇이냐?"

"당신의 가르침의 핵심은 명상입니다."

"네 대답은 옳다. 하지만 옳은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대는 기껏해야 내 가죽을 얻었다. 가서 앉아라."

달마는 두 번째 제자에게 물었고, 두 번째 제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핵심은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옳다. 명상은 결국 그대를 깨달음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은 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도 할 수 있다. 14년 동안 내 말을 들어온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는 첫 번째보다 더 깊이 들어갔다. 하지만 기껏해야 내 뼈를 얻었을 뿐이다. 가서 앉아라."

세 번째 제자에게 물었고, 이 제자가 대답했다.

"당신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침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앞의 두 사람 보다는 낫구나. 그러나 침묵하라는 것이 내 가르침이라면 그대는 왜 말을 했는가? 그대 스스로 내 가르침을 어겼다. 그대는 내 골수(骨髓)를 얻었으니 가서 앉아라."

네 번째 제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절했다. 단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이를 보고 달마가 말했다.

"그대는 나의 영혼을 얻었다. 그대가 내 후계자다. 그대의 눈물은 다른 사람들이 놓친 것을 말해 주었다. 그대의 감사함과 침묵은 다른 사람들이 놓친 것을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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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온광이 대주에게 물었다.

"선사께서는 다시 태어나실 곳을 알고 계십니까?

대주가 말했다.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다시 태어남을 논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태어남을 아는 그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탄생을 떠나 태어나지 않는 것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조사(組師)께서도 '탄생을 거치는 그것은 실제로는 태어나지 않는다' 고 말씀하신 것이다."

 

 

 

 

 

 

 

 

원문 이해

 

"그대는 탄생 전에도 존재했고, 사후(死後)에도 존재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탄생 전에 존재하던 것과 사후에 존재하는 것이 똑 같다. 그것의 이름은 붓다다. 그것의 이름은 주시자다. 그것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대주는 말한다.

"태어남을 아는 그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탄생을 아는 자, 그는 태어나지 않는 주시자다. 절대적으로 깨어 있는 의식을 갖고 죽지 않았다면,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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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어는 날, 백장이 제자들과 함께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한 중이 호미를 들어올리는 찰나, 저녁을 알리는 북소리를 듣고 큰 소리로 웃더니 호미를 놓고 절로 돌아갔다.

백장이 이를 보고 말했다.

"장하도다! 이것이 관음 보살이 진리로 들어가신 문이다."

절에 당도했을 때 백장이 물었다.

"아까 북소리를 들었을 때 어떤 진리를 깨쳤느냐?"

중이 말했다.

"저는 무척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북소리를 듣고 돌아가 밥을 먹었습니다."

이 소리에 백장이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원문 이해

 

고요하고 정직하다면 다른 응답이 나올 수 없다. 두 사람 다 우연히 웃었다. 그들은 둘 다 일에 열중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잊었다. 그리고 그대 자신을 잊었을 때 어떻게 배고픔을 기억해낼 수 있겠는가? 그들이 북 또는 목탁 소리를 들었을 때, 갑자기 이 소리가 머리를 치면서 기억이 떠올랐다. "배가 고프다. 밥을 먹으러 갈 시간이다."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백장은 두 사람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졌다. 비슷한 상황 속에 있는 두 사람, 정직하고 단순하며 명상적인 두 사람에게서 유사한 응답이 나오는 것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모든 붓다는 특정한 상황 속에서 유사하게 감응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순간 속에 살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은 마음을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이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감응한다. 가슴이 텅 빈 사람의 감응은 거울과 같다. 앞에 무엇이 있건 있는 그대로 비춘다.

두 사람 다 배고픔을 느끼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얼마나 일에 열중했던지 배고픔의 징조조차 없었다. 마치 목탁 소리 때문에 배가 고파진 것 같다."

거기 배고픔이 있었지만 잠잠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의식이 다른 일에 완전히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목탁 소리가 의식을 '기다리고 있는 배고픔' 으로 향하게 했다. 백장은 단순하고 가슴이 텅 빈 사람들의 유사성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일은 명상이 되어야 한다. 그대가 앉아서 명상을 하듯이 붓다는 보행(步行)도 명상으로 도입했다. 그렇다면 일과 명상이 연관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 이유도 없다. 사실, 일 뿐만 아니라 육체의 모든 움직임이 명상적인 침묵에서 나와야만 진정으로 붓다가 될 수 있다. 붓사는 좌선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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